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마신 물이 소금물이라면,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물이라면 갈증은 더 심해질 뿐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의 주인공 에쓰코는 그런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자다. 그것도 ‘사랑’의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인. 그러나 에쓰코를 보면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어떤 뚜렷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조차 찾지 않으니, 그 갈증이 해소될 리가 있을까. 그나마 가끔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소금물을 마신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표지만 보면 삼류 로맨스 소설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물론 그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 표지는 책을 읽고 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꿈꾸는 듯한, 목이 마른 듯한 여자의 표정, 안개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뿌연 여자의 실루엣. 표지의 여자는 분명 ‘에쓰코’ 그녀일 것이다.

에쓰코는 젊은 미망인이다. 도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그녀는 료스케를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런 삶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이 죽고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 야키치는 은퇴한 회사 사장으로 현재는 한적한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 집에는 야키치의 장남  겐스케 부부, 전쟁 포로로 아직 귀환하지 못한 셋째 아들 유스케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에쓰코는 야키치의 둘째 아들이었던 남편 료스케의 죽음 이후, 시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기모토 일가에는 이런 가족 구성 외에 일꾼인 사부로와 하녀 미요가 함께 산다.

그런데 이 집의 분위기는 참으로 기묘하다. 도시에서 살던 젊은 여자가 남편이 죽었다고 시댁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선택인데, 에쓰코는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의 ‘애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쓰코는 시아버지와 한방을 쓰고 시아버지인 야키치의 손길을 밤마다 받는다. 그런 손길에 별다른 저항도 없고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도 없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시댁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쩐지 일어날 일이었고 그렇게 되어있던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 뭐라 한마디 하는 가족도 없다. 룸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장남은 장남대로 또 그의 부인은 부인대로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에쓰코 그 여자가 더 대단’하다며 구경꾼처럼 그 둘의 관계를 지켜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일꾼인 사부로와 미요마저 에쓰코와 야키치의 관계를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쓰코, 그녀의 갈증은 어디서 기원할까? 그녀의 사랑은 한 번도 제대로 채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은 그녀를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상처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밤마다 에쓰코의 육체를 탐하는 시아버지 야키치는 애당초 에쓰코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이라는 게 생기더라’는 이야기 전개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에쓰코의 시선은, 욕망은 이 집의 일꾼 사부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로와 에쓰코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진다. 시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 사부로와 밀회를 즐기는 에쓰코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그런 통속성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인데, 그 통속성의 한껍질을 더 벗기면 그다지 통속적이지 않다는 데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에쓰코가 사부로를 욕망한다는 것을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야키치 역시 자신이 탐하는 며느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에쓰코 그녀가 사랑하는 ‘사부로’ 뿐이다.

에쓰코가 사랑하는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부로’- 이 둔감한 남자 때문에 에쓰코의 욕망은 또 채워지지 않는다. 갈증은 계속 남을 뿐이다. 에쓰코는 사부로를, 그런 에쓰코를 또 야키치는 ‘갖고 싶어’하고 이런 서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이 작품을 지배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서로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기에 <사랑의 갈증>은 서걱서걱하고 메마르다. 촉촉한 감정의 교류는 없고 욕망과 질투, 가학적인 괴롭힘, 그로 인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베어져 나온다.

<사랑의 갈증>은 1950년 미시마 유키오가 무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에쓰코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분명 남자인데도 혹시 그 안에 여자가 존재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랍도록 섬세하게 젊은 미망인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시아버지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일꾼을 탐하는,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보면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 여자, 에쓰코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놀라운 글 솜씨 때문이리라.

읽는 동안 서걱서걱 모래 밭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작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말라오는 <사랑의 갈증>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흔히 미시마 유키오를 탐미주의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탐미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여기 저기 문장에 밑줄을 그어지고 싶어지는 작품. 그런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며 읽다 보면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살아간 인생 내력을 떠나 작가로서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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