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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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때리고 밟고 하는 물리적 폭력,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 등등 파괴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폭력은 언제나 늘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시위’는 미디어에서 항상 ‘나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눈에 보이는 폭력(지젝은 이를 ‘주관적 폭력’이라고 말한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란 무엇일까?

지젝이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 symbolic violence)’은 달리말하자면 ‘구조적(systemic violence)’인 폭력이다. 구조적인 폭력이란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주관적인(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폭력 시위, 혹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 등등. 이렇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구조적인 폭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구조적 폭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이들의 ‘위선’에 속거나 현혹되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은 그런 인물들로 빌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등의 예를 든다(구글, 이베이, 인텔, 아이비엠 등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선을 베풀면 그들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는 듯이 엄청난 기부를 하며 사회적 책임, 인도적 책임을 강조한다. 지젝은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라며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모든 행위가 ‘거대한 기만’ 이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이런 구조적 폭력이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임을 지적하며 그들을(혹은 그런 시스템을) 바로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으로 간주한다. 원제가 <Violence : Six Sideways Reflections> 인 이 책은 1장에서 이렇게 폭력의 의미를 살펴 본 후 이어 폭력의 원인, 언어와 폭력,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테러리즘 등의 문제를 살펴본다. 물론 이 안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가 갖는 폭력성에 대한 성찰도 담겨있다. 주된 내용은 사람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공포(폭력적 타자)를 이용해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비판과 이런 폭력적인 세계를 과연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젝이 내놓은 해결책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외’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는 말을 인용한 지젝은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에 동의한다. ‘때로는 어느 정도의 소외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며 ‘가끔은 소외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 될 때도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꽤 수긍이 간다.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간섭이 오히려 역사상 언제나 큰 문제를 일으켜오지 않았는가?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가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참여와 행동이 허락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젝은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작동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고 이 민주주의 안에서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듯한 착각(그러나 가짜 ‘자유’)를 심어주는 것이 오늘날 지배 계급이 원하는 것이다. 지젝은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라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지젝은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며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주장한 의견에 동의를 표한다.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주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로 처음 만났다. 그의 저작 중에는 가장 쉽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던 그 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지젝의 온갖 현란한 사고의 결과물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은 오래 전에 읽은 터라  내용의 99%이상은 잊어버렸다.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지젝은 정말 똑똑하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 정도랄까. 그러나 그의 저작은 집중해서 읽다보면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탄성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힘이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또한 읽기 어렵다는 지젝의 저작치고는 그래도 쉽게 읽히는 편이고 번역도 괜찮다(원문과 비교를 할 수준은 못되지만 국내에 번역된 지젝 저작이 기본 문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음에 비한다면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힘들지는 않다). 또한 지젝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문학, 영화, 회화, 음악 등 여러 대중매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흥미로운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적 = 폭력 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런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눈을 돌려야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정치적인 문제가 모두 문화적인 현상으로 희석된다면서(대표적인 예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 정치적 투쟁을 ‘관용’의 문제로 돌리는 적들의 이데올로기에도 현혹되면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꼭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지젝이 내놓은 제안 중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바로 그 민주주의가 승자독식 시스템을 공고화하고 지배계급의 배만 불리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그 시스템을 돕는 일을 계속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이 폭력적인 시스템이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일에 동조하기를 멈춘다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온한(?) (그러나 실현 가능성 제로인) 상상을 조금 해본다.

‘모든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지젝이 말했듯 ‘계급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라는 존재와 폭력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종속적이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기에 그의 말처럼 ‘이와 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국가에 저항하는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것이 되지 않겠는가. 아랍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적’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의 문제는 결국 지젝의 말처럼 ‘언제나 전략적 고려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쪽)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149쪽)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151쪽)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왜 해방이나 정치적 투쟁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장투쟁도 아니라 관용이라는 게 해결책으로 제안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화 되면서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들)는 본래의 정치적 의미가 중화되어 ‘문화적’ 차이, 즉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차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199쪽 -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결정하라는 요청을 받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것을 강제당하는 역설적인 순간에 처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조국을, 혹은 부모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런 역설, 즉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것이 의무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데 마치 있는 것처럼 외양을 유지하는 역설은,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제안)라는 텅 빈 상징적 제스처와 그 개념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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