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온통 마음을 헤집어놓아 도무지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요즘 바쁜 일이 있어, 오늘 회사에 나왔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꾸역꾸역 하기는 하는데, 머릿속에는 어제 본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몇 번은 더 볼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처음 보면서 놓친 장면들이,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이 새록새록 다시 눈에 들어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기억되겠지.

내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어놓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들의 초상>-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 이 영화는 아주 널리 알려진, 그래서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는 이 신화를 스크린 위에 새롭게 되살린다. 어린 시절 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에 경도되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나 아닌 다른 이를 너무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지옥까지 찾아간 사람. 그러나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서,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고, 지상에 다다른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보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이제는 진실로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이 어리석은 인간 오르페우스! 조금만 참았다면 에우리디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내가 뒤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믿음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결국 그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이라고 격분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랑을 어리석은 인간, 상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인간의 비극적 말로를 보여주는 신화라고 기억해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하녀 ‘소피’처럼 “그가 돌아보지 말았어야죠!”하고 성난 얼굴로 분노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하녀 ‘소피’는 어떻게 보면 두 주인공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에 비해 어린 축에 속한다. 하녀 신분이기에 아무래도 배움 또한 짧을 것이다. 마치 지금보다는 더 어리고, 배움도 부족했던 내가 “돌아보지 말았어야지!”하고 화를 냈던 것과 비슷한 셈이다. 똑같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소피와 달리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는 ‘연인’의 사랑보다는 ‘시인’의 사랑을 한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를 이해하는 듯한 말을 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부른 것이라고 말을 했던가. 현실의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와도 같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자신들 앞에 영원한 이별이 놓일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오래된 신화를 여성과 여성의 사랑 속에서 새롭게 쓴다.

18세기에 여성 화가로서 그릴 수 있는 대상이 제한적이며, 그 출품작마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 이름으로 낼 수밖에 없던 마리안느는 귀족 집안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고 그녀가 유폐되어 있다시피 한 어느 섬으로 떠난다. 하녀 소피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엘로이즈의 언니는 얼마 전 자살을 했으며, 엘로이즈 또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수녀원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또 다른 수녀원과도 같은 ‘집’에 갇혀 있고, 결혼이라는 허울 좋은 감옥으로 유폐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마리안느가 그릴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결혼 상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중매용 사진’과도 같은 것이며, 그것을 아는 엘로이즈는 화가 앞에서 포즈 잡기를 거부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려던 예전 화가는 결국 짐을 싸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때문에 엘로이즈의 엄마는 마리안느에게 산책 친구처럼 가장하고, 몰래 엘로이즈를 관찰해서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때부터 마리안느는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도, 그녀의 결혼을 위해 초상화를 남몰래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숨긴 채 엘로이즈와 산책하면서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지켜볼수록 그녀의 남다름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보고’,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 영화의 시작 부분에 속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여성, 화가이면서도 정당하게 대우 받으며 활동할 수 없었던 여성, 임신과 낙태 등의 과정을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여성과 그런 그녀를 돕는 많은 여성, 계급과 신분 차이를 떠나 ‘동등’하게 서로를 대하는 여성들, 남성 화가와 그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서의 ‘뮤즈’라는 기존의 관념을 비틀며 매 장면마다 섬세하게 짜여진, 기막히게 놀라운 ‘여성 서사’를 완성해나간다.

직업적으로는 제한이 많지만 결혼을 선택할 수도 있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 비해 한층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는 처음에 엘로이즈를 곱게 자란 귀족 집안 딸 정도로만 생각했으리라. 자유를 갈망하기에 늘 이 답답한 현실에 성난 얼굴을 하고 있는 엘로이즈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켜보지만, 그래도 자기보다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온실 속 화초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붓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한낱 대상으로서의 ‘뮤즈’인 셈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마리안느의 착각인가. 엘로이즈는 얼마나 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수녀원에서 그 무엇보다 ‘평등의 안온함’을 느꼈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관찰하는 마리안느에게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되물으며 자신 또한 그저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누군가를 ‘평등하게 보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화가의 그림을 보며 매섭게 비평함으로써 화가를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마리안느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서로 진실로 아는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더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오르페우스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에우리디케와의 추억,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음이라는 마리안느의 해석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랑이 끝났을 때, 아니 사랑의 마음은 계속 타오르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때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와 관련된 추억을 돌아보고, 그것을 돌아봄으로써 계속 그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아마도 평생 자신들의 사랑을 돌아봄으로써 기억하고 간직하며 나날이 마음속에서 그 사랑의 역사를 다시 써 가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아마도 나는 한동안 비발디 음악에 빠져 살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기억함으로써 늘 새롭게 사랑하는 영화로 간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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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1-18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영화보고 싶어졌어요,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좋은 페이퍼 잔뜩 써두셨기에 열심히 읽다가 갑니다. 주말 근무 잘하시구, 내일은 푹 쉬세요~!

잠자냥 2020-01-18 12:32   좋아요 2 | URL
이 영화 꼭 보세요! 꼭 보셔야 합니다.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공쟝쟝 님의 하트 세례 기쁘게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coolcat329 2020-01-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고싶은데 상영하는곳이 근처에 딱 한 곳! 그것도 3일간 하루 1-2번 상영이니 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보도록 할게요.

잠자냥 2020-01-19 15:43   좋아요 2 | URL
네 상영관 선택 폭이 좁은데, 입소문 타고 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