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8시 단성사 시사회
 

  적벽을 손에 넣기 위해 주둔한 조조의 진영에는 역병이 만연하고, 용하다는 화타의 의료 시술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이 산을 이룬다. 이 와중에도 조조는 군대에서 사람 단순하게 만들기에 유용하다는 '군대 축구'를 시키는데.. 사람은 죽어 나가는데 군대 축구나 시키고 참으로 MB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병사들 중에 유독 호나우두의 돌파력과 베컴의 골결정력을 동시에 지닌 숙재라는 사람이 있어 군대 축구에서 우승했다고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게 된다.  21세기는 정보가 곧 권력임을 공명은 이 시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기상청의 정확한 예보와 손권의 여동생 상향이 무선 인터넷으로 보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이 와중에 공명과 주유는 서로 목을 따네 마네 하며 화살 획득과 조조의 수군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주유의 아내 소교는 한심함 남정네들의 놀이에 한숨 쉬며 반쯤 눈을 내리깔고 매일 차나 들이킨다.

  이해못할 캐릭터인 숙재의 도움으로 무사히 동오로 돌아온 상향은 스트립쇼 한 방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칼을 차고 전장에 함께 출동할 자격을 얻게 된다. 주유도 조조도 불장난을 좋아해 누가 먼저 불을 지르냐가 관건인데 풍향이 조조에게 유리한 북동풍이라 조조는 바로 치려하고,주유는 시간을 끌어야 하고... 이를 알게 된 소교가 스스로 차 외판원을 자청하며 조조의 적진으로 나홀로 찾아가고.. '한 잔 하고 가세요.'라는 노골적인 언니 말 한마디에 조조는 업소를 지나치지 못하고 주저 앉으니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뀌어 버린게다.

  주유의 수군의 공격으로 사슬로 연결한 조조의 수군은 불타오르고 불구경이 제일 신난다더니 조조는 멍 때리며 불구경이나 하고 있다. 이에 떠나는 척 하며 주유와 짜고 대기하고 있던 유비의 군사도 밀어 닥치는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니 조자룡이 실은 '이신바예바'였다는 것.. 그 와중에 대체 왜 나왔는지 모를 캐릭터인 축구신동 숙재는 창검술은 안 익히고 군대축구에만 열을 올린 탓에 화살 맞아 죽고.. 어쨌든 조조의 진영을 몽땅 불싸지르고 닥치는대로 찔러 대던 얘들이 정신차리고 소교를 찾으니 이미 인질로 잡힌 뒤다. 병사들 다 죽고 다 불탔는데 그 와중에 무릎꿇는 게 뭐가 중요한지 소교 하나 인질로 잡았다고 무릎을 꿇으란다. 활을 잡은 손권은 누구를 겨눠야 할지 진땀 뺀다. 이에 조자룡이 소교를 인질로 잡은 장군을 치고, 영화 내내 큰소리 한 번 못내던 소교는 여전히 큰소리 한 번 못내고 묘한 콧소리를 내며 2층에서 떨어지고, 손권이 조조를 향해 쏜 화살은 조조의 상투를 뚫고, 조조가 몹시 전지현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며 긴생머리를 나풀거리고, 주유가 참으로 먼 거리를 날아 소교를 받아내니 바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몹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싶었던 주유는 "니네 집에 가."라고 조조를 돌려보내고 긴머리 나풀거리며 조조는 노숙자 포스를 내뿜으며 터덜터덜 집으로... 공명은 청학동으로..

  대체 뭐람. 영화 내내 이 남성주의영화가 불편하면서 시사회가 끝나니 웃음이 났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전쟁 영화를 싫어하지만 진주에서 일을 끝내고 바로 올라오는 빠듯한 일정에도 시사회를 보려고 한 건 '삼국지'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10번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의 팬은 결코 아니다. 같이 본 친구와 후배가 그렇듯 남자들은 '삼국지'에 열광하지만 나는 '삼국지'에 시큰둥하다. 사실 '삼국지'는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남자들의 권력 쟁취를 위한 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내용도 그렇고 그것을 너무나 긍정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남자들이 삼국지를 보며 '조자룡'이 세니, '관우'가 세니 , 전투에서 몇 번 이겼네, 하며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 문득 아이들이 게임 캐릭터에서 어떤 파이터가 제일 높은지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때문에 적벽대전을 봐야겠다고 벼른 이유는 첫째, 원작이 삼국지이니 만큼 스토리의 구멍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 둘째, 삼국지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전투인 '적벽대전'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겼을까하는 호기심. 셋째, 1편에서 낚였으니 2편에서는 뭐가 대단한 게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단 둘째 조건은 만족했다고 해야 겠다. 함선이 불에 타는 장면은 실로 '스펙타클'이다. 삼국지를 읽으며 머리 속에 떠올렸던 주유의 화공법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렬하게 스크린에 불을 지른다. 이 장면 만큼은 앉아서 보는 내가 더울 정도였으니까.

