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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독거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는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는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가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심(無心)과 무욕(無慾)에 대한 동경과 찬사. 아름답다. 구름과 같은 삶. 나도 요즘 이런 상태를 꿈꾼다. 불편한 것을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과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버리는 것. 다가오는 것, 떠나가는 것 붙잡지 않고 가두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과 무욕. 냉정함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을 갖고 싶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 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격정과 혼란의 가라앉음, 갈무리를 발견하는 문학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시큰둥하고 별 볼일없는 여름을 보냈더니 뜨거움과 혼돈의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 미움과 연민, 자괴감과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는 느낌이다. 아, 그래서 나도 소원이다. 이 시처럼 이렇게 가을처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 사실 1월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가을의 적막함이 참 슬펐던 것 같다. 시집 귀퉁이에 ‘가을의 이미지가 이리도 슬프다니...’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랬나보다.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그때는 더 이상 그리워할 것도, 애틋함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는 추억도 희망도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를 읽으며 ‘제발 좀 이랬으면..’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럽긴 하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적막함’, ‘게으름’, ‘이유 없는 방황’, ‘혼자 울기’, ‘더이상 열정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임을... 하지만 ‘잠자리처럼 임종’은 사양하고 싶은 걸 보니 그래도 아직 버텨낼 힘은 남아 있는 것이겠지.
지난 가을은 육체적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무언가를 손에 잡은 채로 움직이고 있지만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누가 나의 상태를 물어보면 ‘모르겠어. 모르겠어.’만 연발했다. 그런 즈음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읽으며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나를 몹시도 괴롭히던 일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 읽었기 때문에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로 시나 소설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왔던 나의 특성으로 볼 때 안도현의 시집 역시 그런 효과가 있다고 봐야겠다.
마치 한 편의 한시처럼 정갈한 이미지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고 할까. 하찮고 소박한 것에서 고귀함을 발견하는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다가도 (「공양」), 그 고귀함을 능청스럽고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시인의 재치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독거」) 2부의 음식을 제목으로 한 시들은 푸짐하고 넉넉한 외할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한다. 읽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기는데 그 욕망이 천박하지 않고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시 곳곳에 버무려 놓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