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리커버)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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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은 다양한 범주 안에 속한다. 때문에 그 누구도 절대 강자일 수도 절대 약자일 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인권 감수성 일깨우는 데 그만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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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의 말 - 평등을 향해 걸어온 대법관의 목소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헬레나 헌트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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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민하고 똑똑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여성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감동이다. 이 책에서는 밑줄 긋지 않을 부분이 하나도 없다. 구구절절 가슴에 새길 긴즈버그의 말들. 부디 천년만년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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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1-20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디 천년만년 사시길!!
 



어떤 영화는 온통 마음을 헤집어놓아 도무지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요즘 바쁜 일이 있어, 오늘 회사에 나왔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꾸역꾸역 하기는 하는데, 머릿속에는 어제 본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몇 번은 더 볼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처음 보면서 놓친 장면들이,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이 새록새록 다시 눈에 들어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기억되겠지.

내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어놓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들의 초상>-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 이 영화는 아주 널리 알려진, 그래서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는 이 신화를 스크린 위에 새롭게 되살린다. 어린 시절 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에 경도되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나 아닌 다른 이를 너무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지옥까지 찾아간 사람. 그러나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서,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고, 지상에 다다른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보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이제는 진실로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이 어리석은 인간 오르페우스! 조금만 참았다면 에우리디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내가 뒤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믿음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결국 그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이라고 격분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랑을 어리석은 인간, 상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인간의 비극적 말로를 보여주는 신화라고 기억해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하녀 ‘소피’처럼 “그가 돌아보지 말았어야죠!”하고 성난 얼굴로 분노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하녀 ‘소피’는 어떻게 보면 두 주인공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에 비해 어린 축에 속한다. 하녀 신분이기에 아무래도 배움 또한 짧을 것이다. 마치 지금보다는 더 어리고, 배움도 부족했던 내가 “돌아보지 말았어야지!”하고 화를 냈던 것과 비슷한 셈이다. 똑같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소피와 달리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는 ‘연인’의 사랑보다는 ‘시인’의 사랑을 한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를 이해하는 듯한 말을 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부른 것이라고 말을 했던가. 현실의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와도 같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자신들 앞에 영원한 이별이 놓일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오래된 신화를 여성과 여성의 사랑 속에서 새롭게 쓴다.

18세기에 여성 화가로서 그릴 수 있는 대상이 제한적이며, 그 출품작마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 이름으로 낼 수밖에 없던 마리안느는 귀족 집안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고 그녀가 유폐되어 있다시피 한 어느 섬으로 떠난다. 하녀 소피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엘로이즈의 언니는 얼마 전 자살을 했으며, 엘로이즈 또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수녀원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또 다른 수녀원과도 같은 ‘집’에 갇혀 있고, 결혼이라는 허울 좋은 감옥으로 유폐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마리안느가 그릴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결혼 상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중매용 사진’과도 같은 것이며, 그것을 아는 엘로이즈는 화가 앞에서 포즈 잡기를 거부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려던 예전 화가는 결국 짐을 싸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때문에 엘로이즈의 엄마는 마리안느에게 산책 친구처럼 가장하고, 몰래 엘로이즈를 관찰해서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때부터 마리안느는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도, 그녀의 결혼을 위해 초상화를 남몰래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숨긴 채 엘로이즈와 산책하면서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지켜볼수록 그녀의 남다름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보고’,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 영화의 시작 부분에 속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여성, 화가이면서도 정당하게 대우 받으며 활동할 수 없었던 여성, 임신과 낙태 등의 과정을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여성과 그런 그녀를 돕는 많은 여성, 계급과 신분 차이를 떠나 ‘동등’하게 서로를 대하는 여성들, 남성 화가와 그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서의 ‘뮤즈’라는 기존의 관념을 비틀며 매 장면마다 섬세하게 짜여진, 기막히게 놀라운 ‘여성 서사’를 완성해나간다.