 1편에서 "적벽대전은 언제 시작해?"라며 계속 묻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뭐야, 끝이야!"를 외쳤던 경험에 비춰볼 때 2편에서는 확실히 보여줬으니 셋째 조건 역시 만족했다. 
  

그러나 뭔가 불편한 첫째 조건이 계속 걸린단 말이야. 우선 소설 삼국지의 내용과 달리 오우삼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 물론 적벽대전 자체의 긴장감과 지략과 전술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 공명이 10만 화살을 구하는 것,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 것 등의 팽팽한 심리전은 소설 못지 않다. 하지만 남자들의 의리와 객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오우삼 감독 특유의 취향 때문일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는 생각이다. 
 

곳곳에 오우삼 영화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주유(양조위)가 홀로 검술을 연마하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 조조를 추적하는 막사안에서 흩날리는 천막, 주유와 조조와 조조의 장수가 소교를 인질로 두고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하는 장면의 긴장감, (사실 나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연출하는 긴장감), 상향과 숙재의 천진난만한 우정. 오우삼의 색채 때문일까, 전쟁신은 여느 사극의 그것과 달리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지나치게 남자들의 의리의 세계를 그리고자 한 시도 때문에 계략과 암투의 세계는 의리와 정의의 세계로 미화되어 더 불편해졌다. (삼국지의 남성주의세계도 불편하지만 그걸 미화하려고 덧칠한 건 더 불편하고 싫단 말야.) 주유는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군사들에 대한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완벽한 남자로 그려진 것으로도 모자라 피터지게 전쟁을 벌인 조조까지 너그럽게 놓아준다. 삼국지에 주유가 그런 인물로 그려졌었던가 갸우뚱해야 했다. (아무리 양조위라지만 이건 아니야.) 게다가 적벽대전의 유명한 지략 중의 하나인 황개의 고육지책이 빠진 것도 아쉽다. 나름 탄탄한 스토리라면 이 고육지책이 당연히 나오겠지했는데 이것 말고 너무 담을 것이 많았나보다.

그리고 정말 이해 안 될 캐릭터. 상향이 첩자로 조조의 진영에 침투했을 때 그녀를 '돼지'라고 부르며 친구로 대하던 '숙재'라는 사람. 결국은 전투에서 만난 상향을 반가워하다 활에 맞아 오우삼 영화 특유의 '으으~'를 외치며 상향의 '부르짖음'과 함께 죽게 되는데... 서사 구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상한 설정이다. 우정과 인류애를 담고 싶었던 걸까.

계략과 암투가 판을 치는 전투도 담고 싶고, 블록버스터만의 스펙타클도 담고 싶고, 남자들의 의리와 우정도 담고 싶고, 로맨스도 담고 싶고, 인물의 개성도 하나하나 담고 싶고, 너무 담고 싶은 게 많아 결국은 재료의 맛이 다 죽어버린 음식을 먹은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잖아도 남성주의 세계에 오우삼 특유의 남성중심 연출력이 더해져 더 불편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history라 남성중심적 사관으로 기록되었다지만 서양이든 동양이든 하나같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며 그나마 하는 역할이라고는 '미인계'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때론 화가 나게 한다. 그나마 쓰는 '미인계' 역시 여성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식이다. 물론 그 희생 역시 여성이 선택하는 것으로 미화되는 것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인가. 그리고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남자의 도움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또 어떻고.

그나마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상향은 정작 전투에서는 칼만 들고 돌아다닐 뿐 하는 것이 없다.  조조 진영의 군사인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다 화살 맞아 죽은 친구를 부여잡고 우는 것 뿐.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자 방향을 잡았다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그렇게 가는 편이 나았다. 어설프게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가 너무 어색하다. 여성 관객으로서는 참으로 웃기는 노릇으로 보일 수 밖에.

남자들이 오우삼 영화에 열광했던 것도 남성들이 꿈꾸는 일종의 판타지를 영화에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이 영화가 남성들의 취향은 충분히 만족시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 남자 관객들도 헛헛한 웃음을 지은 걸로 봐서는 오우삼식 남자 영화는 이제 남자들에게도 지난 취향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 역병에 걸린 환자들의 막사를 조조가 돌아보며 환자에게 다정하게 '말해봐라. 어디가 아프냐?'라고 다독이자 환자가 눈물 그렁한 채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겹쳐지는 장면: MB가 할머니를 껴 안고 다독였던 바로 그... 젠장.

