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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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덥다, 소리도 더울 만큼 덥다. 이토록 무더운 여름날엔 오싹오싹 공포물도 좋지만, 나처럼 공포물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추리물이 어떨까?


누구나 한번쯤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때가 있을 듯하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를 마칠 그 무렵까지가 최고였다. 그때는 아마 날마다 추리소설(만) 미친 듯이 읽어댔다. 너무나도 유명한 코난 도일의 소설은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 애드거 앨런 포, 앨러리 퀸, 모리스 르블랑…. 그들이 만들어낸 홈즈, 포와로, 뒤팽, 뤼팽 등의 ‘탐정’에 흠뻑 빠졌다.
 
추리소설에 대한 열광은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까지 이어졌다. ‘추리형식’을 갖춘 영화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봤다. 물론 이런 기호는 훗날 내가 ‘필름 느와르’를 좋아하게 된 데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필름 느와르’는 여전히 좋아하는 장르인데 언제부터인가 ‘추리소설’은 읽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저 ‘재미’만을 추구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고, 웬만한 유명한 ‘추리소설은 다 읽었다’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게 되면서 살짝 다시 ‘추리소설’에 애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존 르 카레의 작품은 장르적으로 추리소설, 미스터리 문학에 속하지만 읽다 보면 흔히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그의 소설은 좀 지루하다 여겨질 정도인데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중요한 사건과 이야기’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비해 존 르 카레 소설에서는 중심 이야기와 크게 상관없을 듯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문장의 흐름도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소설 읽기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지루한 소설’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문체나 묘사, 작품 속 세계관 등에서 ‘문학적’으로 뛰어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또한 그렇다. 장장 600여 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중심 사건과 탐정 ‘필립 말로’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만 추려본다면 절반 이상은 잘라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잘라내도 될 것 같은' 그 절반이 이 책이 여타의 추리소설과 ‘다른 위치’를 점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사람이라면 레이먼드 챈들러나,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이름을 종종 접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공공연히 이들 작가를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챈들러의 책을 읽고 나니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왜 ‘그는 나의 영웅이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간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서 뻗어나갔고, 고독한 분위기, 모든 사건이나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건조하면서도 한없이 쓸쓸하고 서정적인 문체 등등 챈들러의 소설이 없었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 어떤 것을 먼저 읽을까 하다가 주저 없이 <기나긴 이별 : The Long Good Bye (1954)>을 선택했는데, 이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어딘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정서가 이 책을 지배한다. 조금 마초 같기는 하지만 탐정 ‘필립 말로’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부패와 범죄가 난무하는 쓸쓸하고 냉소적인 대도시- 그곳에서 ‘정의’에 대한 열망을 겉으로는 ‘냉소주의’로 애써 감추고 묵묵히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필립 말로- 그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 그가 사람과 사물, 도시를 보는 시선 하나하나에서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특히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탐정’들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필립 말로는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챈들러는 자신의 글 쓰는 재능을 살리고 생활비도 벌 목적으로 싸구려 통속 소설인 펄프 픽션(pulp fiction)을 쓰기로 결심,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챈들러의 시작은 ‘펄프 픽션’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챈들러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죠. (기나긴 이별, p.545)’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기나긴 이별, p.601)’ 이런 문장을 쓰는 싸구려 통속소설 작가가 세상에 그리 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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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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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금하다. ‘삶이란 행복한 것 같아요? 행복하기 보다는 슬픈 것 같아요?’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은 어떻게 대답할까? 돈이 많고 건강하고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이런 것들을 다 가진 사람이라면 사는 게 행복할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라면 사는 게 늘 불행할까? 사람의 평생을 80년이라고 가정한다면 80년 내내 행복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주 어릴 적에 ‘새옹지마’라는 고사 성어를 알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사람 사는 건 좋을 때도 있지만 결국엔 나쁠 때도 늘 뒤따라오는 것 같다고…. 그러니 지금 아무리 좋거나 행복하다 한들 언젠간 그 행복도 조금씩 사그라질 것이고 불행하다 한들 다시 행복의 기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굳이 삶을 행복과 슬픔, 두 가지 중 하나로 정의하라 한다면 난 그런 것 같다.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슬픈 가운데 가끔 행복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니까 삶은 슬프다(하지만 죽음이 꼭 슬픔인가? 하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의미로 죽음을 '해방'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어가는 과정이 모두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봐야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삶은 슬프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사람도 ‘지금’ 결국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그 죽어가는 길 사이사이에 행복과 웃음이 찾아온다. 흐린 날이 있지만 반짝반짝 해가 비치는 날도 있는 것처럼. 삶은 그래서 그런 순간을 되도록 많이 간직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아닐까. 그래서 죽음이 임박한 순간 자기 삶을 되돌아 볼 때 햇빛이 비치던 때가 더 많았다고 기억한다면 그 삶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늘 그렇게 빛나는 때를 찾는 것도 어렵다. 하루 24시간 일년 열 두 달 환하게 빛나기만 한다면 그 빛의 소중함도 모를 뿐,더러 너무 눈부셔 그늘로 도망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평온한 삶이란 기본적으로는 슬프지만 찬 이슬 보다는 따뜻한 온기가 베어 나오는 쪽에 몸과 마음을 두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싶다. 내게는 체호프의 작품이 딱 그런 느낌이다. 체호프의 단편을 읽다 보면 ‘삶이란 사실 무척 슬픈 거란다. 살기 힘들지? 힘든 게 당연한 거야. 산다는 건 정말 고달픈 일이거든. 하지만 늘 그렇게 힘들기만 한 건 아니야. 가끔 좋은 일도 생기지. 그렇다고 그 좋은 일만 목이 빠져라 기다릴 수는 없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찾아와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지나갈 때도 많거든. 그러니까 그저 담담한 상태로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거야. 그래야지 불행이 찾아왔을 때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행복이 찾아왔다가 사라질 때도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는 이 작품 외에 ‘굽은 거울’ ‘어느 관리의 죽음’ ‘마스크’ ‘애수’ ‘하찮은 것’ 등 17편 정도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맨 끝에 실려 있는데 나는 이 작품부터 읽었다. 예전에 본 영화 <더 리더>에서 마이클이 한나에게 이 작품을 읽어주는데 한나가 무척 좋아한 기억이 나서 먼저 읽어보고 싶어졌다. 읽고 나니 한나가 왜 그렇게 이 작품을 좋아했는지, 왜 이 작품에 몰입했는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답고 슬프고 애잔한 작품이었다.

