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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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국내에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은 무수히 많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도 이러저러한 출판사마다 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피츠제럴드에 무심했다. 첫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이 작품에 대한 명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좀처럼 동의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개츠비라는 인물에도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로맨스 소설 정도로 평가했다. 다시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츠제럴드를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솔깃해졌다.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였던 이유는 번역이 이상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버렸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번역이 이상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김영하 번역본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피츠제럴드 작품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김영하는 고딩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 작품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딩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졸라 재미없다’ 등등 그때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변호를 맡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까지 나온 대부분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에서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가 서로 존대를 하는 등 한국말의 위계질서 때문에 그 젊은이들의 심정에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무척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실제로 내가 읽은 문학동네 세계문학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는 서로 반말을 한다. 20대의 그들답다. 닉, 개츠비,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인 톰 등 각 캐릭터의 개성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과 개츠비, 데이지 인물들을 저마다 이해하기도 훨씬 쉬웠다. 예전에는 이 인물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는데 이번에 읽은 김영하 번역본으로는 아, 이럴 때 그 또는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진다. 외면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을 살려준 옮긴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점에서 개츠비를 욕했던 그런 고딩 중 하나였을 내가 다시 피츠제럴드를 읽고 싶어졌으니 김영하의 ‘변호’는 조금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위대한 개츠비>는 무척 낭만적이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 슬픔과 쓸쓸함은 이 작품이 한때 전부였으나 어느덧 잃어버린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 자신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이미 조각나 버린 꿈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 보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온다.
 
개츠비가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 세계, ‘데이지’로 상징되는 그 세계는 정말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던 것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이런 바보 같은 녀석, ‘바보 같은 개츠비’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 보라고, 자네가 그렇게 평생을 건 그 여자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도무지 아닌 사람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런 존재다. 선망하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뜨겁게 사랑한 첫사랑이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놓아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으리라. 그렇기에 성공하면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이지만 데이지에게 개츠비는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의 존재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 관계는 비극적이다. 평생 데이지만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데이지 또한 그러리라 믿고 싶었겠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도 사랑했고, 그렇다고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는 평생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을 간직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를 그토록 오랜 세월 간직하고 지켜 나가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 세계 때문에 허상 같은 삶을 살다간 그이기에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자신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장례식에 오지도 않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간 아주 바보 같은 놈.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는 안쓰럽고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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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3-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잘 지내시죠. 여전히 리뷰 꾸준히 올리시고, 저는 또 감사히 잘 보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 열린책들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다 읽고나서 잠자냥님께서 처음에 그러셨던 것 처럼 대체 왜??? 란 생각하며 미묘하게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 감상적이다. 너무 낭만적이다.(부정적 의미) 란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나요.
나랑은 맞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긴 했어요.
잠자냥님 리뷰 보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네요.

잠자냥 2018-03-20 13:25   좋아요 1 | URL
잘 지내시죠? ㅎㅎ 저도 요즘 회사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책을 많이 읽지도 리뷰를 잘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잘 읽고 계시다는 댓글을 읽으면 힘이 나네요. ㅎㅎ 어릴 때 읽었던 것보다는 좋았지만.... 그래도 피츠제럴드는 다른 작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ㅎㅎ 그리고 사실 개츠비도 어떻게 보면 좀 스토커 같기도 ㅋㅋㅋㅋㅋ

케이 2018-03-20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다시 생각해보니 열린책들 아니고 민음사 번역본 이예요. 별 거 아닌데 정정하러 왔어요. ㅋ 그리고 저 요즘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면 뒤에서 (이제서야) 읽는 중인데 너무 재밌어요.!!

