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8시 단성사 시사회
적벽을 손에 넣기 위해 주둔한 조조의 진영에는 역병이 만연하고, 용하다는 화타의 의료 시술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이 산을 이룬다. 이 와중에도 조조는 군대에서 사람 단순하게 만들기에 유용하다는 '군대 축구'를 시키는데.. 사람은 죽어 나가는데 군대 축구나 시키고 참으로 MB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병사들 중에 유독 호나우두의 돌파력과 베컴의 골결정력을 동시에 지닌 숙재라는 사람이 있어 군대 축구에서 우승했다고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게 된다. 21세기는 정보가 곧 권력임을 공명은 이 시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기상청의 정확한 예보와 손권의 여동생 상향이 무선 인터넷으로 보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이 와중에 공명과 주유는 서로 목을 따네 마네 하며 화살 획득과 조조의 수군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주유의 아내 소교는 한심함 남정네들의 놀이에 한숨 쉬며 반쯤 눈을 내리깔고 매일 차나 들이킨다.
이해못할 캐릭터인 숙재의 도움으로 무사히 동오로 돌아온 상향은 스트립쇼 한 방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칼을 차고 전장에 함께 출동할 자격을 얻게 된다. 주유도 조조도 불장난을 좋아해 누가 먼저 불을 지르냐가 관건인데 풍향이 조조에게 유리한 북동풍이라 조조는 바로 치려하고,주유는 시간을 끌어야 하고... 이를 알게 된 소교가 스스로 차 외판원을 자청하며 조조의 적진으로 나홀로 찾아가고.. '한 잔 하고 가세요.'라는 노골적인 언니 말 한마디에 조조는 업소를 지나치지 못하고 주저 앉으니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뀌어 버린게다.
주유의 수군의 공격으로 사슬로 연결한 조조의 수군은 불타오르고 불구경이 제일 신난다더니 조조는 멍 때리며 불구경이나 하고 있다. 이에 떠나는 척 하며 주유와 짜고 대기하고 있던 유비의 군사도 밀어 닥치는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니 조자룡이 실은 '이신바예바'였다는 것.. 그 와중에 대체 왜 나왔는지 모를 캐릭터인 축구신동 숙재는 창검술은 안 익히고 군대축구에만 열을 올린 탓에 화살 맞아 죽고.. 어쨌든 조조의 진영을 몽땅 불싸지르고 닥치는대로 찔러 대던 얘들이 정신차리고 소교를 찾으니 이미 인질로 잡힌 뒤다. 병사들 다 죽고 다 불탔는데 그 와중에 무릎꿇는 게 뭐가 중요한지 소교 하나 인질로 잡았다고 무릎을 꿇으란다. 활을 잡은 손권은 누구를 겨눠야 할지 진땀 뺀다. 이에 조자룡이 소교를 인질로 잡은 장군을 치고, 영화 내내 큰소리 한 번 못내던 소교는 여전히 큰소리 한 번 못내고 묘한 콧소리를 내며 2층에서 떨어지고, 손권이 조조를 향해 쏜 화살은 조조의 상투를 뚫고, 조조가 몹시 전지현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며 긴생머리를 나풀거리고, 주유가 참으로 먼 거리를 날아 소교를 받아내니 바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몹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싶었던 주유는 "니네 집에 가."라고 조조를 돌려보내고 긴머리 나풀거리며 조조는 노숙자 포스를 내뿜으며 터덜터덜 집으로... 공명은 청학동으로..
대체 뭐람. 영화 내내 이 남성주의영화가 불편하면서 시사회가 끝나니 웃음이 났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전쟁 영화를 싫어하지만 진주에서 일을 끝내고 바로 올라오는 빠듯한 일정에도 시사회를 보려고 한 건 '삼국지'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10번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의 팬은 결코 아니다. 같이 본 친구와 후배가 그렇듯 남자들은 '삼국지'에 열광하지만 나는 '삼국지'에 시큰둥하다. 사실 '삼국지'는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남자들의 권력 쟁취를 위한 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내용도 그렇고 그것을 너무나 긍정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남자들이 삼국지를 보며 '조자룡'이 세니, '관우'가 세니 , 전투에서 몇 번 이겼네, 하며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 문득 아이들이 게임 캐릭터에서 어떤 파이터가 제일 높은지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때문에 적벽대전을 봐야겠다고 벼른 이유는 첫째, 원작이 삼국지이니 만큼 스토리의 구멍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 둘째, 삼국지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전투인 '적벽대전'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겼을까하는 호기심. 셋째, 1편에서 낚였으니 2편에서는 뭐가 대단한 게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단 둘째 조건은 만족했다고 해야 겠다. 함선이 불에 타는 장면은 실로 '스펙타클'이다. 삼국지를 읽으며 머리 속에 떠올렸던 주유의 화공법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렬하게 스크린에 불을 지른다. 이 장면 만큼은 앉아서 보는 내가 더울 정도였으니까.
