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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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잘 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다. 하루키는 어떠한가? 돌이켜 보면 나는 그의 수많은 에세이와 소설을 종종 읽었어도 그 안에서 가족의 흔적을 느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그 많은 에세이에서 그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 않다. 소설만 봐도 부모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때문에 하루키가 <고양이를 버리다>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 하루키도 이제 꽤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인상 깊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여름 오후, 소년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해변으로 고양이를 버리러 간다. 지금으로서야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유기한다면 온갖 비난에 시달릴 테지만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하루키가 아버지와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 내 머릿속에도 유년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을 읽다가, 이 고양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그 오래전,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노랑 눈에 온몸이 새까만 고양이었다. 할머니는 녀석이 마당에 있는 쥐를 잘 잡는다면서 밥도 주면서 챙겨주기 시작했다. 아주 흔한 ‘나비’라는 이름도 당신이 몸소 붙여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마당 장독대나 지붕 위에서 가르랑 거리는 녀석을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마당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비’를 예뻐하던 막냇동생에게 물어보니 할머니가 가방에 담아서 버린다고 데리고 나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순한 녀석이다. 지금 키우는 내 고양이들은 병원에 가려고 케이지에 넣으려고 하면 몇 시간을 씨름해야 하는데, 할머니 혼자 그 검은 고양이를 가방에 넣었다니, 참으로 순한 녀석이 아닌가. 아니면 이 집에서 더는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나비’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지 않았던 나는 그렇구나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동생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 안에서 놀다 지겨워진 우리는 마당으로 나갔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붕 위에서 ‘나비’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제 온몸을 핥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천연덕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냐는 듯 참으로 당당했다. 한참 뒤에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시침 뚝 떼고 “할머니 어디 갔다 와?” 하니, “나비가 하도 시끄럽게 해서 저기 내다 버리고 왔다” 하신다. 동생들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지붕 위를 가리켰다. 지붕 위를 쳐다 본 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런, 저런 요물! 아주 멀리 내다버렸는데!”하시고는 당신이 졌다는 듯 꾸부정한 허리를 매만지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비’는 할머니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역시 고양이는 남다른 데가 있구나, 무서운 존재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무렵 하필이면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키도 아버지와 함께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그들보다 먼저 고양이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하루키는 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는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엿본다. 처음에는 둘 다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버지는 이내 감탄하고 마지막에는 다소 안도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된다. 하루키는 이 일화와 아버지의 표정에서 아버지의 과거, 그가 살아온 생애를 더듬는다. 아버지는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남이 아니었던 그는 그 옛날 형편이 어렵던 시절, 입 하나라도 줄이고자 하는 마음에 남의 집에 양자로 갔다가 파양되어 돌아온 경험이 있다. 하루키는 버려졌으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안도하는 아버지 얼굴에서 이런 아버지의 삶을 유추해낸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불단 앞에서 오래도록 경을 외운다. 어째서일까. 수수께끼 같은 이 행동 또한 아버지의 삶과 관계가 있다. 승려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용히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전쟁터에 끌려가 참혹한 경험을 한다. 그때 죽은 동료들을 위해 불단 앞에서 오래도록 경을 외우는 아버지를 알게 되기까지 하루키에게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속했던 부대를 후쿠치야마 보병 제 20연대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군 이력을 자세히 조사하기까지, 그렇게 하고자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버지가 속했다고 생각했던 보병 제20연대는 난징 함락 당시 가장 먼저 공격한 것으로 이름을 날린 부대였고, 이 부대의 행동에는 유난히 피비린내 나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이 부대의 일원으로 난장 공략전에 참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오래도록 품었던 탓에 그의 종군 기록을 조사해보려는 결심을 좀처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양이를 버리러 간 기억, 돌아와 안도하는 표정, 불단 앞에서 매일 아침 불경을 외우던 아버지의 모습…….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 하루키는 아버지의 중요한 상처 두 가지, 버림받은 기억과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리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아버지와 성격이 달랐던 하루키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불화하고, 이십 년이 넘도록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지경까지 간다.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어렵사리 대화를 다시 나누게 된 것은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 아버지의 나이 아흔 살, 하루키가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던,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쪽)


이 작은 책은 나에게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십 년 이상 대화하지 않은 아버지, 그가 죽기 직전에야 화해한 아들……. 내게도 이십 년 이상 대화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아버지가 있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루키처럼 대화를 나누며 화해할 생각도 들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그럼에도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뭐가 어찌되었던,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것 같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좋은 아버지는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가정에 알맞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하루키가 아버지를 추억하듯이 내게도 아버지와 얽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자전거를 가르쳐 주고, 내 인생 첫 자전거를 사준 사람도, 기타가 갖고 싶다는 말에 고등학생 때 선뜻 통기타를 선물한 사람도, 대학 입학 기념으로 모토로라 타키온을 사온 사람도 모두 아버지였다.