잠자냥 2018-03-20 17:21   좋아요 0 | URL
ㅎㅎ 민음사면 김욱동 교수 번역본이 것 같군요- 전 다음에 다시 한 번 읽어본다면 김석희 번역본으로 한 번 더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 안 읽을 것 같고요. ㅎㅎ <가면 뒤에서> 정말 재밌죠?!!!! 손에 땀이 나는 흥미진진!!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 일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깊은 강>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이 책은 여전히 내 책꽂이에서 때때로 그 푸른빛을 조용히 내뿜는다. 그즈음 이 책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은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소개 글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것은 내가 예상했던 종교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기 어려운,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신을 열렬히 믿는 이들에게 엔도 슈사쿠는 이단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깊은 강> 한 작품만으로 나는 그에게 반해서 그 뒤로 이런저런 작품을 찾아 읽어보았다. 국내에 소개된 책들이 더 많으면 좋겠는데 그리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침묵>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만큼 <깊은 강>에 견줄만한 감동을 줄 듯 싶다. <침묵>을 읽기에 앞서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을 읽었다. 나지막이 읊는 고해성사처럼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마음을 울린다. 첫 번째 작품인 「그림자」를 읽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져왔다. 눈물이 살짝 맺힌다. <깊은 강>을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어찌 보면 ‘수필’ 같기도 하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나’는 엔도 슈사쿠 그 자신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 ‘나’의 이야기들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가톨릭이라는, 일본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낯선 종교를 갖게 되는 계기와 그로 인한 갈등. 그 갈등을 극복하면서 종교를, 신을 자기만의 관점을 갖추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밀히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그림자」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 처음으로 가톨릭 종교에 들어서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자」의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한 신부를 알게 된다. 그 신부는 어머니가 무척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전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어머니와 신부의 관계가 그려지는데, 어머니의 맹목적인 그를 향한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을 뛰어넘어 이성적 호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나’ 또한 왠지 모르게 그 신부에게 반발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나’의 교육마저도 신부에게 맡긴다. 강인함과 단정함, 절제를 두루 갖춘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 같다. 병약한 ‘나’는 그가 바라는 일 가운데 포기하는 것이 많다. 신부는 그런 ‘나’를 정신이 나약한 사람 취급하면서 때로는 경멸의 눈빛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는 ‘나’에게서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가 종교를 믿는 것도, 그 신부와 연락하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 때문에 ‘나’는 죽은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그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신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성인이 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신부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나’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가 신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었다. 신부가 그를 믿고 따르던 한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결국 신학교를 떠나고 말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올곧던 신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더욱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어머니와도 어쩌면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의심까지 하게 된다.


또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어느 백화점 옥상에서 그를 우연히 목격한다. 예전의 단아하고 강직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평범하게 늙은 초라한 모습이다. 그때, 한 여자가 아이의 손을 끌고 그에게 다가가고, 그들은 맞은편 출입구로 사라진다. 평범하고 초라해진 그. 그는 정말 신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그림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나’가 우연히 어느 음식점에서 신부를 만난 장면이다. 그 신부임이 틀림없는 한 남자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를 몰래 지켜보다가 어떤 광경을 맞닥뜨린다. 음식이 나오자 그가 재빨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이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차오르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던 나 또한 그랬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투철한 신부였지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녀와 결혼하고, 그럼으로써 신의 가르침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성직자.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정말로 신에게 버림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신을 저버린 것일까? 그 모든 의문은 그가 음식을 앞에 두고 조용히 성호를 긋는 모습에서 자연스레 풀린다. 그는 신을 버린 적도 없으며, 신 또한 그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면, 이 세상에 신이, 종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림자」에서는 결혼과 함께 교회를 떠나게 된 가톨릭 신부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과 외로움이 그려지면서 그런 그를 지켜보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와 나와의 관계, 그와 신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런 고민의 과정을 지나왔기에 엔도 슈사쿠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 문제를 일생의 화두로 삼게 되는 작가가 된 것은 아닐지.


나로 하여금 당신 테이블로 다가서지 못하게 가로막은 힘,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내 삶을 형성해 온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소설가가 되고 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세 차례나 썼는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형시켜 썼습니다. 당신은 그 사건 이후 오랫동안 내 작품 속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소재로 한 소설은 거의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아직 당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소재로 한 작품이 계속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존재를 내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림자」, 11~12쪽)


엔도 슈사쿠가 생각하는 신은 <깊은 강>의 인물 ‘오쓰’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가톨릭 신자였던 ‘오쓰’는 미쓰코의 파괴적인 본능 때문에 여러 번 상처를 입는다. 미쓰코에게 신을 버리라는 강요까지 받는다. 신이라는 단어조차 듣기 싫다는 말에, 신을 양파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깊은 강>, 61쪽) 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오쓰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오쓰는 그가 속했던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 받지만 이 세계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오쓰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을까. 「그림자」의 그 신부의 모습에서 ‘오쓰’의 모습이 겹친다.


