성당에서 드리는 기도는 항상 같다. 나를 위해 기도한다. 마음의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Agnus Dei 미사곡에서는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도와 상관없이 성당에 가면 항상 생각난다. 주송을 하는 미사에 참석한 것은 한 번 뿐이지만 사소한 기억들까지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다. 종교가 같다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인연이라고 믿고 싶었던 나의 어리석은 욕망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겠지.

이미 끝났다는 걸 알고 있다. 설혹 다시 기회가 와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헛된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함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모멸감과 분노에 휩싸이는 것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오직 나의 것일 뿐, 그에게서 나는 이미 사라진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바보같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분노, 부정, 우울, 타협, 인정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거쳐야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생각보다 길어진다는 것이, 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화가 나고 씁쓸하다.

바보같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미 끝났고, 나는 벗어나야 하고, 나를 아끼고 나를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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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solitary) 그리고 연대(solidaray). - 알베르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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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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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이다. 그래서 더 끌렸는지 모른다.

이제 서른이 되었다. 이십대의 마지막이라는 어설픈 감상에 사로잡혀 힘겨웠던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비하면, 서른이 되는 것은 그냥 하루밤이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친구 말대로 유난떨 것 없이 그냥 나이값해야 하는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 뿐이었다. 다만 스물아홉이 끝날 무렵 몹시도 나를 지치게 했던 관계를 끊어내며 혼란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긴 하나 보다. 서른이 되며 나이값을 하느라 그랬을까, 관계를 돌아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서 그랬을까. 

 혼란을 겪으며 그간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가 내가 남성중심사회에서 얼마나 조신하고 참한 여성의 이미지를 강요받아왔는지,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얼마나 나의 욕망을 누르고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제도권안에서 어느정도 인정받는 여성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서른이 되어 돌아본 나의 자아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남성 의존적 자아였다. 어쩌면 나를 지치게 했던 그 관계에서 내가 더 당당하지 못하고, 더 결단력있게 행동하지 못했던 것도 나의 불안한 자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핍을 채우려 여성심리학, 페미니즘 서적을 찾아 읽다가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언제나 일탈을 꿈꾸지만 꿈만 꿀 뿐 틀을 깨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의 제목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라니! 이 문장에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제도에 대한 상당한 도전이 담겨 있다. 외국 남자와 팔짱만 끼고 전철을 타도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사회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다. 책을 읽으며 그녀의 도전과 용기에, 여성으로서 남성중심사회에 가하는 날카로운 비판에, 결코 '운동권'이 아니었으나 어느 '운동권'보다 진보적인 그녀의 생각과 행동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그녀가 결코 삶을 관념적으로 살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얻어낸 철학임을 알 수 있었다. 새겨두고 싶은 문장에 표시를 해 두었더니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조금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내 삶이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책을 통해 가부장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어떤 고정관념에도 매이지 않고 내 스스로의 가치와 선택을 믿고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의 자세에 한 발 내딛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녀처럼 국경을 넘어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사회적 제약이나 안락함을 위해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갈망하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그녀가 국경을 넘은 것과 같은 수위의 모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 나의 선택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깊은 곳에 숨겨둔 기분이랄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오래된 노래 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가치임을 일깨워주었다. 

  또 하나, 진정한 진보란 관념적인 구호를 외칠 뿐 정작 삶에서는 관습과 허위로 일관하는 '운동권'이 아니라 삶의 작은 영역에서부터 진보를 실천하는 '생활 좌파'를 말하는 것이다. 모순 덩어리의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거친 구호와 단결된 집단의 투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민 세력의 거대한 힘과 투쟁은 사회를 변혁하는 강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힘의 원동력은 개인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학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갖고 있는 혼란- 조직을 위해 개인의 취향이나 욕망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불편함-이 이 책을 통해 해소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의 문화 정책에 대한 제안이다. 그녀는 문화와 예술이야 말로 공공서비스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전적으로 그녀의 생각에 지지한다. 예술은 인간의 감성을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한다.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충만한 사람의 삶은 물질적인 조건을 떠나서 삶이 여유롭고 풍요롭다. 문화 예술이야말로 건강한 삶,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분야이다. 의료, 교육은 말할 것 없고 문화 역시 공공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이 문화적 취향마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이 시대에 과연 언제쯤 가능할까.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고 그녀의 시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닌 나를 향한 질문 '나는?'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질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대한 구조 속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에 대한 질문은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만 답이 있는 곳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게 도와주는 것일 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갈 용기는 여전히 없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아주 작고 미약한 것, 내 삶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활좌파.

 

'내가 투자한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p.100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p.110

가우디의 뛰는 심장이 느껴지는 곳곳에서 뱃속의 칼리에서 말했다.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현혹되지 말고 자유롭게, 완전히 너 자신만의 가치와 의지로 선택한 너의 인생을 누리렴." -p.135