직업적으로는 제한이 많지만 결혼을 선택할 수도 있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 비해 한층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는 처음에 엘로이즈를 곱게 자란 귀족 집안 딸 정도로만 생각했으리라. 자유를 갈망하기에 늘 이 답답한 현실에 성난 얼굴을 하고 있는 엘로이즈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켜보지만, 그래도 자기보다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온실 속 화초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붓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한낱 대상으로서의 ‘뮤즈’인 셈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마리안느의 착각인가. 엘로이즈는 얼마나 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수녀원에서 그 무엇보다 ‘평등의 안온함’을 느꼈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관찰하는 마리안느에게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되물으며 자신 또한 그저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누군가를 ‘평등하게 보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화가의 그림을 보며 매섭게 비평함으로써 화가를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마리안느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서로 진실로 아는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더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오르페우스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에우리디케와의 추억,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음이라는 마리안느의 해석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랑이 끝났을 때, 아니 사랑의 마음은 계속 타오르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때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와 관련된 추억을 돌아보고, 그것을 돌아봄으로써 계속 그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아마도 평생 자신들의 사랑을 돌아봄으로써 기억하고 간직하며 나날이 마음속에서 그 사랑의 역사를 다시 써 가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아마도 나는 한동안 비발디 음악에 빠져 살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기억함으로써 늘 새롭게 사랑하는 영화로 간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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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8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영화보고 싶어졌어요,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좋은 페이퍼 잔뜩 써두셨기에 열심히 읽다가 갑니다. 주말 근무 잘하시구, 내일은 푹 쉬세요~!

잠자냥 2020-01-18 12:32   좋아요 2 | URL
이 영화 꼭 보세요! 꼭 보셔야 합니다.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공쟝쟝 님의 하트 세례 기쁘게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coolcat329 2020-01-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고싶은데 상영하는곳이 근처에 딱 한 곳! 그것도 3일간 하루 1-2번 상영이니 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보도록 할게요.

잠자냥 2020-01-19 15:43   좋아요 2 | URL
네 상영관 선택 폭이 좁은데, 입소문 타고 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꼭 보세요~
 
[전자책] 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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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상태를 벗어나면서 이른바 정상이 아니라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는 이야기. 스티븐 킹이 썼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인 줄 모르고 읽었을 것 같다. 출근길 전철에서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눈물을 닦느라 혼났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 소멸의 과정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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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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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즈음, 푸시킨의 시를 처음 접하고 그때 이후로 나는 그를 시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이 구절은 어릴 때부터 잘도 외우고는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인용하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이 구절은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와 다투거나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해서 마음 상한 친구의 마음을 다독여줄 때 특히 유용했다. 열대여섯 살 딱 그 정도 나이에서는 ‘삶이 그대를 속이’는 일들이 대부분 그런 일들이었다.

살아갈수록, 그리하여 이 나이에 이르러 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구절에 깃든 진실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임을 깨닫고 푸시킨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진실의 깊이를 어느 정도 헤아릴 즈음 나는, 푸시킨을 소설가로서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래 전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읽고 얼마나 푸시킨앓이를 했던가. 다만 그 책은, 너무나 오래전에 번역한 책이었는지, 푸시킨 작품이 지닌 명성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번역본이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읽는 내내 푸시킨은 시인인데, 이렇게 투박한 문장을 썼을 리가 없어! 자꾸만 의심했다. 그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인데, 독자 리뷰를 읽어 보면 나만 번역에 불만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태에서 이 《눈보라》의 등장은, 《벨킨 이야기》를 이미 읽었음에도 틀림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푸시킨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표제작인 <눈보라>부터 다시 읽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이 어긋난 사랑에 안타까워하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그 폭설을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다시 읽은 <눈보라>는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보다는 다른 어떤 것, 인생의 불가해함, 그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마음이 서늘해져온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마리야’는 가난한 장교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지고 부모의 반대에도 그와 사랑의 도피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의 도피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데, 축복을 위해 내리는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치는 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 거린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진다. 마리야와 블라디미르 두 사람의 발길을 붙잡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른다. 결국 둘은 함께 떠나지 못하고 삶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간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절망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하며 앓아눕기도 하지만,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이 그 아픔도 흐려지면서 살아나간다. 인생이 그러하므로. 그리고 마리야 앞에 새로운 사람인 ‘부르민’이 나타나고 삶이 그러하듯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마리야는 부르민과는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눈보라’로 잃어버린 블라디미르 대신, 이번에는 진짜 자기 사람을 맞이하게 될까?