책장을 넘기다 작은 그림 하나에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나란히 있는 이 그림.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 모습 같기도 하고, 나와 내 아버지 모습 같기도 하다. 피를 나눈 사이이지만 언젠가는 서로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존재들. 때로는 불화하기도 하는 존재들. 하루키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그 나이에 내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아버지와의 화해가 과연 가능할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은 책은 아버지, 그리고 그를 낳은 할머니와 고양이에 얽힌 이런저런 상념을 깊은 밤에 불러일으킨다. 하루키가 아버지의 사소한 몸짓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상처나 아픔을 헤아렸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계기가 될 일이 과연 있을까. 내 아버지의 인생이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지금 이렇게 나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를 곰곰 생각해 본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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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24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를 좋아해서 늘 읽곤 하지만 이 리뷰는 특히 좋네요. 이 책이 얼마나 얇은지 이미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이런 감상이 끌어올려지다니... 이 책이 더 궁금해지고요.
그런 한편 아버지란 존재는 대체 어떤걸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분명 나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오롯이 사랑할 수만은 없는 그런 감정에 대해서요.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버지랑 친한 사이이고 친구들이 그런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느냐 하면 거기에는 그렇다는 답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보다는 인간적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을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0-11-24 11:3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정말 얇아요. 작고 ㅎㅎ 그런데 후기에 보면 하루키가 이 책은 단독으로 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게 좀 이해가 가요. 다른 글들하고 섞어서 엮어 내기 좀 뭐한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하루키의 그 심정도요...

전 가끔 다락방 님 글 읽다 보면 아버지랑 사이가 참 좋아 보여서 부럽기도 하고, 저런 감정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는데요. 그런 다락방 님에게도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요. ㅎㅎ 아버지에게 좀 복잡한 심정이 있는 사람은 이 책에서 느끼는 게 남다를 것 같아요.

이 책은 다 읽고 값 좋을 때 팔아야지 했는데, 왠지 갖고 있을 거 같습니다.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1-2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리뷰 & 불평 들었던것 같은데 잠자냥님 리뷰 읽으니 이 책이 새롭게 보이네요. 고양이에 대한 추억도 그렇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그렇구요.마음이 촉촉해지면서도 말랑해지는 그런 리뷰에요. 무엇보다 저의 눈길을 끈 건 이 문장.

그 무렵 하필이면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무서워 피해다니는 소녀는 그 무렵 이미 <검은 고양이>를 읽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잠자냥님이 된 것이죠^^

잠자냥 2020-11-24 11:54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에 대한 불평을 보면 대부분 책값에 비해 책이 얇다! 장삿속이 너무 심히다! 인데.... 저도 책을 읽기 전엔 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후기 보면 하루키가 이 글은 단독으로 냈으면 좋겠다고 밝힌 부분이 있어요. 글을 읽고 나면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쯤으로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ㅎㅎㅎ <검은 고양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제가 그래서 그 작품 때문에 그 시절부터 서른 넘기까지 고양이를 무서워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세 마리 집사이지만... 냥이들, 무섭기는커녕 그 하찮은 이빨만큼 하찮은 것들 ㅋㅋㅋㅋ 이젠 귀여워 죽겠어요. 인생이란 참 놀라운 반전 ㅎㅎㅎㅎㅎ
 
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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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에 이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사진을 인화하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어느 날은 문득,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앨범을 뒤적이면서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졌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외장하드 같은 곳에 담긴 사진들은 기계가 바뀔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서 사진을 간추려 인화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혼란》은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것도 어느 여성의 한평생이 담긴 낡은 사진첩. 이제는 노인이 된 여성이 자신의 지나간 시절을 담은 사진첩을 꺼내 들여다보며 옛일을 떠올린다. 그 추억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즐거운 순간도 분명 있지만 못마땅하고 고통스럽고 그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지금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여성의 이름은 ‘넬’- 오랜 파트너인 ‘티그’와 아침에 눈을 떠 식탁에 마주한다. 이 노년 커플은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듯 서로에게 무심하면서도 매우 익숙하다.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이들의 일상이 그려지면서 (<나쁜 소식>) 《도덕적 혼란》은 시작한다.

