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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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 등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재는 ‘영원한 사랑’의 신화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영원한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그래서 더욱 크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평생 너만을’ 혹은 ‘영원히 너만을’이라는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런 말을 상대방에게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때문에 허황된 약속이라는 믿음이 그 말을 하는 이에게도, 그런 말을 듣는 이에게도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주 드물게도 가끔 그런 사랑, 그런 연인을 만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생태주의 철학자이자 언론인,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꼽혔던 앙드레 고르와 그의 아내 도린이 그렇다. 2007년 9월 고르와 도린은 프랑스 동북부 자신들의 저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고르는 84살, 도린은 83살이었다. 고르는 도린 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동반 자살이었다. 그들이 남긴 쪽지에는 두 사람을 화장한 재를 그들이 가꾼 집 마당에 뿌려달라는 유언이 담겨있었다.

도린과 고르는 1947년 스위스 로잔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2년 뒤인 1949년 부부가 되었다. 60년 동안 서로 사랑했고, 58년간 부부로 지냈다. 그 세월 중 절반인 30년 가까이 도린은 불치의 병과 싸웠다. 아내가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을 알자 앙드레 고르는 1983년 이후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왔다. 20년을 넘도록 그렇게 지내다 결국 한날, 한시에 그들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쟤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89쪽 
 
<D에게 보낸 편지>는 앙드레 고르가 그의 아내 도린에게 보낸 마지막 연서다. 그들이 동반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 1년 전에 쓰였다. 사는 동안 수많은 글을 써온 고르는 어느 날 문득 아내에 관한 글은 쓴 적이 거의 없음을 깨닫는다. 그나마 아내의 이야기를 썼던 <배반자>에서는 아내의 본질을 왜곡한 것 같아 괴로웠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만남부터, 결혼, 그리고 삶의 전반을 추억하는 편지를 아내에게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결국 함께 생을 등지게 된다.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이 짧은 연서를 보면서 수도 없이 울컥하게 된다. 아마도 이 삶의, 이 사랑의 진정성이 글자 하나하나에 빼곡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리라. 흔히 우리는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그 ‘짝’이 진정한 자기 ‘짝’인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앙드레 고르와 도린을 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둘도 없을 오로지 자기만의 짝을 만났던, 그래서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렬한 연인으로, 각자의 생각과 사상을 그 누구보다 지지해준 평생의 친구로, 고난의 순간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한 동반자로, ‘떼려야 땔 수 없는 사이’로 평생을 함께한 고르와 도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박적일 만큼 세심’(47쪽)하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진정한 소울메이트였던 그들의 사랑을 보고 있자면 절로 경외감이 든다.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던 그들의 바람처럼 지금 고르와 도린은 또 함께이지 않을까 싶다.

이 얇은 책이 주는 감동의 무게는 엄청나다. ‘도린과 고르’- 그들처럼 사랑하다 죽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걸 더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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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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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만약 다자이 오사무 그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라면, 이 작가는 신뢰할 만하다. <인간 실격>이후 다자이 오사무의 이런저런 작품들을 찾아 읽었는데, 역시 작품 속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의 산문집인 <나의 소소한 일상>을 읽으니 ‘요조’는 결국 다자이 오사무구나 싶어진다. 그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투성이다.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표현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사물과 현상들이 그들에게는 그저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세상에 태어난 일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죽을 용기가 없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부끄러움의 극치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부끄러움과 남다른 감수성을 감추기 위해 타인과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하고 바보짓을 하며 남들을 웃기고자 한다. 그리고 또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 한다. 그런 인물들이 모두 실은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임을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을 두고 다투는 것도 부끄럽고 사람들이 야단법석 하는 것에 똑같이 경도되는 것도 부끄럽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이 특별하다는 표시를 하는 것 마저 부끄러워 이런 고독을 감추기 위해 그저 남을 웃기고 농담을 한다.

아아, 인간이 먹지 않으면 못 산다는 것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일까요. “이봐, 전쟁이 더 치열해져서 주먹밥 하나 놓고 다퉈가며 살아야 한다면, 난 사는 걸 그만둘래. 주먹밥 쟁탈전 참전 권리는 포기할 생각이니까. 안됐지만, 당신도 그땐 아이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하라고. 그게 지금의 나한테 남은 최소한의 프라이드니까. (<나의 소소한 일상>, ‘찾는 사람’, 100쪽~101쪽)

이것은 심약한 성격인 사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너무 야단법석하거나, 존경하고 있는 작품에는 일단 의심을 품는 버릇이 있습니다. (같은 책, ‘내 반생을 말하다’, 113쪽)