살다 보면 ‘눈보라’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날 무렵에는 그 계획 가운데 뜻대로 이룬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한 해 한 해가 쌓여 인생을 이룬다. 그러기에 늘그막에 다다른 많은 이들이 체념의 정서를 안고 ‘삶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눈보라’가 없었다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을 이루었을까? 지금보다 어릴 때 나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보라’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들의 사랑은 어느 순간 폭설로 무너지는 집처럼 주저앉고 말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눈에 반하고 불장난하듯이 서로에게 빠지는 대부분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듯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의 사랑은 그다지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의 도피에 성공해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언제고 그들 인생에서 또 다른 ‘눈보라’가 불어 닥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마리야가 다시 만난 부르민과도 마찬가지 이리라. 이처럼 푸시킨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눈보라’ 같은 사건을 통해 삶의 불가해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인생의 수많은 ‘눈보라’들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이 일으키는 것임을 통찰한다.

이런 푸시킨의 시선은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작품들, <한 발의 총성>,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한 발의 총성>에서는 ‘따귀 한 대’가 눈보라이다. 그전까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실비오’는 따귀 한 대를 맞고서 인생이 뒤틀린다. 평생 복수를 꿈꾸며 세월을 헛되이 쓰며 음울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 따귀 한 대는 그 자신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있던 실비오 앞에 나타난 부유한 명문 귀족. 그는 젊음, 총기, 잘생긴 얼굴, 유쾌함, 유명세, 돈 등등 모든 것을 갖춘 진정한 행운아였고, 그의 등장으로 실비오의 일등 자리는 흔들린다. 그 질투와 열등감이 결국 ‘따귀 한 대’를 불러오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니 실비오에게 그 따귀 한 대는 마리야와 블라디미르를 갈라놓은 눈보라와도 같다.

<장의사>의 ‘아드리얀’도 자신의 가벼운, 그러나 악의가 잔뜩 담긴 심술궂은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 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현실화되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아드리얀’은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농담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역참지기>에서는 귀족 장교 민스키의 등장과 함께 ‘눈보라’가 일어난다. 역참지기는 예배 보러 가는 딸 두냐에게 “겁낼 게 뭐가 있니? 나리님이 늑대도 아니고 널 잡아먹기야 하겠니, 예배당까지 타고 가거라” 말하며 민스키와 딸이 함께 가도록 종용한다. 불안한 듯 망설이던 두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집을 나선다. 그런데 역참지기는 자신의 이 짧은 생각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는 예상치 못한다. 결국 일은 벌어지고, 이 가엾은 역참지기는 ‘자기가 어쩌자고 두냐를 경기병과 함께 타고 가게 했는지, 어쩌다 눈이 멀어 사람도 제대로 못 알아봤는지’ 한탄하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물론 삶에 일어나는 온갖 ‘눈보라’가 늘 불행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유쾌한 로맨스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눈보라’와 같은 사건은 ‘겁 많은 꼬리 잘린 암말’, 정확히는 사냥터에 갑자기 나타난 ‘토끼 한 마리’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반목하던 ‘이바노비치’와 ‘베레스토프’ 두 집안은 화해하게 되지 않는가.

‘삶이 그대를 속이는’,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해한, 뜻밖의 일들은 이렇게 인생 곳곳에서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그러나 그 면면을 잘 들여다보면 자연이 일으킨 재난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인간 그 자신에게서 ‘눈보라’가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비오’에게는 그 자신의 질투와 열등감이 눈보라를 일으킨 것이며, 역참지기는 손님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딸 두냐를 앞세워(정확히는 딸의 미모와 여성성을 이용해)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민스키 같은 사람 앞에 두냐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 것이다. 만일 손님들이 제아무리 불만을 터뜨리더라도 그때마다 두냐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앞서 말했듯이 <장의사>의 ‘아드리얀’은 그 자신의 심술궂음, 악의적인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의 ‘눈보라’는 스스로 불러일으켰음이 더 뚜렷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눈보라’들은 처음에는 삶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지만 그 끝에는 어떤 의미로든 깨달음을 얻거나 긍정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불행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비오는 도덕적인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그 자신의 깨달음으로 인해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며, 늘 죽음을 다루면서도 삶을 성찰할 줄 몰랐던 장의사 아드리얀은 이제 진정으로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역참지기의 딸 ‘두냐’의 인생도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눈보라>에는 하나 같이 크고 작은 뜻밖의 일로 인생이 그 전과 크게 달라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난한 이도, 부유한 이도 ‘삶의 눈보라’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대부분 그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또한 그에게 달려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은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도 유효하다. 푸시킨의 위대함은 이 짧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영롱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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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5 1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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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1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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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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