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다르’는 피할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 또한 고다르의 작품을 여러 편 보았다. 고다르의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사람은 수잔 손택이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Styles of Radical Will>에서 여러 차례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 손택에게 고다르는 열광의 대상이었다. 손택은 고다르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발전이 훨씬 개인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못한 대부분의 영화감독과는 달리, 고다르의 작품은 전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결국에는 전면을 다 보아야만 한다. 고다르의 예술이 갖는 가장 현대적인 한 가지 국면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의 가치가 좀 더 큰 기획, 필생의 역작 한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6쪽)
왜 고다르를 브레송과는 달리 문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그리고 브레송과 같이 현대 대예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분출, 극명한 모험정신, 철두철미하게 상업화되어 버린 종합예술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의 이상야릇한 개인주의에 있다. 그러나 고다르가 단순 지적인 우상 파괴자는 아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영화를 파괴하는 '파괴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8쪽)
한때 나는 고다르보다 수잔 손택이라는 이름에 더 열광했었다. 그녀의 자유롭고도 깊은 사유와 글쓰기 스타일에 완전히 반했었다. 손택이 고다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손택이 그토록 열광했던 대상인 고다르에게까지 나의 관심이 확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가 찬탄하는 고다르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녀의 글을 읽었고, 보고 난 뒤에도 그녀의 글을 읽는다. 고다르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중 한 작품이 바로 「그녀의 생을 살다 Vivre sa vie」이다. 손택 또한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녀는 이 작품을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는 완벽한 영화로 보인다. 이 영화는 고귀하면서도 복잡한 그 무언가를 제시하고자 했으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고다르는 아마도 ‘철학적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그 임무에 걸맞은 지적 능력과 재량을 소유한 오늘날의 유일한 영화감독일 것이다. (....) 고다르는 사상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을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최초의 감독이다. 그는 이 발견을 「작은 병정」, 「그녀의 생을 살다」, 「기관총 부대」, 「경멸」, 「결혼한 여인」, 「알파빌」 같은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 내 생각에는 「그녀의 생을 살다」가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10쪽)
손택처럼 내가 고다르의 영화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생을 살다」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뜻밖에도 많은 것을 남긴다.

70년대나 8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많았다.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여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영화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 스스로 ‘몸을 팔면서’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게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는 주로 그런 내용을 다루며 이런 영화들을 일컬어 ‘호스티스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는 어쩌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관객이 주인공인 ‘영자’에 완벽하게 감정이입하거나 혹은 영화에 푹 빠져서 불쌍한 ‘영자’의 삶을 보며 눈물 콧물 흘리게 한다면 「그녀의 생을 살다」는 철저하게 주인공 ‘나나’의 삶을 관객이 그저 바라보게만 한다.
‘나나의 인생 12장’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총 12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나의 삶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지 않는다. 제1장부터 불친절하다. 나나와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나오는 장면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나나와 그 남자의 관계, 나나의 현재 상태 등을 유추해야만 한다. 마치 카페에서 전혀 모르는 남녀의 대화를 우연히 들으며 그들의 관계와 현재의 상태를 대충 그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피상적인 모습에 그치고 마는지 모른다.
카페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나나는 ‘폴’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남자친구인가? 하려는 찰나 이 남자는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떠나려는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나의 꿈이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계속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드러내고(그러나 무슨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는지는 또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나나는 매춘부의 길을 택하게 된다. 매춘부가 된 나나는 그렇다면 불행할까? 행복할까? 이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매춘부가 된 나나가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괴롭게 피하는 모습을 보면 매춘을 그녀가 그렇게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카페에서 포주에게 자신이 매춘부가 되길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구구절절 쓰는 장면을 보면 나나에게 있어 ‘매춘’이란 어떻게 보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살아가기’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포주에게 쓰는 편지에 자신의 몸매를 설명하기 위해 카페에서 일어나 한 뼘 한 뼘 키를 재는 나나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 또한 매춘에 대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판단을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나나가 내린 선택에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슬픔은 질퍽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매우 건조한 슬픔이다.
매춘부의 삶을 살기 시작한 나나는 돈을 벌고 젊은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가끔 궁금해 한다. ‘내 삶이 정말 행복한가?’ 그렇지만 그에 대해서도 딱히 어떤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나나의 움직임, 친구 이베트 혹은 낯선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냥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나나의 태도. 그러니까 사실 그 누구도 ‘나나’의 선택과 ‘나나’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졸라의 「나나」와 이름이 같은 ‘나나’- 어쩌면 이 이름 안에서 관객은 ‘나나’의 삶을 대강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에밀졸라의 '나나'처럼 고다르의 ‘나나’ 역시 결국 거리의 여자로 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여기서 ‘비참’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다.
영화는 줄곧 건조한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관객이 섣불리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하며 나나 역시 ‘내 삶은 내 책임이야’라는 조금은 당돌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과연 나나는 그저 그녀의 삶을 살아갔을 뿐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은 육체뿐인 여자가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린 매춘이라는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강요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포주들이 하나의 ‘물건’처럼 ‘나나’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Vivre sa vie’라는 영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슬프게 다가온다.
한편, 손택은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그려진 매춘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우리는 나나가 옷 벗는 장면을 본다. 영화는 나나가 자신의 '겉', 즉 이전의 정체를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창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고다르의 관심사는 매춘의 심리학도, 사회학도 아니다. 그는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분리되는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매춘을 가장 급진적인 은유로 택한 것이다. 인생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가혹한 시험 무대로서.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4쪽)
고다르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다룬 이 영화-에세이의 좌우명을 몽테뉴에게서 따왔다. "우리는 자신을 타인에게 빌려주며, 자신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물론, 창녀의 삶은 자기를 남에게 빌려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가장 극단적인 은유일 것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6쪽)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만든 고다르는 「그녀의 생을 살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해석에 반대한다>의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맨 뒤에는 부록으로 「그녀의 생을 살다」가 파리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고다르가 직접 작성했던 광고문구가 실려 있다. 이 문구를 보는 것 또한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손택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