나는 집에서 늘 농담만 한다. 그야말로 마음에 고민과 번뇌가 많기 때문에 겉으로는 쾌락을 가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 아니, 집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남을 대할 때에도, 아무리 마음이 괴롭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거의 필사적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그리고 손님과 헤어지고 나면 나는 피로에 휘청거리고 돈 문제, 도덕 문제, 자살을 생각한다. (같은 책, ‘체리’, 132쪽)

인사를 잘하는 남자가 있다. 혀가 산들산들 나부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온 정력을 쏟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부끄럽지 않은가. (같은 책, ‘벽안탁발’, 187쪽)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 누가 조금 뭐라고만 하면 영혼까지 다쳐서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이 남자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늘 자살충동에 시달렸고, 그 짧은 삶에 무려 다섯 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 그리고 결국 그 시도는 성공해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서른 후반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다자이 오사무를 두고 청춘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지나치지는 않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를 ‘청춘의 작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부끄러움에서 멀어져간다. 그러다 점점 ‘부끄러움’이라거나 ‘수치’라는 감정을 잊게 된다. 섬세하고 여렸던 감수성은 세상 풍파에 시달려 뭉툭해져버린다. 차라리 이 거친 세상을 사는데 그런 감정은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며 애써 지우려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세상에 길들여져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의식도 없고 자괴감도 없는 그런 상태를 ‘사회화’되었다며,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며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추하게 늙어가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다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그런 부끄러운 세상에 맞서 평생 자학하며 살다 사라졌다. 그러기에 ‘청춘의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여기저기 쇠사슬이 얽혀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가 솟구친다. (같은 책, ‘체리’, 139쪽)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쓸쓸함을 견디는 것입니다.” (같은 책, ‘희미한 목소리’, 235쪽)

인생이란,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것만은 말할 수 있는데, 괴로운 것이다. 태어난 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그저 남과 다투는 것이며, 그 사이사이에 우리는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책, ‘여시아문’,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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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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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달걀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삶은 달걀일 수도 있고, 달걀부침 일 수도 있다. 달걀 맛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달걀 요리이면 충분하다.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 달걀을 삶기로 한다. 일곱 개의 달걀을 냄비에 넣고 가스 불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무언가 짧게 읽을만한 단편을 찾는다. 그러다 집어 든 것이 창비 세계문학 단편선 가운데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달걀이 몹시 고팠는지 읽는 것조차 달걀로 선택한다.

이윽고 나는 달걀이 익을 때쯤 가스 불을 끄고 나서 탄식한다. 고작 달걀이 먹고 싶어서 달걀을 삶고 우적우적 먹기만 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 누군가에게 달걀은 이토록 훌륭한 이야기 소재로 쓰여 감탄할 만큼 놀라운 단편을 빚어내는데, 나란 인간은 고작 달걀 노른자를 반숙으로 잘 삶기 위해서는 몇 분이 걸리는지, 10분인지 12분인지를 가늠하느라 온 신경이 쏠려있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가. 게다가 그 달걀 껍데기를 벗기고 나서 노른자가 원하는 대로 알맞게 익었음을 기뻐하며 히죽대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달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고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는구나.

<달걀>은 미국 중서부 도시 한 가난한 가족의 삶을 다룬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는 그저 평범한 일꾼이었다. 성공이란 자신과 멀기만 한 그 어떤 개념이라 여기고 소시민적 삶을 꾸려나갈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변모시킨 것은 어머니와의 결혼이다.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여인으로 아버지에게 ‘출세의 야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성공을 꿈꾸며 양계장을 차리지만 늘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이들이 곧잘 그러하듯, 양계장은 보기 좋게 망하고 만다. 게다가 ‘나’에게도 양계장은 삶의 이런저런 쓰라린 모습을 가르쳐 준 하나의 실패적 상징물로 남는다.

철학자들 대다수는 필시 양계장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닭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다가 지독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병아리들은 너무나 영리하고 기민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너무 끔찍할 정도로 멍청하다. 병아리는 사람과 아주 비슷해서 우리가 인생을 판단할 때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병으로 죽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 바퀴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으스러져 죽어서 조물주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 '달걀',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미국편> - 257쪽)


그런 뒤에도 아버지는 성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기차역 가까이에 작은 음식점을 차린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들과 다른 유니크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음식점을 독특한 곳, 그리하여 또 오고 싶은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양계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양계장에서는 종종 기형 병아리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기형 병아리들이 언젠가는 쓸모 있을 거라면서 알코올에 보존한 채로 하나씩 유리병에 담아두었다.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것, 무언가 독특한 것에 끌리는 법이라며, 유리병 속 병아리들이 아버지에게 언젠가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아버지는 달걀로 보여줄 수 있는 온갖 마술쇼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음식점을 찾은 손님들에게 아버지는 그 그로테스크한 볼거리와 서투르기 짝이 없는 달걀 쇼를 선보인다. 그러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달걀 쇼도, 반드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던 기이한 볼거리도 모두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씩 어긋나고 만다. 성공이 그리 쉽다면 삶이 어려울 이들이 얼마나 되랴....