- 영화에서 조조의 지략은 거세되고 여자에 눈이 멀고 생각이 짧은 찌질함만 남은 인물로 그려졌던 점도 아쉬움. 인물의 캐릭터가 전혀 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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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칠드런, 루이 말 감독

09.01.07 씨네큐브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주로 나치의 만행 고발, 휴머니즘과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영화들이었다. 물론  '굿바이 칠드런' 역시 '2008년 끝자락에 새겨질 영원한 감동!'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며 그런 영화려니 했다. 그래서 씨네큐브에서 루이말 감독 특별전을 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놓칠 뻔 했다. 루이 말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상당히 파격적인 주제를 다루는 감독이라는 것, 또한 부조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붙잡기에 충분했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아들 줄리앙은 수도원 기숙학교에서 새로 들어온 보네를 만난다. 마르세이유에서 왔다지만 마르세이유 억양이 없는, 주말에도 찾아오는 가족이 없는, '보네'라는 성이 미심쩍은 이 아이에게 줄리앙은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가 유태인이고 학교에 숨어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이스카웃 탐험을 하던 중 둘은 길을 잃고 이 사건 이후로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보네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 게슈타포가 수업 중에 교실에 들어와 '장 키플스타인'을 찾는다.

  '굿바이 칠드런'에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흔히 보여주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어른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이타적인 어린이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조셉을 통해 물건을 거래하기도 하고, 때론 그를 조롱하고 비웃기도 한다. 또  전쟁 시기의 영화가 보여주는 극적인 긴장감이나 드라마틱한 상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굳이 그런 긴장이 있다면 숲에서 길을 잃은 줄리앙과 장이 독일군을 만나자 장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장면, 게슈타포가 학교에 숨어 있는 유태인 학생들을 찾아내는 장면 등이 있을 뿐이다. 

  또, 영화를 보는 동안 참으로 의아했던 것은 영화 속 독일 병사들은 의외로 호의적이고 친절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대부분 영화에서 독일군들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에 비하면 몹시 특이하다. 게다가 루이 말 감독은 프랑스 감독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영화 속에서 오히려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은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에 협력하는 프랑스인들이었다. 식당에서 유태인에게 모욕을 주다 오히려 독일장교에게 쫓겨나는 시민군이 그랬고, 게슈타포에 학교에 숨어지내는 유태인이 있다는 것을 밀고하는 조셉이 그랬다. 오히려 그를 쫓아내는 '독일 장교'에게 줄리앙의 엄마는 호의적인 미소를 보내며, 숲에서 길을 잃은 줄리앙과 장을 데려 온 독일병사는 '독일 개'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도 대단히 예의바른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면 루이 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는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 받는 대신 그들 땅에서 벌어지는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침묵함으로써 그것에 동조한 것과 같다는 감독의 비판 정신.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게슈타포가 '장 키플스타인'을 찾을 때 무의식 중에 장을 향해 돌아보던 줄리앙의 행동.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변명하지만 누군가에게 가혹한 폭력이 되어 버리는 그 시대에 대한 반성. 아니,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고 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 큰 죄악이라는 감독의 반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듯 하다. 그 치욕과 반성을 드러냄으로써 루이 말 감독은 그 시대에 살아남은 죄의식을 씻고 싶었던 것일까.

  그 시대 양심적 지식인에 해당되는 신부님의 강론은 루이 말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같다. '부자가 잔치를 할 때 가난한 자는 분노한다.'는 강론. 그리고 그 강론에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나가버리는 학부모의 모습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지배층,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  '사회주의'라는 가면을 쓴 우파 부르주아 정권에 의해 점점 우경화 되고 신자유주의화 되어 가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 루이 말 감독의 다른 영화 찾아보기 
   68 혁명 배경 <밀루의 어떤 5월>,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성 고찰 <라콤 루시앙>

 -  왜 한국판 제목이 <굿바이 칠드런>일까.
    영화관에서 알게 된 원작은 <Au Revoir Les Enfants> 
    불어를 굳이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로 2중으로 변역하는 이유가 뭐냐.. 그래도 그나마 배운 불어로 읽을 수 있는 게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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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다. 그 외로움의 끝에 또다른 외로움을 만났다. 그리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다시 본 것은 아니지만, 두 번째 느낌은 사뭇 달랐다.
처음은 혼자 봤고, 두 번째는 누군가와 함께 보았지. 함께 봤지만 나도 사무치게 외로웠다. 오스칼처럼 이엘리처럼..