오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깊은 강>, 177쪽)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깊은 강>, 94쪽)


「그림자」의 신부는 원칙에 철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던 성직자로서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더 인간적이며 종교적으로 다가온다. 음식점에서 홀로 남몰래 기도를 올리던 그. 그러한 모습이 더욱 신을 받드는 듯하다. 아마도 이렇게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거대한 생명’이자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로서의 신, 그리고 그런 태도로 종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더욱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이런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주기에 언제나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이제 <침묵>을 읽음으로써 그 깊은 감동에 더욱 빠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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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5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엔도 슈사쿠의 책은 <침묵>과 <바다와 독약>
인데, 아무래도 대표작인 <침묵>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네요.

일본 작가로는 특이하게 가톨릭 신앙인이어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종교인으로서의 그런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잠자냥 2018-03-15 15:02   좋아요 1 | URL
저는 <침묵>말고 <바다와 독약>은 읽었는데 아무래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이 더 와닿기는 하더군요. ㅎㅎ 조만간 <침묵>을 읽어야겠습니다.

2018-03-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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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판다. 갖고 있어봤자 짐만 될 것 같은 책들을 주로 처분한다. 나는 웬만해서는 책을 팔지 않는데, 그래도 가끔 팔고 싶은 책이 나온다. 대부분은 책을 판매한 돈으로 다시 중고 책방에서 다른 책을 산다. 엄밀한 의미로는 책 교환이 맞는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책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다른 책을 사지 않았다. 중고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 없기도 했지만, 올해 이미 책을 많이 산 터라 그것들을 다 읽을 때까지는 책 사는 것을 자제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 원두가 딱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책을 판 돈으로 원두를 200그램 사고, 여과지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샀다. 책 여섯 권과 바꾼 돈 3만 7천 원은 그렇게 순식간에 온전히 먹을거리로 변한 것이다. 뱃속으로 들어갈 것들과 교환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가 떠올랐다. 작품 속 나, 즉 하야시 후미코도 책을 판다. 읽은 책은 거의 되파는 것 같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긴 돈으로 먹을거리를 산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 음식이 배고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고 나는 커피나 맥주, 과일처럼 허기를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품목이다. 기호식품이랄까. 굳이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내 곁을 떠난 책에도, 맞바꾼 음식에도 크게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하야시 후미코는 어떨까? <방랑기>의 그녀는 늘 굶주림과 싸운다. 배고픔이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글을 써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지만, 그 돈은 몇 푼 되지 않고, 어머니와 새아버지까지 부양하는 처지다. 저축은커녕 돈이 주머니에서 머물 틈이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식모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한다. 그러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문학가의 길을 꿈꾸며 글을 쓴다. 그 치열한 기록이 바로 <방랑기>이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함순의 <굶주림> 속 인물, <방랑기>의 인물도 모두 작가 자신을 대변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채,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삶의 문제 때문에 한없이 고통받는다. 그리나 <방랑기>의 그녀도 <굶주림>의 그도 생활에, 삶에, 인생에 무릎 꿇지는 않는다. 바로 거기에서 묘한 감동이 일어난다.

