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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ㅣ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돼. 영혼의 상처. 후벼 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살았어.”
언젠가 주말의 명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는데 문성근이 술을 마시다가 말했다. 이불 감고 뒹굴면서 보다가 멈칫했다. 영화 속에서 문학잡지 편집장인 그가 문학과 작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데 그 중 가장 가슴에 꽂히는 말이다. 지난 번 모임 생각이 났다. 시 창작 교실 작품들을 보면서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말들.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 삶의 절실한 체험 때문일까, 천재적인 상상력과 구성능력 때문일까.
나는 굴곡 없이 안정된 삶을 살아 온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만 때론 그런 평범한 삶이 ‘국어교사로서 체험이 결핍된 삶’이라는 콤플렉스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에겐 영혼의 상처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어교사는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데 문성근이 던진 말 한마디에 나는 ‘백날 써 봐야 귀여니 수준 밖에 안 될지 몰라.’라며 그날 밤을 설쳤다.
그동안 '맨발'시집은 두세 번을 읽었는데 선뜻 감상문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가방에 넣어 다니며 전철이나 버스에서 읽고 또 읽고 하느라 시집이 너덜너덜해 졌다. 감상문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가슴에는 와 닿지만 내게 이런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아, 어쩜 이 순간을 이렇게 관찰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참 평온한 시로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그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내게 작가와 같은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 라고만 생각했다.
다음날 지하철에서 ‘영혼의 상처’를 되새기며 문태준의 『맨발』중에서 마음에 와 닿아 표시해 둔 시들을 다시 펴 보았다. 시인에게 영혼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어물전에 놓인 개조개에서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떠올렸으리라. 천천히 발을 거두는 모습만큼 천천히 살아온 그의 삶은 결코 명민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삶이다. 움막 같은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야망도 꿈도 없이 흘러온, 무능하고 초라한 그의 삶이지만 화자는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갖고 있다. 맨발로 길에 나서 발이 부르트지만 움막 같은 집에서 위안을 얻는 그의 삶에서 삶의 진정성과 고귀함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화자는 죽은 부처의 발을 조문하듯 건드린다.
1학기에 수업을 한 「가정」이 떠올랐다. 진도에 쫓겨 참 재미없는 수업을 했었는데 읽기 전에 아이들과 자신의 가정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집은 강변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여닫을 때마다 금속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과 아침 일찍 일을 나가시던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 가게 구석에 놓인 쥐약, 가게 구석에 딸린 어두운 부엌에서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의 한숨이 떠오른다. 생일이 같은 동네 아이의 유치원 생일 파티에 다녀와 투정을 부리던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서글픔이 이 시의 개조개의 삶과 닮아있다. 내 이야기를 끝냈을 때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내게도 상처가 있다면 있었다. 다만 그것을 확인하기까지가 참 오래 걸렸다. 사람들은 힘든 기억을 빨리 잊고 싶어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가 있다고 다 시가 써 지면 얼마나 좋을까.
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기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맷돌 하나로 이렇게 진실한 삶의 모습들을 표현해 낼 수 있음이 놀랍다. 투박함, 고단함, 낡음, 설움, 비루함, 생명력, 상처들을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다 겪어 이제 더 아플 것도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더 서러운 외할머니가 만져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서 모성에 대한 애착을 많이 보이는 작가에게 외할머니는 보다 더 각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내게도 외할머니는 어려서는 약손으로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존재였고 지금은 지난날의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동여매고 살아가는 약하고 초라하지만 여전히 그 그늘이 그리운 존재이다. 화자는 수십년 돌려온 맷돌처럼 낡은 외할머니의 손길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어 한다. 또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겪어 이제는 너무 작고 약해 진 외할머니를 화자 자신이 안아드리고 싶을 것이다.
「맨발」이나 「맷돌」에서 보이듯 그의 시에는 아픔만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을 보듬어 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어서 좋다.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이를 ‘아’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절묘하게 비유를 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연민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표현한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그는 낡고 초라한 것들에 대한 상처를 끄집어 내고 있다. 하지만 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그 상처라는 것이 꼭 반드시 가슴이 저리고 설움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어도 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정서로 보면 그런 감정보다는 그저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아주 가끔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슬픔이 더 호소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상처라는 것은 낡고 쓰러져가는 시골의 모습이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다. 또한 그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낸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영혼의 상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상처를 후벼 팔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 하지만 꽃, 나무, 돌 들을 보면서 그런 상처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바로 시인의 감성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