 영화 속 이엘리는 약하고 외로운 오스칼의 유일한 친구이면서 오스칼이 욕망하는 강인한 자아다. 동전의 양면 이론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나약한 오스칼의 내면에는 엄청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 오스칼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함이 느껴지는 이엘리에게 그런 자신의 욕구를 투사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즉, 이엘리는 오스칼의 외로움을 채워주면서 오스칼의 억눌린 욕망을 투영하는 또다른 자아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느낌보다는 연약한 소녀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의 행색이나 생활은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된 소녀에 가깝다. 그녀의 집, 그녀의 옷차림,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은 기초생활수급자의 모습과 겹쳐지게 한다. 외롭고 추워 보였다.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엘리를 돌봐주던 남자의 죽음이었다. 남자는 어린 뱀파이어인 이엘리를 대신해 피를 구해준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이엘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 후 시체를 수습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어설프다. 그리고 그 역시 외로워보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와 이엘리의 관계였다. 그가 피를 구해오지 못하자 이엘리는 그에게 화를 낸다. 아버지 나이 뻘로 보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고 하기엔 미심쩍다. 화를 내는 이엘리를 대하는 남자의 눈빛은 아버지로서 보내는 안쓰러움이나 안타까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식어버린 연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애절한 눈빛이었다. 그가 뱉은 말은 "미안하구나."였지만 그건 번역일 뿐 아마 실제 의미는 달랐으리라.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으로 붙잡히면서 얼굴에 염산을 끼얹은 그는 끝까지 이엘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어 준다. 이엘리가 그의 병실 창문을 두드릴 때 그는 창문을 열고 목을 내민다. 마지막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엘리의 텅 빈 눈빛. 그는 그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 행복했을까.   

혼자 된 이엘리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은 오스칼이다.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고 다소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는 곧 이엘리에게 돌아온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존재가 그들 뿐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으니까. 외로움과 절실함은 서로 통한다. 오스칼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가하는 처참한 복수 역시 실제 이엘리의 행위일 수도 있고, 오스칼의 억눌린 폭력성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환상일 수도 있고 실제일 수도 있다.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둘이 간절히 원하던 것을 현실로 만든 첫 번째 단계라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스칼은 기차를 타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큰 트렁크를 긁어 모스 부호를 보낸다. 그리고 트렁크 안에서 그에 화답하는 모스 부호가 돌아온다. 그들이 벽을 두고 신호를 보냈던 것처럼..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오스칼의 미소가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잊혀지지 않았던 남자의 죽음이 오스칼과 겹쳐 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남자 역시 오스칼처럼 외롭고 움추린 아이였겠지.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가 레스토랑에서 말을 거는 이웃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은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감춘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익숙해진 외로움과 단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레스토랑 따위는 오지 않았을테니.

나에겐 이엘리 뿐이고, 이엘리에겐 나뿐이라는 오스칼의 현재의 행복은 계속될까. 오스칼의 존재가 이엘리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 되고, 그도 늙은 남자처럼 어설퍼지면 그 때도 이엘리는 그를 처음처럼 사랑할까. 그래서일까. 나는 그 소년의 긴 여행이 슬픔의 서막인 듯 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두 번째 봤을 때는 '죽은 남자도, 오스칼도 행복하겠구나'라고 인정했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의 관점일 뿐이었다. 어쩌면 늙은 남자 역시 마지막을 생각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엘리에게 기꺼이 그를 주었다. 오스칼 역시 기꺼이 그를 이엘리에게 줄 것이다. 이엘리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 역시 그녀를 포기한 순간이 있었으니까. 오스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탕을 먹는다던가, 초대 받지 않고 오스칼의 집에 들어와 온 몸에서 피를 쏟는 것은 연인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그래,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타인에게서는 배제되겠지만 그들 안에서는 행복할 것이다. 다만 변화를 인정하면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오스칼과 늙은 남자가 믿은 건 그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이엘리라는 존재 자체의 불변성과 영원성일 뿐이다. 관계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믿은 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날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렛미인을 본 그와 나의 관계도 정리가 되었다. 오스칼과 이엘리가 설렘 가득한 시작을 할 때 나는 그와의 불분명한 관계의 매듭을 지었다. 이엘리가 오스칼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관계가 변하듯 마음도 변한다. 하지만 변하는 마음을 떠나서 과연 그에게 진정성이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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