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작품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만들 의도를
가진 적이 없다 해도, 우리 운명을 가로질렀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모든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우리 속에
만들어낸다. (68쪽)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이 구절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쿠레주 부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 마리아는 그들에 의해 빚어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둘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무척이나 모순된다. 아버지 쿠레주에게 마리아는 성녀 그 자체다. 순결하고 고귀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존재. 반면 아들 레몽에게 마리아 그녀는 정열에 가득한, 때로는 음탕하기 그지없는 여자. 한 여자에게서 어떻게 그들은 이토록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마리아가 생각하는 그 두 남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마리아에게 쿠레주는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자와 같은 인물로 고결하고 품위 있는 존재다. 너무나 고결해서 지루하기까지한 사람이랄까. 또한 마리아에게 소년 레몽은
젊고 순수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은 물론 자신의 타락한 영혼까지 어쩐지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존재다. 자신이
혹시 유혹이라도 한다면 그 순수한 존재를 망칠 것만 같아, 죄를 지을 듯하여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가슴으로만 애태우는
존재. 하지만 마리아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그 두 남자의 실체 또한 그러할까?
늙은 쿠레주나 젊은 쿠레주가
‘마리아’의 실체 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 혹은 이미지를 사랑한 것처럼 마리아 역시 두 부자의 진정한 면모를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비단 마리아와 쿠레주 두 부자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지만 그
실체를 직시하는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매혹시키는 이미지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임을 깨닫지 못(126쪽)‘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인간들이 모두 그러하지 않을까?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랑했던 대상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뒤늦게 깨달은 후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경험은 누구나 다 있었으리라.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이해시킬 수도, 혹은 보여줄 수도 없으며 자기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그저 자신이 가진 환상 혹은 이미지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진짜
그 대상을 알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타인과 자기의 진정한 소통이란 애초에 아무리 사랑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의 사막>은 보여준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일 뿐이라는, 그렇기에
거기에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사막’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막’이 아닌, 결코 마르지 않는 샘,
우물과 같은 그런 사랑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그 욕망을 충족해야만 한다.
사랑에서 욕망의 채움이란 곧 함께 있는 것,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두 육체의 결합. 만지고 쓰다듬고
느끼고 등등이리라. 이런 궁극적인 욕망이 채워진다면 그 다음은? 계속해서 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지속될까? 그러나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욕망한 것을 소유하게 되면 어느덧 그 가치를 잊기 마련이다. ‘더 이상 욕망도 없이 지겨운 습관만이(189쪽)’ 남을 뿐이다. 결국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는 대상만이 지속적으로 목마른,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상태를 지속하게 한다. 때문에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모리아크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사랑도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할지도(169쪽)’ 모르며 그렇기에 처음부터 완전하게 실현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상태의 계속됨만이 아닐까.
<사랑의 사막>을 읽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쿠레주 박사처럼 자신의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그 사람의 실체를
사랑했기 보다는 환상, 내가 만들어낸 허상을 사랑했던 적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했다던 그 존재들은 과연 내
실체를 사랑했을까? 아니, 내 실체를 알기는 했을까? 그들이 ‘빚은’ 혹은 ‘발견한(아니면 발견했다고 착각한)’ 나란 사람의
이미지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마리아를 사랑하는 자기를 보며 쿠레주 박사는 자신이 항상 동일한 사랑의
방식, 즉 사랑하는 대상에 가닿지 못하는 사랑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랑을 대하는 기본 태도이다. 마리아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레몽 또한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아마도 일생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지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은 두 남자와 한 여인의 사랑이라는 어쩌면 한없이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토록
읽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꼭 사랑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자기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까지 던진다.
인간이란 어쩌면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섬에 고립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각자 그 섬에 닿으려고 아무리 노력하지만 결국 닿지
못하는... 섬과 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이 존재하는.... 그럼에도 그 사막을 건너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들... 쿠레주 부자(父子)와 마리아 크로스. 그리고 현재의 당신과 나. 모두가 그렇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면 난 화가 나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지요. 오늘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은
끔찍하게도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요.” (221~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