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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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희생과 인내로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영화와 문학에서 새로운 대안형 가족의 유형을 제시한 예도 많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점은 유효하다. 어쨌든 그것이 국가가 만들어 낸 것이든, 역사적으로 그리 된 것이든 가족과 가정이 주는 이미지가 위로와 평안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가족의 유대감과 정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엄마를 부탁해'의 제목을 보고 10년 전 김정현의 '아버지'를 떠올린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IMF시기와 절묘하게 맞물려 각종 매체에서 온 나라는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던 '아버지'를 겨우 눈물 몇 방울 짜내며 읽었던 나는 내게 유년기의 치유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해야 했다. 아니면 우리 가정이 대한민국 평균이 아니거나...한창 감수성 풍부하던 고등학생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 소설이 그다지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아버지'라는 대한민국 공통의 정서를 다루면서 그것이 너무 직접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든 문학이든 너무 대놓고 슬픔, 기쁨, 외로움을 말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취향이 아닌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창작과 비평에 연재된 소설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모성의 숭고함이나 우리 사회 어머니의 강인함과 희생정신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닌가했다. 10년 전 '아버지'처럼 시기도 적절하지 않은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혹한 시기에 모성을 통한 위로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건, 실제 사례가 있건 간에 이 말이 사용될 때 깔려있는 여자가 약한 존재라는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무엇보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모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제거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성이 남성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놀라운 힘을 가진 것은 알고 있지만 엄마라는 사회적 역할이 본직적인 자아와 정체성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첫 번째 연재된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편견을 접고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이상 엄마가 강인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목을 다시 보니 엄마를 '부탁해'였다. 엄마를 희생정신과 강인한 생존력으로 무장한 존재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이 소설을 기다리며 끝까지 읽게 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수소문 하던 중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는 엄마의 모습은 파란 슬리퍼를 신고 불안한 눈빛으로 오래 전 동네를 기웃거리는 어린 아이처럼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엄마- 서울 오빠의 자취방에 올 때 엄마가 보여준 억척스러움, 이모의 죽음에도 울지 않던 강인함, 장남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붓던 모성-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제서야 '나'는 엄마와의 시간을 돌아보는 '행위'를 하게 된다.  

  더 독특한 것은 이 소설의 시작이 '너'로 지칭되는 인물의 행위를 누군가가 서술한다는 점이다. 1장에서 3장까지 '너', '그', '당신'으로 지칭되는 이는 각각 나, 오빠,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독특한 서술 방식이 이 소설을 기다리며 끝까지 읽게 한 두 번째 이유이다. '너'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로 거리를 두고 관찰을 하며 전달하지만 마치 내 안의 내밀한 독백이 되는 듯 스며든다. 어느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차분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력과 다음의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력이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다. 객관적인 듯 하지만 어느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신경숙 특유의 문체가 '리진'에서는 주춤한 듯 했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그런 서운함을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궁금증을 가지고 읽었던 독특한 시점의 정체는 4장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4장의 첫 페이지를 읽으며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3장까지의 서술자는 바로 잃어버린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경숙 특유의 문체로 엄마는 엄마로 살아야 했던 생의 상처와 외로움, 소박하고 애틋한 행복을 담담히 풀어 낸다. 그리고 엄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엄마의 모습이 '또다른 여인'으로 그려진다. 알지 못했던,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엄마의 삶은 '슬퍼'라고 말하지 않지만 너무나 가슴이 먹먹하도록 슬프게 한다. 그리고 차마 아니 감히 엄마의 죽음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끝까지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출간된 소설에 추가된 에필로그에서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라고 되어 있다. 어쩌면 작가도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외딴방'을 덮으며'아, 그녀는 참 아프게 힘겹게 이 글을 썼겠구나.'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를 덮으며 '그녀는 글을 쓰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해졌겠구나.'라고 감히 추측을 해 봤다. 엄마는 그렇게 치유와 돌봄을 통해 평온함을 주는 존재이니까.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그녀도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이기 때문에 '여인'의 모습이 배제되는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했던 자식들 모두가 죄인이다.  소설을 덮을 때면 누구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엄마 역시 대한민국의 여느 엄마들처럼 희생과 인고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요즘은 세상 편해졌지.'라고 말한다 해도 엄마라는 존재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짐들은 그리 쉽게 편해지는 것들이 아니다.  

    여전히 나의 엄마는 서울에 올 때 콩이니 간장이니 하는 것을 잔뜩 들고 오신다. 소설 속의 '엄마'처럼 버스나 기차를 타고 오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무겁잖아. 뭐하러 가져와.'라고 말한다. 소설 속의 '나'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약하고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자식들을 보러 엄마가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혹시나 엄마가 길을 잃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할 때였을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부로만 살아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엄마가 소녀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였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강인함 뒤에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 참 당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엄마가 시와 소설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을, 공연장과 전시회를 좋아한다는 것을, 맑은 색채의 수채화를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을 이야기할 때 엄마의 눈빛에는 소녀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니들 대학가면', '니들 졸업하면', '니들 결혼하면'으로 위로하고 접어두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좋아하는 엄마는 가끔 나의 자취집에 와서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곤 한다. 얼마전 엄마가 책을 읽다가 "이젠 눈이 흐릿해서 책을 오래 못 보겠다."라며 책을 덮었다. 부엌으로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로 살아오며 꿈을 미뤄두는 동안 엄마의 몸은 그렇게 사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이 소설을 읽게 되어서. 올해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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