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출판사 북플을 친구로 추가해 신간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 본다. 최근 눈에 띈 책 두 권이 있었다. 헤밍웨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과 나카지마 아쓰시 <산월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둘 중 뭘 먼저 사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헤밍웨이 단편집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은 작품도 꽤 있어서 나카지마 아쓰시의 <산월기>를 골랐다. 처음엔 좀 반신반의
했다. 사보고 후회하는 거 아닐까 싶은….
이 책을 소개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일본 교과서에 실린 국민 소설
<산월기>’ ‘중국 고전에서 제재를 가져다가 작품을 빚어내 제2의 아쿠타가와로 불리는 나카지마 아쓰시’ 사실, 일본
교과서에 줄곧 수록되었다는 말은 내 기준에 그리 큰 칭찬은 아니었다. 교과서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이랄까. 교과서에 실릴 만큼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그런 내용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왔다니 더 그런 혐의가 짙었다. 권선징악적
주제에 도덕적 교훈적인 그런 소설이 아닐까. 그럼 너무 뻔한데, 재미없는데 하는 생각.
‘제2의 아쿠타가와’라는
수식어 또한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아쿠타가와 작품 중 중국 고전에서 제재를 빌려와 쓴 작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와
상관없이 담담히 써내려간 <귤> 같은 작품이 훨씬 좋다. 아쿠타가와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라쇼몽>도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동명의 영화가 훨씬 훌륭하다. 가끔 원작을 뛰어넘는 빼어난 영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몽>이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일본 교과서에 실린 작품’ ‘제2의 아쿠타가와’라는
소개는 아무런 장점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럼에도 이 책을 사게 된 이유는, 내가 여태껏 읽어본 적 없는
일본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워낙 잘 쓴 단편을 좋아하다보니, 아직까지 단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사실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아들고 첫 작품으로 실린 <산월기>를 읽었는데, 읽는
순간 내공이 느껴졌다. 어? 장난 아닌데 싶은 기분이랄까. 이 단편이 일본 교과서에 60년 가까이 실렸다는 문제의(?) 작품인데,
굉장히 짧다. 그런데 강렬하다!
당나라 고전 <인호전>에서 소재를 가져온 <산월기>는
시인으로 후세까지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남자 ‘이징’의 뒤틀린 자존심과 수치심이 마침내 그를 호랑이로 만들고 만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남과는 다르다고, 속세의 범인들을 깔보며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이렇다 할 노력도 하지 않으며 그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탓하는 어리석고도 비뚤어진 남자.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 나부터도 그렇고 인간은 누구나
이런 면이 있지 않을까. 호랑이가 된 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듯하지만 ‘이징’은 여전히 다시 인간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호랑이가 되어서도 버려두고 온 처자식보다도 자기의 시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로써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거나 기꺼이 시우와 어울리며 절차탁마를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나는 속물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는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세상에서 벗어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번민과 수치와 분노로써 내
속의 소심한 자존심을 더욱 살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그 맹수는 바로 각자의 성정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에는 거만한 수치심이 맹수였다. 호랑이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해치고 처자를 괴롭히며 친구를 상처주고, 결국에는 내 외모를
이렇게 속마음과 어울리게 바꾸어버렸다. <산월기>, 16~17쪽
<산월기>
못지않게 인상 깊었던 작품은 마찬가지로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와 쓴 <제자>이다. 이 작품은 공자와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로’의 이야기인데 무척 아름답다. 나는 이 작품 때문에 <논어>를 이제는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했고, ‘자로’라는 인물에 궁금증이 일어나, 그의 삶을 다룬 책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람다운 사람, 양심이나 순수함,
신의 등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공자와 수제자 자로의 관계는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성찰해보게