최근들어 깨달은 좌와 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며 깨어있는 존재가 좌파라면, 텔레비전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영혼을 무덤 속에 파묻고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믿는 쪽이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p. 290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휴일도 반납하고, 밤잠도 안 자는 파란지붕 집의 사람들이 엄청 사로를 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될 수 없듯이.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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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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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희생과 인내로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영화와 문학에서 새로운 대안형 가족의 유형을 제시한 예도 많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점은 유효하다. 어쨌든 그것이 국가가 만들어 낸 것이든, 역사적으로 그리 된 것이든 가족과 가정이 주는 이미지가 위로와 평안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가족의 유대감과 정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엄마를 부탁해'의 제목을 보고 10년 전 김정현의 '아버지'를 떠올린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IMF시기와 절묘하게 맞물려 각종 매체에서 온 나라는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던 '아버지'를 겨우 눈물 몇 방울 짜내며 읽었던 나는 내게 유년기의 치유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해야 했다. 아니면 우리 가정이 대한민국 평균이 아니거나...한창 감수성 풍부하던 고등학생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 소설이 그다지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아버지'라는 대한민국 공통의 정서를 다루면서 그것이 너무 직접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든 문학이든 너무 대놓고 슬픔, 기쁨, 외로움을 말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취향이 아닌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창작과 비평에 연재된 소설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모성의 숭고함이나 우리 사회 어머니의 강인함과 희생정신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닌가했다. 10년 전 '아버지'처럼 시기도 적절하지 않은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혹한 시기에 모성을 통한 위로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건, 실제 사례가 있건 간에 이 말이 사용될 때 깔려있는 여자가 약한 존재라는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무엇보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모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제거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성이 남성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놀라운 힘을 가진 것은 알고 있지만 엄마라는 사회적 역할이 본직적인 자아와 정체성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첫 번째 연재된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편견을 접고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이상 엄마가 강인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목을 다시 보니 엄마를 '부탁해'였다. 엄마를 희생정신과 강인한 생존력으로 무장한 존재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이 소설을 기다리며 끝까지 읽게 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수소문 하던 중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는 엄마의 모습은 파란 슬리퍼를 신고 불안한 눈빛으로 오래 전 동네를 기웃거리는 어린 아이처럼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엄마- 서울 오빠의 자취방에 올 때 엄마가 보여준 억척스러움, 이모의 죽음에도 울지 않던 강인함, 장남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붓던 모성-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제서야 '나'는 엄마와의 시간을 돌아보는 '행위'를 하게 된다.  

  더 독특한 것은 이 소설의 시작이 '너'로 지칭되는 인물의 행위를 누군가가 서술한다는 점이다. 1장에서 3장까지 '너', '그', '당신'으로 지칭되는 이는 각각 나, 오빠,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독특한 서술 방식이 이 소설을 기다리며 끝까지 읽게 한 두 번째 이유이다. '너'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로 거리를 두고 관찰을 하며 전달하지만 마치 내 안의 내밀한 독백이 되는 듯 스며든다. 어느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차분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력과 다음의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력이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다. 객관적인 듯 하지만 어느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신경숙 특유의 문체가 '리진'에서는 주춤한 듯 했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그런 서운함을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궁금증을 가지고 읽었던 독특한 시점의 정체는 4장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4장의 첫 페이지를 읽으며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3장까지의 서술자는 바로 잃어버린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경숙 특유의 문체로 엄마는 엄마로 살아야 했던 생의 상처와 외로움, 소박하고 애틋한 행복을 담담히 풀어 낸다. 그리고 엄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엄마의 모습이 '또다른 여인'으로 그려진다. 알지 못했던,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엄마의 삶은 '슬퍼'라고 말하지 않지만 너무나 가슴이 먹먹하도록 슬프게 한다. 그리고 차마 아니 감히 엄마의 죽음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끝까지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출간된 소설에 추가된 에필로그에서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라고 되어 있다. 어쩌면 작가도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외딴방'을 덮으며'아, 그녀는 참 아프게 힘겹게 이 글을 썼겠구나.'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를 덮으며 '그녀는 글을 쓰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해졌겠구나.'라고 감히 추측을 해 봤다. 엄마는 그렇게 치유와 돌봄을 통해 평온함을 주는 존재이니까.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그녀도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이기 때문에 '여인'의 모습이 배제되는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했던 자식들 모두가 죄인이다.  소설을 덮을 때면 누구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엄마 역시 대한민국의 여느 엄마들처럼 희생과 인고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요즘은 세상 편해졌지.'라고 말한다 해도 엄마라는 존재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짐들은 그리 쉽게 편해지는 것들이 아니다.  

    여전히 나의 엄마는 서울에 올 때 콩이니 간장이니 하는 것을 잔뜩 들고 오신다. 소설 속의 '엄마'처럼 버스나 기차를 타고 오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무겁잖아. 뭐하러 가져와.'라고 말한다. 소설 속의 '나'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약하고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자식들을 보러 엄마가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혹시나 엄마가 길을 잃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할 때였을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부로만 살아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엄마가 소녀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였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강인함 뒤에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 참 당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엄마가 시와 소설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을, 공연장과 전시회를 좋아한다는 것을, 맑은 색채의 수채화를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을 이야기할 때 엄마의 눈빛에는 소녀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니들 대학가면', '니들 졸업하면', '니들 결혼하면'으로 위로하고 접어두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좋아하는 엄마는 가끔 나의 자취집에 와서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곤 한다. 얼마전 엄마가 책을 읽다가 "이젠 눈이 흐릿해서 책을 오래 못 보겠다."라며 책을 덮었다. 부엌으로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로 살아오며 꿈을 미뤄두는 동안 엄마의 몸은 그렇게 사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이 소설을 읽게 되어서. 올해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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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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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엇갈림이라는 고전적인 소재이지만 신파나 삼류로 흐르지 않는다. 역시 심사평에서 말하는 '숨김'의 미학 때문일까.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며 읽게 된다. 가슴이 팽팽하게 터질 것 같다가 옥죄는 것 같다가'아'하는 탄성이 나온다. 스릴러도 아닌데 말이다. 소설의 서술방식을 참으로 담담하다. 아주 건조하다. 하지만 독자는 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왜 일까.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같아서 그 아픔에 고스란히 젖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누구나의 이야기. 하지만 독특한 서술방식.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아픔이, 그 안타까움이 가슴을 오래도록 먹먹하게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사랑을 믿고 있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나는 어떤 모양의 산 능선을 이루고 있을까.

책을 덮고 뜨거운 눈시울을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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