달걀은 흔히 구할 수 있고 가격 또한 그리 비싸지 않다. 가장 싼 달걀부터 비싼 달걀까지 선택의 폭도 넓다. 물론 가장 싼 달걀조차 구할 수 없는 이들도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어떤 음식보다 쉽게 누구나 구해서 매우 간단한 요리부터 썩 훌륭한 요리까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친근하고 익숙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깨어지기 쉬운 연약하디 연약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달걀은 사는 순간부터 조심해야 한다. 요리하기 전까지도 깨어질까 봐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리하는 순간, 달걀을 깨뜨리는 그 순간에도 혹여 껍질이라도 들어가랴 싶어 조심해야 한다. 고작 삶은 달걀 하나, 달걀프라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노른자의 익힘 정도를 어느 쯤으로 할지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기는 먹되 원하던 요리가 아닌 그냥 평범한 달걀 요리가 되고 만다. 한 번 깨어진 달걀은 돌이킬 수도 없다. 마치 ‘삶’처럼 말이다. 그렇게 ‘삶’보다 ‘달걀’이 승리하고 마는 순간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마치 <달걀> 속 아버지의 ‘달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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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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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면?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에 바로 그런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뽐므’-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도, 친구에게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도 뽐므는 단 한 순간도 뽐므 그 자체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설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의 어떤 이미지를 보고 접근하게 된다. 그 또는 그녀의 실체는 뒤로한 채 순전히 그 상대방의 이미지에 반해 다가선다. 그리고는 자신이 느낀 이미지의 정체를 밝히고자 온갖 노력을 하게 된다. 저 사람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실체에 다다르기 위해 보통은 ‘대화’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상상 속 이미지와 그 사람이 일치한다면 호감은 더욱 증폭하여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상상과는 달리 추악한 실체를 만나게 되면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더욱 사랑을 하게 되든, 등을 돌리든 그 모든 결과는 그 또는 그녀를 알고자 노력한 끝에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하지도 않은 채 타인을 영원히 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다 ‘그 혹은 그녀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등을 돌린다면 그 타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울 것인가. 게다가 한때는 나의 연인이라 부르던 사람이 그렇게 등을 돌린다면.

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의 사랑이 그렇다. 태어난 환경도 자라온 환경도 비루한 그녀는 제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배운 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녀의 집안은 늘 적막하고. 하나뿐인 가족인 ‘엄마’마저도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드물다. 그런 그녀가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먹는 것으로 치환하여 유난히 단 것에 집착하는 행동을 보일 뿐이다.

그런 뽐므에게 사랑을 느끼며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므리’. ‘뽐므’와는 달리 상류계급 출신에 배울 만큼 배운 남자다. 그런 에므리가 뽐므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통통히 살이 오른 뽐므의 젊음? 신선함?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무심한 듯한 표정? 어쨌든 에므리는 그녀에게 반하고, 다가서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함께 살수록 뽐므는 에므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어쩐지 다른 여자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신선하고 신비롭게 보였던 그녀의 ‘침묵’이 이제는 ‘답답함’으로 느껴진다.

