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온 사람들은 먼저 술과 안주를 주문한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한 시간에 오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 때문에 늦게 오는 이가 한 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사람 생각을
한다.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따로 챙겨놓든가, 아니면 그가 와서 뒤늦게 왔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마련이다.
가족끼리의 밥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바쁜 시대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일은 참 드물다. 언제나 늦게
오는 가족의 일원이 있기 마련이고 밥상을 차리는 이는 꼭 이렇게 뒤늦게 오는 가족을 위해 그 몫의 음식을 따로 챙겨둔다.
사람들은 이렇게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이와의 관계에서는 뒤늦게 온 사람에 대한 배려를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한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혈연이나 친분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라면 어떨까? 내 몫을 남에게 선뜻 떼어 주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자기 몫을 떼어
주어야 할 사람이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늦게 왔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 일도 덜했다면? 그런 이에게 자기가 받은 몫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가질 것이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신약 ‘마태복음’ 제20장 제13~14절)라는 성경의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존 러스킨이 말하는 ‘나중에 온 이 사람’이란 사회 경제적 약자를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렇게 ‘나중에 온 이 사람’이라는 성경의 한 구절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러스킨이 이 글을 쓸 당시 영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시기였지만 그와 함께 경제공황,
실업, 빈부격차 같은 폐단으로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러스킨은 이러한 때 주류 경제학을 ‘악마의 경제학’이라 비판하며 대안으로
인간의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의 영혼과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진짜 경제학이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162쪽) 러스킨은 ‘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부
는 전기와 비슷한 힘이어서, 그 자체의 불균형 또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적용된다.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1기니의 힘은
여러분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만약 이웃이 그 돈을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1기니는 여러분에게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1기니가 가진 힘의 정도는 그 돈에 대한 이웃사람의 필요나 욕망에
정확하게 좌우된다. 따라서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
두는 기술인 것이다.’ (86~87쪽)
러스킨에 따르자면 내가 많이 가질수록 세계의 어느 한 쪽에서
그만큼 자기 몫의 파이가 줄어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러스킨은 내 몫의 파이를 사회 경제적인 약자(나중에 오는 이)를
위해 나눠줄 수 있는 인간의 ‘애정’에 기초한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부를 많이 가진 사람, 고용주들이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노동자를 ‘자기 아들’ 대하듯이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면 이런 선량한 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있는 요즘 이 책을 읽자니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맞는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인데, 이게 정말 실제로 적용될 수 있을까?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에도 러스킨의 이
글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일반 경제학자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러스킨의 주장은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도 믿은, 한 이상주의자의 생각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기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척박하다.
러스킨의 주장대로 ‘부’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면, 아무리 많이
가진들 그 ‘부’를 갖고 지배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숨막히는 경제시스템에서 지배할 이들이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때문에 러스킨의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富)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잘
못되고 부자연스럽고 파괴적인 노동제도’때문에 ‘서투른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반값에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고’ ‘그런 노동자는
숙련된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숙련된 노동자가 서투른 노동자와 경쟁하느라 부당한 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게 되어’(67쪽)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느니 자기 몫을 조금은 덜 챙기더라도 최대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이상한 경제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유일한 경제학이고, 앞으로도 다른 경제학은 있을 수 없다,’(196쪽) 러스킨의 말대로
‘이상한 경제학’이지만, 지금 지구는 이 이상한 경제학에 그 어느 때보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중에 온
이'의 몫을 챙겨주는 행위는 그가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