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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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가족에게 화목함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 지어지는 것이기에 나는 내 인연에 순응하려고 노력했지요. 내가 절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38쪽)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살인자다. 그것도 한 번의 살인이 아니라 여러 번 살인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죽인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이 작품은 이 살인자의 수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뒤에 ‘가족’이 붙는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도 그렇고 작품 제목에서 유추해 보면 대충 어떤 내용일지 감이 오기도 한다.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때문은 아닐까?

이런 추측은 맞다.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가족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상적인 폭력과 폭언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파스쿠알에게 폭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에게도 구타와 폭언을 매일같이 퍼부었다. 그렇다고 그의 어머니가 온전한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다. 그녀 역시 아들인 파스쿠알을 언제나 괴롭히고 학대한다.

오로지 파스쿠알이 기댈 수 있는 가족의 일원 중 하나는 두 동생뿐이다. 예쁜 여동생과 아주 어린 막내 남동생. 그러나 그렇게 귀여워하던 막내 동생마저 사고로 죽어버리고 여동생은 지옥과도 같은 집을 탈출해 일찌감치 밖에서 떠돌아다닌다. 이렇게 마음 붙일 곳도 없고 일상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처음으로 우발적인 싸움 끝에 동료를 칼로 찌르게 된다. 물론 그 동료는 다행스럽게도 죽지는 않는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는 등. 한때는 정말 행복한 시간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내는 바람이 나고, 아이도 죽고, 파스쿠알의 어머니는 아내의 외도를 거의 방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파스쿠알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 계속 뒤따른다. 이런 불행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점점 ‘피’에 집착하게 된다. 동물을 죽이기도 하고, 아내와 바람이 난 대상을 죽이기도 하고 등등.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참 신기했던 것은 사람을 찌르고, 죽였던 그가 그다지 길게 감옥살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스쿠알은 자신을 오래 감옥에서 가둬뒀더라면 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살인을 한 그가 모범수로 3년 정도 살고 다시 사회로 나오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그 사이 그는 또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감옥에 가고 그러나 또 나오게 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었는데 작가는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는 사회에서 결국 인간처럼 나약한 존재는 더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사랑의 공간’이 아닌 ‘끔찍한  증오의 공간’에서 자라난 파스쿠알이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나쁜 환경때문에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란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카밀로 호세 셀라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스페인 내전을 겪은 후란다. 스페인은 지옥 같은 폭력에 시달린 뒤였고,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가족이 확대되면 국가가 된다. 국가에서 일상적인 폭력을 경험했고 그 폭력이 사회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치부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 파스쿠알이 자기 어머니를 죽여버린 것처럼 작가는 국민 개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내전의 상흔을 남겨 준 국가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돈키호테>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스페인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인 카밀로 호세 셀라는 1989년 스페인 소설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스페인 소설을 읽었는데 분위기나 문체 등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우울한 내용이기도 했고, 폭력적이어서 그 뒤끝이 좀 찜찜하다. 리뷰는 남겼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읽어보라고 권하기는 뭐한 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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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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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학교, 가족, 친구, 일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저 한 사람. 술과 담배, 책, 글쓰며 숨어 있을 작은공간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자했던 안티히어로 치나스키의 웃기고도 슬픈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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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지만지 희곡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태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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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난동.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혹하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그 복수는 또다시 더 큰 복수와 비극을 낳는다. 화해와 용서 없이 오로지 복수뿐이라 찜찜함만 남는다. 만일 이 작품이 정말 셰익스피어가 쓴 초기작이라면 그의 4대 비극은 이 작품과 비교해 놀라울 만큼 일취월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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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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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정서는 쓸쓸하고 고독하고 슬프다. 작품을 읽는 내내 여기저기서 울컥울컥 무엇인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눈물일 수도 있고, 가슴 속에서 북받치는 알 수 없는 뜨거움일 수도 있다. 내가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잘 울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잘 우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읽는 동안도, 읽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간다.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대부분이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 또한 상당히 종교적이다. 신과 인간의 구원,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작품 내내 등장한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한다면 딱히 대답할 수가 없다. 열렬하게 믿지도, 그렇다고 아예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런 나에게 이 작품은 신의 존재 혹은 본질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을 믿지 않는,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니,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감동적일까 이런 생각도 든다. 물론 유일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반감이 들 수도 있겠다.

아내를 잃은 이소베. 그는 아내가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환생해서 당신 앞에 나타나겠다.’는 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환생’을 쫓다 결국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대학시절 신을 열렬히 믿는 바보 같은 남자 ‘오쓰’를 갖고 놀았던 여자,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은 그저 공허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 못해 오히려 그런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여자 미쓰코도 ‘오쓰’가 인도의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동물과의 대화가 사람과의 대화보다 더 편한 동화작가 누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던 기구치 등등 각자 괴로운 삶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이들이 인도 갠지스 강에 모인다. 그 여행길에서 신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각자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답을,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다. 특히 ‘오쓰’-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았던 그.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61쪽) 라며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을까. ‘신’ 소리가 듣기 싫다는 미쓰코에게 그렇다면 신을 다른 이름 예를 들어 ‘양파’라고 부르자는 오쓰의 ‘양파’ 이론은 책을 읽는 내내 깊은 감동을 준다.