바닷가 휴양지에서 구로프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점차 그 여인에게 빠져 휴양지에서 하룻밤 정도 상대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부인 ‘안나’와 그런 사이가 된다. 구로프도 그렇지만 안나 역시 결혼한 사람이다. 휴양지에서의 하룻밤 정도로 생각한 사이였는데 현실로 돌아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둘 모두 깨닫는다. 환상, 꿈 혹은 신기루처럼 여겨졌던 휴양지에서의 생활이 현실 생활의 그것보다 더 값어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은 비밀스러운 둘만의 생활을 계속 위태롭게 유지한다. 남들이 보는 진짜 삶은 따로 있지만 구로프와 안나에게는 둘이 은밀히 만나는 작은 호텔방이, 그 호텔방에서의 짧은 시간이 진짜 삶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구로프도 안나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둘의 만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 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 미친 듯한 카드놀이, 폭식, 폭음, 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 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 실없는 농담뿐이다. 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고 외치던 구로프의 삶이 안나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은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삶은 둘만 알 뿐이고 그 둘 모두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자신들의 진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구로프는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구로프 자신의 진짜 삶은 호텔 방 안에 깊숙하게 숨겨둔 채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진짜 삶 또한 언제 어떻게 부서질지 모른다. 그런 불안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남들보다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없는 농담 같았던 시시했던 그의 인생에 안나라는 볕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점은 안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진짜 삶을 지켜가기 위한 안나와 구로프의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눈물겹기도 하다. 그늘진 방에 슬며시 들어온 햇볕을 붙잡아 두기 위한 노력…. 현실은 무겁고 고단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비록 인생은 슬프고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따뜻한 쪽에 몸을 많이 두고 있으면 행복하다 여길만한 그런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체호프의 작품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우울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지만 묘하게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돈을 벌고자 한때는 농담처럼 가벼운 단편을 써댔던 체호프. 슬플 때도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있음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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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8-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 소설집이라고는 단 두 권 읽어 본 게 다인데 (김애경씨 것과 레이먼드 카버 것) 두 작품 다 전체적으로 너무 우울해서 유명하다는 단편 소설집은 다 우울하고 나랑 안 맞는군 하며 단 두 권으로 밑도 끝도 없는 결론을 내렸는데 체호프 좋군요. 잠자냥님께서 묘하게도 절망하거나 낙심되지 않는다고 하시니 조만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잠자냥 2016-08-03 14:27   좋아요 1 | URL
저는 단편을 좋아해서 단편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요. ㅎㅎ 현대 단편 작가들 가운데 체호프에게 빚지지 않은 작가들은 없을 것 같네요. ㅎ 우울한 작품을 쓰는 작가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모두 말입니다. 체호프 작품 중에도 우울하고 슬픈 것도 많지만 유머러스한 작품도 분명 있답니다. 그나저나 레이먼드 카버는 정말 너무 우울하잖아요? ㅋㅋ
 
