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소리도 더울 만큼 덥다. 이토록 무더운 여름날엔 오싹오싹 공포물도 좋지만, 나처럼 공포물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추리물이 어떨까?
누구나 한번쯤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때가 있을 듯하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를 마칠 그
무렵까지가 최고였다. 그때는 아마 날마다 추리소설(만) 미친 듯이 읽어댔다. 너무나도 유명한 코난 도일의 소설은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 애드거 앨런 포, 앨러리 퀸, 모리스 르블랑…. 그들이 만들어낸 홈즈, 포와로, 뒤팽, 뤼팽 등의 ‘탐정’에 흠뻑
빠졌다.
추리소설에 대한 열광은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까지 이어졌다. ‘추리형식’을 갖춘
영화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봤다. 물론 이런 기호는 훗날 내가 ‘필름 느와르’를 좋아하게 된 데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필름 느와르’는 여전히 좋아하는 장르인데 언제부터인가 ‘추리소설’은 읽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저 ‘재미’만을 추구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고, 웬만한 유명한 ‘추리소설은 다 읽었다’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게 되면서 살짝 다시 ‘추리소설’에 애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존 르
카레의 작품은 장르적으로 추리소설, 미스터리 문학에 속하지만 읽다 보면 흔히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그의 소설은 좀 지루하다 여겨질 정도인데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중요한 사건과 이야기’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비해 존 르 카레 소설에서는 중심 이야기와 크게 상관없을 듯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문장의 흐름도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소설 읽기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지루한 소설’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문체나 묘사, 작품 속
세계관 등에서 ‘문학적’으로 뛰어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또한 그렇다. 장장
600여 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중심 사건과 탐정 ‘필립 말로’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만 추려본다면 절반 이상은 잘라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잘라내도 될 것 같은' 그 절반이 이 책이 여타의 추리소설과 ‘다른 위치’를 점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사람이라면 레이먼드 챈들러나,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이름을 종종 접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공공연히 이들 작가를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챈들러의 책을
읽고 나니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왜 ‘그는 나의 영웅이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간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서 뻗어나갔고, 고독한 분위기, 모든 사건이나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건조하면서도 한없이 쓸쓸하고
서정적인 문체 등등 챈들러의 소설이 없었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 어떤 것을 먼저 읽을까 하다가 주저 없이 <기나긴 이별 : The Long Good Bye (1954)>을
선택했는데, 이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어딘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정서가 이 책을 지배한다. 조금 마초 같기는 하지만 탐정 ‘필립 말로’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부패와 범죄가 난무하는
쓸쓸하고 냉소적인 대도시- 그곳에서 ‘정의’에 대한 열망을 겉으로는 ‘냉소주의’로 애써 감추고 묵묵히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필립 말로- 그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 그가 사람과 사물, 도시를 보는 시선 하나하나에서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특히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탐정’들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필립 말로는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챈들러는 자신의 글
쓰는 재능을 살리고 생활비도 벌 목적으로 싸구려 통속 소설인 펄프 픽션(pulp fiction)을 쓰기로 결심,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챈들러의 시작은 ‘펄프 픽션’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챈들러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죠. (기나긴 이별, p.545)’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기나긴 이별, p.601)’ 이런 문장을 쓰는 싸구려 통속소설 작가가 세상에 그리
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