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방랑자들><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난 후, 이 작가는 참 독특한 글쓰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이번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으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다음에는 어떤 소재와 주제, 어떤 독특한 형식으로 작품을 내놓을까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스릴러, 그것도 추리 소설형식을 띠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살인이 잇달아 일어난다. 어떤 죽음은 영문조차 알 수 없지만, 또 어떤 죽음은 유혈이 낭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공통점을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살해당한 이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과연 범인은 누구인지 추적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살인도 여러 차례이고, 범인도 쉽게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나간다. 매 장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것도 독특한데, 단지 블레이크의 시로 문을 여는 것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들이 즐겨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다. 그중에는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도 있다.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제는 폴란드 외딴 고원에서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육십대 여성 두셰이코 야니나와 그의 옛 제자 디오니시오스가 블레이크의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다.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도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 아니 작가는 하필이면 왜 윌리엄 블레이크 시를 계속 읊조리는 것일까? 더욱이 이 책 안에는 여러 개의 삽화가 들어있다. 뭔가 투박한 느낌이 판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판화 느낌이 나는 그림을 삽입한 까닭도 알고 보니 윌리엄 블레이크와 관련이 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봤을 때는 크게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전통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뛰어난 탐정이나 수사관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살해당한 이들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데다가 주인공 노년 여성은 점성학에 빠져서 무슨 말만 하면 별자리 운운, 점성학을 들이대며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동물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사람이라, 동물과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장 연설을 종종 늘어놓는데, 그이의 장광설을 듣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추리 소설 읽는 게 아니었던가? 때때로 잠시 현타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재미는, 알고 보니 텍스트 밖에 있었다. 애초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를 내가 잘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한결 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자면 블레이크는 시인이자 급진적인 사상가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판화를 연상시키는 이 책 속 간결한 그림체는 결국 생계를 위해 판각사로 일했던 윌리엄 블레이크,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시를 동판화에 새기던 그의 삶과 겹치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한 각 장 도입부에 인용된 블레이크의 시도 결국은 두셰이코, 디오니시오스 등 이 작품의 소외된 이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작품에서 내내 윌리엄 블레이크를 불러온 까닭은 바로 그 반 문명, 생태주의적인 가치관을 이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으리라.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권려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게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39~340)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를 비롯해 이웃인 괴짜’, 중고 옷가게 점원 기쁜 소식등 두셰이코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모두 사회 주변부 인물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쓸모 있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눈으로 보자면 낙오자라고 낙인이 찍히고도 남을 이들이다. 그에 비해 살해당한 자들은 저마다 사회에서 모두 한자리씩 차지한 기득권층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옹호되고 정당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회의 주요 가치관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이상한,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두셰이코처럼 가진 것도 없고, 이제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노년 여성이 주장하는 말이라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실은 지금 누구나가 귀 기울여 마땅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히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관례라는 이름 아래,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장려되어 온 기존의 가치관들이 사회를, 자연과 동물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고, 더 나아가 그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성장과 반 성장, 문명과 반 문명, 인간과 자연(동물을 포함한)의 대결 구도를 통해 지금 세계가 나아가는 길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계속 그렇게 해도 온당한지 질문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

 

첫 번째로 살해당한 왕발은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꾼이다. 그는 목에 사슴 뼈가 걸려 질식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두셰이코는 동물들이 사냥꾼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인간을 향한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이의 이런 주장은 정신 나간 과격한 동물보호가가 지껄이는 헛소리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쩐지 정말 동물들이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기후 변화로 인해 동물들이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일 수도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복수를 시작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달리 보자면 동물, 자연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런 주장이 결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낯선 전개만큼이나 작품의 결말 또한 조금 충격적이다. 이렇게 끝나면 안될 것 같은, 어쩐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불편한 느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지구의 기득권층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래서 지구 자체가 정의롭지못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작품의 이런 결말은 차라리 온당한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죽은 목숨도 여럿 있고 범죄의 진상도 낱낱이 밝혀지지만 왠지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여전히 남는 느낌. 아마 그런 질문들을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세계에,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룬디 뭉카제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처음 만나는 부룬디 커피. 첫 인상이 좋다. 깊고 진한데 끝맛은 아주 깔끔하다. 약하지만 입속에 오래 머무는 감귤향도 산뜻. 첫눈 오는 날 창 밖을 보면서 마시면 딱 좋을 그런 커피.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11-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마셔보고 싶어요!
어제 여동생은 마셔보고 산미랑 고소함이 느껴지고 커피 거품도 짱이라고 하던데, 저는.. 월급날까지 참았다 사려고요. 후훗.
가난한 영혼입니다..