또 고양이 - 사계절 게으르게 행복하게
미스캣 지음, 허유영 옮김 / 학고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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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도 귀엽고 글도 따뜻하고 귀엽다. 보는 내내 우리 냥이들 행동이 떠올라서 마구 웃음 짓게 된다. 고양이 좋아하는 이들에겐 고양이처럼 딱 힐링되는 책이다.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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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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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때리고 밟고 하는 물리적 폭력,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 등등 파괴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폭력은 언제나 늘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시위’는 미디어에서 항상 ‘나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눈에 보이는 폭력(지젝은 이를 ‘주관적 폭력’이라고 말한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란 무엇일까?

지젝이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 symbolic violence)’은 달리말하자면 ‘구조적(systemic violence)’인 폭력이다. 구조적인 폭력이란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주관적인(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폭력 시위, 혹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 등등. 이렇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구조적인 폭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구조적 폭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이들의 ‘위선’에 속거나 현혹되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은 그런 인물들로 빌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등의 예를 든다(구글, 이베이, 인텔, 아이비엠 등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선을 베풀면 그들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는 듯이 엄청난 기부를 하며 사회적 책임, 인도적 책임을 강조한다. 지젝은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라며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모든 행위가 ‘거대한 기만’ 이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이런 구조적 폭력이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임을 지적하며 그들을(혹은 그런 시스템을) 바로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으로 간주한다. 원제가 <Violence : Six Sideways Reflections> 인 이 책은 1장에서 이렇게 폭력의 의미를 살펴 본 후 이어 폭력의 원인, 언어와 폭력,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테러리즘 등의 문제를 살펴본다. 물론 이 안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가 갖는 폭력성에 대한 성찰도 담겨있다. 주된 내용은 사람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공포(폭력적 타자)를 이용해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비판과 이런 폭력적인 세계를 과연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젝이 내놓은 해결책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외’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는 말을 인용한 지젝은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에 동의한다. ‘때로는 어느 정도의 소외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며 ‘가끔은 소외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때도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꽤 수긍이 간다.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간섭이 오히려 역사상 언제나 큰 문제를 일으켜오지 않았는가?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가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참여와 행동이 허락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젝은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작동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고 이 민주주의 안에서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듯한 착각(그러나 가짜 ‘자유’)를 심어주는 것이 오늘날 지배 계급이 원하는 것이다. 지젝은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라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지젝은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며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주장한 의견에 동의를 표한다.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주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로 처음 만났다. 그의 저작 중에는 가장 쉽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던 그 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지젝의 온갖 현란한 사고의 결과물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은 오래 전에 읽은 터라  내용의 99%이상은 잊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지젝은 정말 똑똑하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 정도랄까. 그러나 그의 저작은 집중해서 읽다보면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탄성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힘이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또한 읽기 어렵다는 지젝의 저작치고는 그래도 쉽게 읽히는 편이고 번역도 괜찮다(원문과 비교를 할 수준은 못되지만 국내에 번역된 지젝 저작이 기본 문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음에 비한다면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힘들지는 않다). 또한 지젝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문학, 영화, 회화, 음악 등 여러 대중매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흥미로운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적 = 폭력 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런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눈을 돌려야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정치적인 문제가 모두 문화적인 현상으로 희석된다면서(대표적인 예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 정치적 투쟁을 ‘관용’의 문제로 돌리는 적들의 이데올로기에도 현혹되면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꼭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지젝이 내놓은 제안 중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바로 그 민주주의가 승자독식 시스템을 공고화하고 지배계급의 배만 불리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그 시스템을 돕는 일을 계속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이 폭력적인 시스템이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일에 동조하기를 멈춘다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온한(?) (그러나 실현 가능성 제로인) 상상을 조금 해본다.