된다. 읽다가 어느 순간 좀 눈물이 나기도 했다. 아마 요즘 이런 사람, 이런 인간 관계를 좀처럼 만나기 어렵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공자와 자로가 주고받는 말들 가운데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자로가 지금까지 만난 인간의 훌륭함은 어느 것도 모두 그 이용 가치 안에 있었다. 이것이나 저것에 도움이 되므로 훌륭하다는 것에 불과했다. 공자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단지 그곳에 공자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제자>, 83쪽
그렇다면 선을 행한다는 것의 보답은 결국 선을 행했다고 하는 만족 이외에는 없는 것인가. <제자>, 97쪽
<시경>에 말하길, 백성 속에 부정이 만연되었을 때는 나서서 법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제자>, 113쪽
이
두 작품뿐만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온 나머지 작품들도 단순히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할 수 없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다. 인간의 복잡함, 그 복잡함에서 비롯되는 인생의 굴곡,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의 모습이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 번뜩이며 그 빛을 발휘한다. ‘제2의 아쿠타가와’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1920년에 용산중학교 한문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경성으로 건너와 조선에서 사춘기를
보낸다. 그 시절을 경험으로 쓴 작품들도 썩 훌륭하다. <범 사냥>과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가 특히 인상 깊다. <범 사냥>은 전학생인 ‘나’가 조선인 ‘조대환’과 가까워지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조대환'과 다른 일본 학생들과의 관계, '조대환'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부분 '나'와 '조대환'이 대환의 아버지를 따라 범 사냥에 나서는 장면이다. 사냥터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며
느끼는 흥분, 설렘, 두려움 또는 공포가 빼어나게 그려진다. 더욱이 그저 범 사냥을 지켜보는 소년의 시선에서 그쳤을 법도 한데, 그
순간에도 인간의 모순이나 위선을 발견한다. 일본인 상급생에게 괴롭힘 당하던 조선인 조대환은 “강한 게 뭐고 약한 게 뭐란
말이야. 응? 정말로.” 이렇게 ‘나’에게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 사냥터에서 '나'는 '조대환'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양반집 자제인 조대환은 사냥터에서 하층민 몰이꾼을 발로 툭툭 차며 함부로 대한다. 강자에게 핍박당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가,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또 다른 약자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모두 얼어버리겠지 등을 생각하며 수면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문득 그가 아까 한 말을 떠올리고 그 숨겨진
의미를 발견한 듯하여 깜짝 놀랐다. ‘강한 게 뭐고 약한 게 도대체 뭐지?’라는 조의 말은, 하고 나는 그때 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단지 현재 그 한 개인의 경우에 관한 감개만은 아니지 않은가. <범 사냥>, 210쪽
<순사가
있는 풍경>에서도 이렇게 모순적인 인간은 등장한다. 식민지 치하 조선인 순사 ‘조교영’이 그런 인물이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모습, 조선인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는 한편 일본 신사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고는
우쭐해진다. 그런 인간의 모순과 나약함 이중성을 짧은 스케치 같은 단편 속에서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내가 반한
점은 식민지 조선 풍경을 묘사한 방식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1920년대 식민지 치하 어둡고 불결하고 암담한,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선의 어느 후미진 골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포석
위에는 얼어버린 고양이 사체가 굴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 위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붉은색 단밤 가게 광고지가 갈가리 찢기며
날아갔다. 길모퉁이에 있는 대여섯 개의 포장마차에서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지저분한 두루마기 밖으로 검붉고 단단한
유방을 드러낸 여자가 그 앞에 서서 뜨거운 김을 불어대며 고춧가루를 빨갛게 뿌린 우동을 먹고 있다. <순사가 있는 풍경>, 233쪽
춥다기보다는
아팠다. 몸 안의 심장 외에는 모두 동사해버린 느낌이었다. 길가에는 버려진 생선의 붉은 아가미가 흐트러져 있고, 응달에 쌓인 눈
위에는 비릿한 돼지 머리가 물어뜯긴 채 흩어져 있었다. 집 안의 사람들은 도랑에서 올라오는 가스 같은, 부추와 마늘로 썩은
공기를 쇠약한 폐로 호흡하며 간신히 살아갔다. <순사가 있는 풍경>, 247쪽
나카지마
아쓰시는 33세의 나이로 일찍 죽어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도 작가 연보를 보면 일본에서는 그의 전집이 전
3권으로 출판된 것 같다. 더 많은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아쉬운 대로 <산월기>를 몇 번쯤 다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