잠자냥 2020-11-03 10:24   좋아요 0 | URL
부룬디 커피는 처음이라 저도 설레며 사봤어요. 커피 거품은 역시 짱입니다. ㅎㅎ
가난한 영혼이지만 책 살 때만큼은 알부자인 다락방 님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3 10:37   좋아요 0 | URL
저 요즘 밀가루 살 때 재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3 10:43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요즘 다락방 님이 밀가루업계 살려먹이고 계시짘ㅋㅋㅋㅋㅋㅋㅋ 치아바타 여왕님 ㅋㅋㅋ

coolcat329 2020-11-0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는 이상하게 끌리네요...

잠자냥 2020-11-05 14:37   좋아요 0 | URL
드셔보셨어요? 맛도 향도 괜찮아요~~

coolcat329 2020-11-0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뇨. 구입하려구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짜 색다른 스릴러. 스릴러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전혀 스릴러 같지 않다, 그런데 스릴러이긴 한 매우 독특한 작품. 자연과 인간,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소외된 이들의 연대를 노래하고 있다. 아주 재미있지는 않은데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누군가는 써야했을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소리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1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헉! 이번 권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 매번 일어나는 살인 사건보다, 그 사건이 더 충격적이었다. 해미시, 진정한 홀로서기의 시작인가.... 마지막 반전(?)은 독자라면 누구나 예상 가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작품만으로도 모든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뉴잉글랜드 수녀>를 쓴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이 그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영미 여성 작가 단편모음집인《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올해 처음 읽었다. 그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작품 이야기는 이미 한 차례 리뷰에서 쓴 적이 있어서 이곳에서 또 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일상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 대신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고 홀로 꿋꿋하게 살아갈 인생을 스스로 택한, ‘루이자’라는 캐릭터는 좀처럼 잊기 어렵다. 그 작품에 반해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을 알라딘에서 검색해봤는데, 몇몇 책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대부분 여러 작가와 함께 실린 단편 모음집이 전부이다. 그러던 참에 이렇게 그만의 단편을 모은 《엄마의 반란》이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엄마의 반란>은 제목 그대로 엄마의 ‘반란’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보 저 사람들이 뜰을 왜 파는 거예요?” 어느 농가에서 일꾼들이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중이다. 중년 여인 ‘사라’는 남편에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왜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집 뜰을 파는지 남편에게 여러 차례 묻지만, 남편은 뚱한 표정만 지을 뿐 별 대답이 없다. 남편처럼 무뚝뚝한 아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겨우 진상을 알 수 있다. 남편은 ‘또’ 창고를 만들고 있다. 사라와 딸 ‘내니’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사는 집은 다 낡아서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집을 다시 짓거나 수리하기는커녕, 가축우리를 새로 만들거나 창고 짓는 일에만 골몰한다. 곧 결혼을 앞둔 딸은 엄마보다 더 불만인 것 같다. 이런 집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도 없고, 손님을 초대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하는 딸에게 사라는 불평하지 말라며 그 시절 엄마들이 할 만한 잔소리만 늘어놓는다.


“우리 여자들이 그저 아이나 받아내는 사람들이란 걸 모르니? 남자들을 볼 만큼 봤잖니. 요새 하는 짓 봐, 남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그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하지. 날씨를 신의 섭리로 여기고 불평하지 않듯 우린 남자들이 하는 짓에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해.”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조지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내니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곧 울 것처럼 입술을 씰룩댔다.
“두고 봐라, 조지 이스트만이라고 다를 성싶니? 아무튼 아버지를 판단하려 하면 안 돼. 뭐 어쩌게니,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온걸. 그리고 결국 우리도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잖니.” (《엄마의 반란》, 13쪽)


사라는 못을 박듯이 한 번 더 딸을 다그친다. “불평하지 마. 나도 여태 불평 한 번 안 해봤어.” 이런 상황만 봤을 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옛 시절 이야기이려니 싶어진다. 남편에게 깍듯이 존대하는 부인, 그에 비해 아내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자기 멋대로 집안일 결정을 하면서 대꾸도 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똑 닮아서 벌써 싹수가 노란 아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있으니 찍소리 말고 살라고 이야기하는 순종적이고 답답한 엄마, 그런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신랑감인 ‘조지’는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왠지 불안한 딸……. 이런 가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체 이런 집구석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까 기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프리먼이 이야기를 그렇게 쓸 리가 없다. 제목 또한 ‘엄마의 반란’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사라는 이대로 참을 수 없다. 서서히 ‘반란’을 꾀하기 시작한다. 딸에게는 아버지를 판단하지 말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라는 듯 말했으나, 사라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성싶다. 일단 남편을 붙들고 이야기해 보기 시작한다. 물론 남편은 사라가 뭐라고 말하든 예의 그 무시하는 듯한, 너는 떠들어라 난 내 갈길 가련다, 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이 남자를 지켜보노라면 등짝을 한 대 갈겨주고 싶어진다. 그래도 사라가 참지 않고 할 말은 하니까 조금 속이 풀린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당신은 굳게 약속했죠. 그해가 끝나기 전에 새 집을 지어주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 당신은 계속 돈을 벌고 있고,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저축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창고를 짓고, 우사와 새 헛간을 짓더니 이제 또 창고를 하나 더 짓는다고요? 여보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 혈육보다 가축들한테 집 지어주는 게 더 중요한가요?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요?” (《엄마의 반란》, 20쪽)