‘모든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지젝이 말했듯 ‘계급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라는 존재와 폭력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종속적이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기에 그의 말처럼 ‘이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국가에 저항하는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것이 되지 않겠는가. 아랍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적’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의 문제는 결국 지젝의 말처럼 ‘언제나 전략적 고려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쪽)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149쪽)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151쪽)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왜 해방이나 정치적 투쟁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장투쟁도 아니라 관용이라는 게 해결책으로 제안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화 되면서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들)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가 중화되어 ‘문화적’ 차이, 즉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차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199쪽 -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결정하라는 요청을 받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것을 강제당하는 역설적인 순간에 처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조국을, 혹은 부모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런 역설, 즉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이 의무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데 마치 있는 것처럼 외양을 유지하는 역설은,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제안)라는 텅 빈 상징적 제스처와 그 개념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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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클레르 카스티용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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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큰일이나 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그 관계로 인해 성가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딱히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어 ‘감정 소모’에 진이 빠지게 되면 사랑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면? 잠시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묘하게도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타적인가? 사랑은 관대한가? 사랑은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성질의 것인가? 사랑의 모습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지지만 어쩌면 사랑이란 애초에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에 반대로 그렇게 꾸며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처럼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도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자식이 이렇게 해주길 바라고, 자신의 기대에 차길 바라고, 노후의 보험처럼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많다. 나는, 내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참 순진하군요.’ 말해주고 싶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순수한 사랑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짝사랑도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 짝사랑은 이미 대상을 욕망하면서 발생한다. 욕망은 이기적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에게로 와서 내 것이 되어주길 고대한다. 내 사랑의 부름에, 내 마음의 욕망에 그 또는 그녀가 화답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고백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렇다. 그 사람의 작은 친절에 감동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보통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걸 발견하는 순간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에는 파문이 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진 만큼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화가 난다. 단지 그걸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데도 짝사랑은 이타적이며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인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제는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의 크기와 똑같지 않아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 내 마음은 작은데 상대방의 마음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거나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데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거나, 애당초 크기가 작았는데 마지못해 관계를 시작했다거나 등등. 사람은 내가 준 것만큼 내가 준 크기만큼 받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은 너도 나를 꼭 사랑해야 해.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약속들.

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라 사랑이 그렇게 변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마음이 매혹에 이끌려 움직이는 상태라고 본다면 결국 사랑이란 사람 마음속에 존재할 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랑을 사람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이 23편의 단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단편 속에 드러나는 사랑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이다 못해 사악하고 비열하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려고 안달일까?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를 속이고 펼쳐지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 아들과 섹스 하는 엄마 등 근친상간은 아무 일도 아니며 행복한 부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람난 남편, 바람난 부인, 남편을 갖다 버리고 싶어서 안달 난 여자, 부인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형제의 치부와 상처를 이용하는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의 삐걱거림이 ‘이제 그만!’하고 외치고 싶어질 정도로 펼쳐진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를 실물로 보면 알 수 있듯 책의 두께는 무척 얇다. 200페이지 남짓한 크기. 그런데 담겨 있는 이야기는 23편이다. 그만큼 짧고 간결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걱서걱하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사랑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노통브의 작품을 읽으면 느껴지는 기분처럼 클레르 카스티용 또한 인간에 대한 모든 ‘선한’ 기대는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작가들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이런 작품을 쓰는 걸까 사생활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궁금해서 찾아봤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와는 달리 가치 전복적이며 도발적인 작품을 쓰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글을 쓰는 작가’라는 호칭이 있다고 하니, 노통브와는 달리 외모가 좀 특출(?)난 듯하다. 1975년 프랑스 불로뉴 비앙쿠르 생. 열여덟 살 때 광장공포증에 걸려 길고 지난한 정신과치료를 받던 중, 스물다섯에 첫 소설 <다락방>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음. 그 후 거의 매해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노통브처럼 소설은 엄청나게 써대고 있는가 보다. ‘광장공포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 받았다는 사실에 살짝 호감 증가. 그러나 사진을 찾아보니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는 좀 무리인 듯 싶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었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극악무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서도 책의 제목이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라니 이럴 수가 있나? 뭔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려니 하고 낚이는 사람들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사랑을 하면 발생하는 감정소모를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왜? 외로우니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백치처럼 구는 날이면 나는 그에게 묻는다. 아무 문제없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그러면 그는 ‘괜춘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비타민을 먹여보려고도 했다. 그의 사고 체계가 약간이나마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인상을 쓰며 완강하게 도리질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대신 먹고 있다. 나는 내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요구르트를 별로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스물네 개짜리 묶음보다 두 개짜리 묶음을 구입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흥분해 날뛰는 남자와 같이 살면서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뭔가에, 가령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음악은 그에게 수면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서정적인 것들은 괜히 사람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며 그는 투덜댄다. (‘한없는 관용’ p.47~48)


위 구절을 읽는데 정말 너무 너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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