누구나 상처입고 괴롭고 다급해지면 자기만의 신을 찾는다. 그 신에게 매달리며 구원받고 혹은 어떤 해결점이 찾아지기를 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신이 들고 나면 신의 존재를 잊고 살고, 부정한다. 종교의 차이로 만들어진 인간의 전쟁, 갈등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신을 탓한다. 그들이 믿는 신 때문에,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한다. 신이 금지한 것도 아닌데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온갖 억압적인 금기를 만들어내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쉽게 통치하려 든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버리도록, 그 선함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만들어간다. 종교가 잘못한 것인가? 신이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인간이 잘못한 것인가? 그런 인간에게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177쪽)

기독교적 색채를 지닌 작품인데 왜 하필 배경은 힌두교의 ‘인도’일까 싶었다. 한없이 영적인 존재로 인도를 그리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러나 작가는 담담하게 인도, 갠지스 강을 묘사한다. 관광 안내원의 입장을 빌어 뭔가 영적인 것을 찾아 벌떼처럼 찾아드는 일본인 및 서구인에게 뜨끔한 일격도 가한다.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카스트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는 인도임에도 갠지스 강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나름의 구원을 얻는다. 강은 그저 깊이 흐르며 그 모든 인간을, 인간의 삶과 죽음과 고통과 번뇌를 포용한다.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94쪽)라는 오쓰의 말처럼 신이 곧 갠지스 강, 그 깊은 강과 같은 존재가 아닐지.

신, 죽음, 삶, 구원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하니 얼핏 지루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무척 흥미롭게 잘 읽힌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라는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졌다. ‘신’보다도 어쩌면 더 위대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당신한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 사람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92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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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아래 욕망 열린책들 세계문학 171
유진 오닐 지음, 손동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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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희곡 <느릅나무 아래 욕망 : Desire Under the Elms>은 꽤 짧은 분량인데 마치 영화를 보듯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원초적인 ‘욕망’ 때문에 파멸해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이 작품 역시 한 가족의 이야기다.


탐욕스럽고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한 아버지 ‘캐벗’과 그의 세 아들 ‘시미언’, ‘피터’, ‘에벤’, 그리고 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하는 한 여자 ‘애비’- 이렇게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극은 흘러간다. 주인공은 캐벗의 셋째 아들인 ‘에벤’이라고 볼 수 있다. 에벤에게 있어 시미언과 피터는 이복형이다. 캐벗이 두 번째 결혼을 통해 낳은 아들인 에벗은 자신의 어머니를 캐벗이 학대하다 죽였고 원래 어머니 소유였던 농장마저 아버지가 빼앗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언제든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의 농장을 되찾을 꿈만 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벗’은 세 번째 부인이라며 ‘애비’를 데리고 나타난다. 캐벗보다는 오히려 에벤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애비’는 전형적인 팜므파탈형 여인으로 에벤이 다시 되찾고자 하는 ‘농장’에 대한 탐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캐벗이 죽으면 ‘이 농장은 내 것’이 될 거라며 에벤을 마음껏 조롱한다. 농장을 둘러싼 캐벗과 에벤, 시미언과 피터, 그리고 애비의 욕망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 욕망의 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줄거리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계속 책장을 넘기다보면 좀 충격적인 전개로 흘러간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도 느껴지고 애비와 에벤의 관계에서는 ‘페드라’도 느껴진다. 영화 <Desire Under the Elms>는 소피아 로렌과 앤서니 퍼킨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던데, 앤서니 퍼킨스는 공교롭게도 영화 <페드라>에서도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인물이다(아주 오래 전에 <페드라>를 보면서 앤서니 퍼킨스는 고뇌하는 미남형이라 느꼈는데 거의 비슷한 역을 맡았다. 아마도 이 배우 얼굴이 좀 이런 역에 어울리는 얼굴인지도).


이 작품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와 비슷하지만 욕망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와 조금은 더 충격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비극적이면서도 슬프고 강렬하면서 아름답다. 혹시라도 이 작품을 이 책으로 읽을 사람이 있다면 책 뒤표지는 읽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작품의 모든 줄거리가 나와 있다. 물론 이 리뷰도 이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겠지만…. 그래도 낱낱이 밝히지는 않았다....

작품을 다 읽고 유진 오닐 연보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유진 오닐의 딸이 18세의 어린 나이로 찰리 채플린과 결혼을 하자(당시 채플린의 나이는 54세로 유진 오닐보다 고작 한 살 어렸다고 한다), 유진 오닐은 그의 딸 우나와 평생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가족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살았던 그가 결국 자신의 딸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준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가족’이란 존재는 결국 존재 자체가 ‘상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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