에므리는 점점 그녀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당연하지! 그들이 함께 사는 장면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대화’). 이 소설 속의 두 주인공 ‘뽐므’와 ‘에므리’는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뽐므와 에므리 뿐만이 아니다. 뽐므의 엄마도, 뽐므의 친구 마릴렌도 그녀들의 남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그녀들의 남자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뽐므와 함께 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피상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겉모습만 훑다가 서로 멀어져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비교된 한 영화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 그 영화는 처음 만난 여자(셀린느)와 남자(제시)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수다스러운가 내기를 하듯 삶과 사랑 예술에 대한 대화가 끝없이 오고 간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그런 사이가 된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만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므리와 뽐므가 함께했던 긴 시간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설정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렇게 에므리에게 버림받다시피 이유도 모른 채 팽개쳐진 뽐므는 결국 서서히 망가진다. 그토록 음식을 좋아하던 그녀는 이제 음식을 거부한다. 거식증에 걸린 채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젠 그나마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던 하나의 방식, 음식을 먹는 행위조차도 그만두게 된 것이다. 만약 에므리가 뽐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그것이 꼭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처럼 수다스러운 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서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툴러 침묵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뽐므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녀의 방식으로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레이스를 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동작과 달리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반복되는 동작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반복되는 그 동작처럼 끊임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에므리는 뽐므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레이스를 뜨고 있는 여자’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끝으로 계급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사랑하다 헤어지는 어찌보면 한없이 통속적인 이 이야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매혹되었던 까닭은 아마도 파스칼 레네의 독특한 서술방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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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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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마신 물이 소금물이라면,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물이라면 갈증은 더 심해질 뿐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의 주인공 에쓰코는 그런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자다. 그것도 ‘사랑’의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인. 그러나 에쓰코를 보면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어떤 뚜렷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조차 찾지 않으니, 그 갈증이 해소될 리가 있을까. 그나마 가끔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소금물을 마신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표지만 보면 삼류 로맨스 소설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물론 그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 표지는 책을 읽고 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꿈꾸는 듯한, 목이 마른 듯한 여자의 표정, 안개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뿌연 여자의 실루엣. 표지의 여자는 분명 ‘에쓰코’ 그녀일 것이다.

에쓰코는 젊은 미망인이다. 도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그녀는 료스케를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런 삶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이 죽고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 야키치는 은퇴한 회사 사장으로 현재는 한적한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 집에는 야키치의 장남  겐스케 부부, 전쟁 포로로 아직 귀환하지 못한 셋째 아들 유스케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에쓰코는 야키치의 둘째 아들이었던 남편 료스케의 죽음 이후, 시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기모토 일가에는 이런 가족 구성 외에 일꾼인 사부로와 하녀 미요가 함께 산다.

그런데 이 집의 분위기는 참으로 기묘하다. 도시에서 살던 젊은 여자가 남편이 죽었다고 시댁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선택인데, 에쓰코는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의 ‘애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쓰코는 시아버지와 한방을 쓰고 시아버지인 야키치의 손길을 밤마다 받는다. 그런 손길에 별다른 저항도 없고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도 없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시댁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쩐지 일어날 일이었고 그렇게 되어있던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 뭐라 한마디 하는 가족도 없다. 룸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장남은 장남대로 또 그의 부인은 부인대로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에쓰코 그 여자가 더 대단’하다며 구경꾼처럼 그 둘의 관계를 지켜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일꾼인 사부로와 미요마저 에쓰코와 야키치의 관계를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쓰코, 그녀의 갈증은 어디서 기원할까? 그녀의 사랑은 한 번도 제대로 채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은 그녀를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상처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밤마다 에쓰코의 육체를 탐하는 시아버지 야키치는 애당초 에쓰코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이라는 게 생기더라’는 이야기 전개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에쓰코의 시선은, 욕망은 이 집의 일꾼 사부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로와 에쓰코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진다. 시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 사부로와 밀회를 즐기는 에쓰코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그런 통속성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인데, 그 통속성의 한껍질을 더 벗기면 그다지 통속적이지 않다는 데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에쓰코가 사부로를 욕망한다는 것을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야키치 역시 자신이 탐하는 며느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에쓰코 그녀가 사랑하는 ‘사부로’ 뿐이다.

에쓰코가 사랑하는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부로’- 이 둔감한 남자 때문에 에쓰코의 욕망은 또 채워지지 않는다. 갈증은 계속 남을 뿐이다. 에쓰코는 사부로를, 그런 에쓰코를 또 야키치는 ‘갖고 싶어’하고 이런 서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이 작품을 지배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서로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기에 <사랑의 갈증>은 서걱서걱하고 메마르다. 촉촉한 감정의 교류는 없고 욕망과 질투, 가학적인 괴롭힘, 그로 인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베어져 나온다.

<사랑의 갈증>은 1950년 미시마 유키오가 무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에쓰코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분명 남자인데도 혹시 그 안에 여자가 존재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랍도록 섬세하게 젊은 미망인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시아버지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일꾼을 탐하는,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보면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 여자, 에쓰코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놀라운 글 솜씨 때문이리라.

읽는 동안 서걱서걱 모래 밭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작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말라오는 <사랑의 갈증>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흔히 미시마 유키오를 탐미주의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탐미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여기 저기 문장에 밑줄을 그어지고 싶어지는 작품. 그런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며 읽다 보면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살아간 인생 내력을 떠나 작가로서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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