이렇게 소리쳐도 못들은 척 하는 남편이니, 극약 처방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사라는 드디어 뭔가를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자신이 없어질까 봐 생각나는 대로 문구를 하나 만들어서 마음에 되새기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27쪽). 그리고 사라는 ‘반란’에 성공한다. 조용한 마을에서 일상을 훌쩍 벗어난 이 일은 마을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여자들은 서로의 집에 들러 이 일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다. 모두가 일손을 멈춘 채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사라를 평하느라 바쁘다. 어떤 사람은 사라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규칙을 무시하고 반항만 일삼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헐뜯는다. 마을 목사까지 사라를 찾아와 충고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라에게 한방 먹고 터덜터덜 돌아선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통쾌하다. 사라의 반란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엄마의 반란》에 실린 네 작품은 거의 이렇게 일상의 작은 ‘반란’을 통해 주인공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쟁취하거나 마침내 이룬다. 그리고 대부분은 엄마인 ‘사라’를 제외하고는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갈라 드레스>의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두 중년 자매, <뉴잉글랜드 수녀>의 ‘루이자’, <빗나간 선행>의 두 노파 ‘샬럿’과 ‘해리엇’ 등 모두가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또는 둘이 살아가며 그 삶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가난하고, 늙고 쇠약해져서 겨우 삶을 유지해 나가더라도 자신들만의 공간과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홀로 잔잔하고 평화로운 하늘 아래 부드럽게 펼쳐진 새로운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길은 너무 곧고 한결 같아서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으며 ‘또한 너무 좁아서 옆에 누군가와 함께 걸을 공간이 없’(<뉴잉글랜드 수녀>, 80쪽)는 그런 삶이다. 그러한 삶이 연인, 또는 이웃 등 타인들로 인해 파괴되는 일을 그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안온한 일상이 파괴될 것 같으면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채 당당히 홀로 맞서 자기 삶을 지킨다(<뉴잉글랜드 수녀>). 또 누군가의 선행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단연코 그 선행을 거부하고 자기 삶을 지키고자 나약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용기를 발휘하거나(<빗나간 선행>), 나름의 재치를 발휘해 품위를 지켜나가고, 뜻하지 않은 선물이 주어져 삶이 조금 여유로워졌을 때는 그것을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여성에게 베푸는 아량을 보이기도 한다(<갈라 드레스>). <갈라 드레스>는 여성간의 연대도 엿보이는데,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자매의 배려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마틸다’는 그때야 비로소 에밀리 자매의 궁색한 살림살이를 탐색하는 대신 그들이 일군 꽃밭으로 눈길이 가게 되고, ‘나스타치움의 달콤한 향내’까지 느끼게 된다.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그들만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샬럿과 해리엇 두 자매는 그들 주위 온 둘레가 ‘빛 천지’임을 느낀다. 조금 힘겨울지라도 누군가의 아내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평온’과 ‘평안’을 지키는 이 여성들의 꿋꿋한 모습은 아주 인상 깊게 다가온다.


루이자 앨리스가 자기만의 권리를 팔아버렸거나 자기가 누리는 유일한 만족이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됐다면, 지금도 그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평온과 평안은 이제 그 자체로 루이자의 특권이 되어 있었다. 루이자는 하루하루가 묵주 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고 흠 없고 순수하게 오랫동안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루이자는 세속과 격리되지는 않았으나 수녀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며 기도하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뉴잉글랜드 수녀>, 96~97쪽)



요즘, 비혼 여성 숫자가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에서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혼자 사는 여성을 바라보는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기 참 어렵다. 루이자, 샬럿, 해리엇, 에밀리와 엘리자베스는 무려 100여 년 전 여성들이다. 그 시절 이렇게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 프리먼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썼을까. 그녀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그 시절 여성답게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그 시대 여느 여성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홀로 외롭더라도, 힘에 겨운 순간이 오더라도, 때로 주변 시선에 주눅이 들더라도,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프리먼은 어머니가 요구하는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평생 어머니의 방식에 저항했다고 한다. 그 시대의 ‘좋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니, 얼마나 멋진 여성인가. 《엄마의 반란》에는 그런 프리먼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작품 4편만으로는 부족하다. 현대문학단편선처럼 두꺼운 책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멘토모리 2020-10-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10-28 22:16   좋아요 0 | URL
넵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