1편에서 "적벽대전은 언제 시작해?"라며 계속 묻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뭐야, 끝이야!"를 외쳤던 경험에 비춰볼 때 2편에서는 확실히 보여줬으니 셋째 조건 역시 만족했다.
그러나 뭔가 불편한 첫째 조건이 계속 걸린단 말이야. 우선 소설 삼국지의 내용과 달리 오우삼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 물론 적벽대전 자체의 긴장감과 지략과 전술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 공명이 10만 화살을 구하는 것,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 것 등의 팽팽한 심리전은 소설 못지 않다. 하지만 남자들의 의리와 객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오우삼 감독 특유의 취향 때문일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는 생각이다.
곳곳에 오우삼 영화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주유(양조위)가 홀로 검술을 연마하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 조조를 추적하는 막사안에서 흩날리는 천막, 주유와 조조와 조조의 장수가 소교를 인질로 두고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하는 장면의 긴장감, (사실 나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연출하는 긴장감), 상향과 숙재의 천진난만한 우정. 오우삼의 색채 때문일까, 전쟁신은 여느 사극의 그것과 달리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지나치게 남자들의 의리의 세계를 그리고자 한 시도 때문에 계략과 암투의 세계는 의리와 정의의 세계로 미화되어 더 불편해졌다. (삼국지의 남성주의세계도 불편하지만 그걸 미화하려고 덧칠한 건 더 불편하고 싫단 말야.) 주유는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군사들에 대한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완벽한 남자로 그려진 것으로도 모자라 피터지게 전쟁을 벌인 조조까지 너그럽게 놓아준다. 삼국지에 주유가 그런 인물로 그려졌었던가 갸우뚱해야 했다. (아무리 양조위라지만 이건 아니야.) 게다가 적벽대전의 유명한 지략 중의 하나인 황개의 고육지책이 빠진 것도 아쉽다. 나름 탄탄한 스토리라면 이 고육지책이 당연히 나오겠지했는데 이것 말고 너무 담을 것이 많았나보다.
그리고 정말 이해 안 될 캐릭터. 상향이 첩자로 조조의 진영에 침투했을 때 그녀를 '돼지'라고 부르며 친구로 대하던 '숙재'라는 사람. 결국은 전투에서 만난 상향을 반가워하다 활에 맞아 오우삼 영화 특유의 '으으~'를 외치며 상향의 '부르짖음'과 함께 죽게 되는데... 서사 구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상한 설정이다. 우정과 인류애를 담고 싶었던 걸까.
계략과 암투가 판을 치는 전투도 담고 싶고, 블록버스터만의 스펙타클도 담고 싶고, 남자들의 의리와 우정도 담고 싶고, 로맨스도 담고 싶고, 인물의 개성도 하나하나 담고 싶고, 너무 담고 싶은 게 많아 결국은 재료의 맛이 다 죽어버린 음식을 먹은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잖아도 남성주의 세계에 오우삼 특유의 남성중심 연출력이 더해져 더 불편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history라 남성중심적 사관으로 기록되었다지만 서양이든 동양이든 하나같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며 그나마 하는 역할이라고는 '미인계'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때론 화가 나게 한다. 그나마 쓰는 '미인계' 역시 여성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식이다. 물론 그 희생 역시 여성이 선택하는 것으로 미화되는 것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인가. 그리고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남자의 도움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또 어떻고.
그나마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상향은 정작 전투에서는 칼만 들고 돌아다닐 뿐 하는 것이 없다. 조조 진영의 군사인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다 화살 맞아 죽은 친구를 부여잡고 우는 것 뿐.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자 방향을 잡았다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그렇게 가는 편이 나았다. 어설프게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가 너무 어색하다. 여성 관객으로서는 참으로 웃기는 노릇으로 보일 수 밖에.
남자들이 오우삼 영화에 열광했던 것도 남성들이 꿈꾸는 일종의 판타지를 영화에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이 영화가 남성들의 취향은 충분히 만족시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 남자 관객들도 헛헛한 웃음을 지은 걸로 봐서는 오우삼식 남자 영화는 이제 남자들에게도 지난 취향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 역병에 걸린 환자들의 막사를 조조가 돌아보며 환자에게 다정하게 '말해봐라. 어디가 아프냐?'라고 다독이자 환자가 눈물 그렁한 채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겹쳐지는 장면: MB가 할머니를 껴 안고 다독였던 바로 그... 젠장.
- 영화에서 조조의 지략은 거세되고 여자에 눈이 멀고 생각이 짧은 찌질함만 남은 인물로 그려졌던 점도 아쉬움. 인물의 캐릭터가 전혀 살지 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