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정서는 쓸쓸하고 고독하고 슬프다.
작품을 읽는 내내 여기저기서 울컥울컥 무엇인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눈물일 수도 있고, 가슴 속에서 북받치는 알 수 없는
뜨거움일 수도 있다. 내가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잘 울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잘 우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읽는
동안도, 읽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간다.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대부분이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 또한 상당히 종교적이다. 신과 인간의 구원,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작품 내내 등장한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한다면 딱히 대답할 수가 없다. 열렬하게 믿지도, 그렇다고 아예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런 나에게 이 작품은 신의 존재 혹은 본질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을 믿지 않는,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니,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감동적일까 이런 생각도 든다. 물론
유일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반감이 들 수도 있겠다.
아내를 잃은 이소베. 그는 아내가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환생해서 당신 앞에 나타나겠다.’는 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환생’을 쫓다 결국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대학시절
신을 열렬히 믿는 바보 같은 남자 ‘오쓰’를 갖고 놀았던 여자,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은 그저 공허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 못해 오히려 그런 세계를 파괴하고 싶은 여자 미쓰코도 ‘오쓰’가 인도의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동물과의 대화가 사람과의 대화보다 더 편한 동화작가 누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던 기구치 등등 각자
괴로운 삶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이들이 인도 갠지스 강에 모인다. 그 여행길에서 신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각자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답을,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다. 특히 ‘오쓰’-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았던 그.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61쪽) 라며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을까. ‘신’ 소리가 듣기 싫다는 미쓰코에게 그렇다면 신을 다른 이름 예를 들어 ‘양파’라고 부르자는 오쓰의 ‘양파’
이론은 책을 읽는 내내 깊은 감동을 준다.
누구나 상처입고 괴롭고 다급해지면 자기만의 신을 찾는다. 그 신에게
매달리며 구원받고 혹은 어떤 해결점이 찾아지기를 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신이 들고 나면 신의 존재를 잊고 살고, 부정한다. 종교의 차이로 만들어진 인간의 전쟁, 갈등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신을 탓한다. 그들이 믿는 신 때문에,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한다. 신이 금지한 것도
아닌데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온갖 억압적인 금기를 만들어내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쉽게 통치하려 든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버리도록, 그 선함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만들어간다. 종교가 잘못한 것인가? 신이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인간이 잘못한 것인가? 그런 인간에게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177쪽)
기독교적 색채를 지닌 작품인데 왜 하필 배경은 힌두교의 ‘인도’일까 싶었다. 한없이 영적인 존재로 인도를 그리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러나 작가는 담담하게 인도, 갠지스 강을 묘사한다. 관광 안내원의 입장을 빌어 뭔가 영적인 것을 찾아 벌떼처럼
찾아드는 일본인 및 서구인에게 뜨끔한 일격도 가한다.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카스트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는
인도임에도 갠지스 강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나름의 구원을 얻는다. 강은 그저 깊이 흐르며
그 모든 인간을, 인간의 삶과 죽음과 고통과 번뇌를 포용한다.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94쪽)라는 오쓰의 말처럼 신이 곧 갠지스 강, 그 깊은 강과 같은 존재가 아닐지.
신,
죽음, 삶, 구원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하니 얼핏 지루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무척 흥미롭게 잘 읽힌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라는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졌다. ‘신’보다도 어쩌면 더 위대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당신한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 사람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92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