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난히 달걀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삶은 달걀일 수도 있고, 달걀부침 일 수도 있다. 달걀 맛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달걀 요리이면 충분하다.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 달걀을 삶기로 한다. 일곱 개의 달걀을 냄비에 넣고 가스 불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무언가 짧게 읽을만한 단편을 찾는다. 그러다 집어 든 것이 창비 세계문학 단편선 가운데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달걀이 몹시 고팠는지 읽는 것조차 달걀로 선택한다.

이윽고 나는 달걀이 익을 때쯤 가스 불을 끄고 나서 탄식한다. 고작 달걀이 먹고 싶어서 달걀을 삶고 우적우적 먹기만 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 누군가에게 달걀은 이토록 훌륭한 이야기 소재로 쓰여 감탄할 만큼 놀라운 단편을 빚어내는데, 나란 인간은 고작 달걀 노른자를 반숙으로 잘 삶기 위해서는 몇 분이 걸리는지, 10분인지 12분인지를 가늠하느라 온 신경이 쏠려있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가. 게다가 그 달걀 껍데기를 벗기고 나서 노른자가 원하는 대로 알맞게 익었음을 기뻐하며 히죽대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달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고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는구나.

<달걀>은 미국 중서부 도시 한 가난한 가족의 삶을 다룬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는 그저 평범한 일꾼이었다. 성공이란 자신과 멀기만 한 그 어떤 개념이라 여기고 소시민적 삶을 꾸려나갈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변모시킨 것은 어머니와의 결혼이다.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여인으로 아버지에게 ‘출세의 야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성공을 꿈꾸며 양계장을 차리지만 늘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이들이 곧잘 그러하듯, 양계장은 보기 좋게 망하고 만다. 게다가 ‘나’에게도 양계장은 삶의 이런저런 쓰라린 모습을 가르쳐 준 하나의 실패적 상징물로 남는다.

철학자들 대다수는 필시 양계장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닭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다가 지독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병아리들은 너무나 영리하고 기민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너무 끔찍할 정도로 멍청하다. 병아리는 사람과 아주 비슷해서 우리가 인생을 판단할 때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병으로 죽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 바퀴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으스러져 죽어서 조물주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 '달걀',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미국편> - 257쪽)


그런 뒤에도 아버지는 성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기차역 가까이에 작은 음식점을 차린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들과 다른 유니크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음식점을 독특한 곳, 그리하여 또 오고 싶은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양계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양계장에서는 종종 기형 병아리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기형 병아리들이 언젠가는 쓸모 있을 거라면서 알코올에 보존한 채로 하나씩 유리병에 담아두었다.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것, 무언가 독특한 것에 끌리는 법이라며, 유리병 속 병아리들이 아버지에게 언젠가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아버지는 달걀로 보여줄 수 있는 온갖 마술쇼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음식점을 찾은 손님들에게 아버지는 그 그로테스크한 볼거리와 서투르기 짝이 없는 달걀 쇼를 선보인다. 그러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달걀 쇼도, 반드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던 기이한 볼거리도 모두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씩 어긋나고 만다. 성공이 그리 쉽다면 삶이 어려울 이들이 얼마나 되랴....

달걀은 흔히 구할 수 있고 가격 또한 그리 비싸지 않다. 가장 싼 달걀부터 비싼 달걀까지 선택의 폭도 넓다. 물론 가장 싼 달걀조차 구할 수 없는 이들도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어떤 음식보다 쉽게 누구나 구해서 매우 간단한 요리부터 썩 훌륭한 요리까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친근하고 익숙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깨어지기 쉬운 연약하디 연약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달걀은 사는 순간부터 조심해야 한다. 요리하기 전까지도 깨어질까 봐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리하는 순간, 달걀을 깨뜨리는 그 순간에도 혹여 껍질이라도 들어가랴 싶어 조심해야 한다. 고작 삶은 달걀 하나, 달걀프라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노른자의 익힘 정도를 어느 쯤으로 할지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기는 먹되 원하던 요리가 아닌 그냥 평범한 달걀 요리가 되고 만다. 한 번 깨어진 달걀은 돌이킬 수도 없다. 마치 ‘삶’처럼 말이다. 그렇게 ‘삶’보다 ‘달걀’이 승리하고 마는 순간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마치 <달걀> 속 아버지의 ‘달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