<방랑기>의 주인공은 하야시 후미코, 그녀 자신이다. 1920년대 여자 혼자 몸으로 세상 온갖 풍파에 맞선 것이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 부양의 의무까지 지고 있다. 더욱이 가족들은 그녀가 책상 앞에 앉으면 돈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알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더 미칠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자에게 기대는 것을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카페 여급으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한테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밥벌이는 굳건히 해나간다. ‘후지 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 이렇게 외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추구해나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내 일은 성냥갑을 붙이는 일이나 재봉틀 부업과는 다르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원고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지금의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다. 차라리 재봉틀 페달을 밟으며 부업을 하는 편이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284쪽)

목에 분을 바른 것을 보고 노무라 씨는 정말로 여급답다며 질책한다. 네, 저는 여급이라 어쩔 수 없어요, 라고 했다. 여급이 뭐가 나쁜 거야? 무슨 일이라도 해야지. 다른 사람이 먹여살려주지도 않는데……. (384쪽)


<방랑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배고픔’ 그리고 ‘문학’이 아닐까. 그녀 머릿속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없다. 그저 흰쌀밥으로 만든 한줌의 주먹밥이 먹고 싶을 뿐이며, ‘남아 있는 배추를 씹으며 하얀 쌀밥의 맛을 상상’하기를 즐긴다. 톨스토이나 체호프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들을 닮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밀려오는 것은 좌절뿐이다. ‘천재를 언제나 꿈꾸지만 이 천재는 굶주린 채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범재로 끝나버릴’것 같다. ‘도대체 어디에 가면 평화롭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346쪽) 고뇌할 뿐이다.

허기와 싸우기 위해 오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그녀의 굶주림은 이토록 처절하지만 불쌍하다거나 가여운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생활에 맞서기에 그런 것일까? 어찌 보면 한없이 짐처럼 여겨지기 쉬운 가족에게도 따스한 애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도 그녀처럼 이렇게 삶의 무게에 지지 않고 살아나가야 할 텐데, 용기를 얻거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방랑기>가 출간 무렵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읽혔던 게 아닐지.

배고픔과 문학에 대한 개인적 열정만이 가득한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나 풍경 묘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 묘사를 통해 당시 사회에 대한 그녀만의 예리한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자신처럼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다. 그렇다고 통렬하게 비판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표현이 때때로 눈에 들어와 뇌리에 남는다. 이따금 보이는 그녀가 직접 쓴 시들도 그 진실함에 가슴을 울린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고 쌜룰로이드 냄새나는 쌜룰로이드 생활이다. 하루 종일 덕지덕지 삼원색을 칠하며 태양과 격리된 비뚤어진 공장 안에서 벌레처럼 그저 한없이 긴 시간과 청춘과 건강을 착취당한다. 어린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저려온다. (40쪽)

함께 자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고통이 늦은 밤 방 안에 가득 차면서 나는 나 혼자만의 방이 갖고 싶어졌다. (228쪽)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력서와 대조하면서 대체로 인품, 용모, 능력이 어떤지로 결정한다. 잠시 구경거리가 되고 나서, 엽서로 통보한다는 답변. 이런 일은 매번 똑같아서 익숙하지만 정말 재미없다.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아주 예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튼튼한 몸만 있을 뿐. 살면서 우선 어떻게든 생활해나간다는 인간의 중요업무에서 언제나 나는 비참하게 실패했다. 나는 타락하기 딱 좋은 레디메이드. 고용주는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이런 여자 따위를 고용할 리가 없다. (317쪽)

하숙생활은 인간을 관료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전전긍긍 주위를 살피게 된다.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월말에는 이불을 말리고 시골에서 온 우편환을 바꾸러 간다. 그것만으로도 하숙의 시간은 지나가버리지요. 제 경우가 아니에요. 여기 사는 학생들 얘기에요. 하이네형도 없고 체호프형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훈련을 받고 있을 뿐. (337쪽)


살아갈수록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나갔느냐의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랑기>의 ‘나’ 그리고 <굶주림>의 ‘나’, 그들이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무릎을 꿇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그리하여 글쓰기를 멀리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도, 크누트 함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랑기>는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한 여자의 생생한 기록으로 내게는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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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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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배고픔을 생각해야만 하는, 떼려야 떼어 낼 수 없는 처절한 굶주림.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하야시 후미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면서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어낸 그녀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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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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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구원 문제를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파헤쳐온 엔도 슈사쿠의 자전적 단편 모음집. 그의 작품 전반을 이해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 첫 번째 작품인 ‘그림자‘가 가장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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