첫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조금 낯설었다. 내가 이제까지 접한 애드우드의 작품들은 대부분 장편이었고 그것도 주로 《시녀이야기》처럼 SF의 외피를 둘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레이스》처럼 조금 먼 시대의 이야기이거나 했다. 그런데 동시대의 늙은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이라니, 게다가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어느 평범한 아침의 모습이라니, 이건 단편인가? 아니면 장편의 시작부분인가 그조차도 불분명하다.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한다. 두 번째 작품인 <요리와 접대의 기술〉에서는 느닷없이 세월을 훌쩍 건너 열한 살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녀의 이름은 ‘넬’- 그제야 의문이 조금 풀린다. 앞선 이야기의 노년의 넬과 소녀는 동일인물이다. 《도덕적 혼란》은 바로 이 ‘넬’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소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 중요한 장면을 포착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요리와 접대의 기술>의 소녀 넬은 중년의 나이에 노산을 앞둔 어머니와 외딴 시골집에 단 둘이 남겨져 있다.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출산이 임박한 어머니를 돕는답시고 이 어린 소녀가 태어날 동생에게 입힐 옷을 뜨개질 한다. 벅찬 나이임에도 집안일을 거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소녀는 이 모든 일을 자진해서 즐거이 하고 있을까? 소녀는 왠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출산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대체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저 궁금하기만 하다. 태어난 동생은 예민하기 짝이 없어서 늘 울어대기 일쑤이고, 아이를 달래는 일도 넬의 몫이다. 어머니는 산후우울증인지 아이 돌보는 일도 시들하다. 아니, 다른 집안일도 벅차 보인다. 넬은 여느 아이들처럼 나가서 놀고 싶지만 동생을 돌봐야 한다. 그러다가 자기의 이런 처지에 참다못해 폭발한다. “내가 왜 해야 해요? 내 아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낳은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낳으셨잖아요.” (<요리와 접대의 기술>, 49쪽)

대체 이 중요한 때 아버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이 어린 소녀에게 아이 돌보는 일과 집안일이 떠맡겨 진 것일까 불편한 심기가 일면서 넬에게 자못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울하고 그저 시들시들한 넬의 어머니 모습도 마음이 쓰인다. 게다가 넬의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다루기도 몹시 까다롭다. 열 살이 넘는 나이차이와 극명한 성격차이를 보이는 이 두 자매의 미묘한 갈등은 왠지 평생 이어질 것만 같다.(<머리 없는 기수>), 조금 더 자라 수험생이 된 넬,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생겼고 영문학에 관심이 싹튼다. 선생님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으로 문학 작품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다. 수학처럼 똑 떨어지지 않는 문학이란 과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는 남자 친구에게 여러 차례 문학을 가르쳐주는 넬. 그런데 서로 다른 관점 때문에, 또는 똑똑한 체하는 넬이 못마땅한 남자 친구의 열등감 때문에 두 사람은 크게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나의 전 공작 부인>). 그리고 이즈음 넬은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주어진 길이 다르다는 것도 깨닫는다. 성차별을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남학생들은 의사, 변호사, 치과 의사, 회계사, 엔지니어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우리 여학생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진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혼을 하거나 노처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적이 좋다면 이 혼란스러운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어느 정도 미룰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전 공작부인>, 109쪽)


넬은 결혼하느니 영문학을 전공하는 길을 택하고, 대학을 졸업해 프리랜서 편집자이자 단기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전문직 여성이 된다(<다른 날>). 그러나 1960년대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성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시대이다. 넬은 다른 여성보다 많이 배웠는데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안정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늘 주변인으로 맴돈다. 그런 데다가 급기야 ‘티그’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디가 매력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주제에 유부남이다. 넬보다 나이도 훨씬 많다. 그런 주제에 아내 ‘오나’와 이혼하지 않는다. 도망치듯 시골에 집을 얻어서는 주말마다 아들 둘을 불러서 캠프 여행이라도 온 듯이 지낸다(<도덕적 혼란>, <흰 말>). 그럴 때 넬은 처음엔 자리를 비워주다가 나중에는 베이비시터처럼 ‘티그’와 ‘오나’ 사이의 아이들을 돌본다. 사실 넬은 작가인 오나의 편집자로 일하다, 오나의 주선으로 티그를 알게 됐다.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던 오나가 의도적으로 티그에게 넬을 소개했던 것이다. 뒤늦게야 오나가 원했던 게 ‘가정교사’였음을 깨닫는 넬.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게 지내던 그들에게도 노년이 찾아오고 마침내 오나는 넬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온다(<혼령들>). 이때 나는 티그와 오나 이 두 부부에게 치가 떨릴 만큼 진저리가 쳐졌는데(특히 티그), 넬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린 시절처럼 동생 돌보기와 같이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주어졌을 때 “내가 왜 해야 해요?” 반문하는 넬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세월은 넬의 그런 당당함을 앗아가 버렸다. 이런저런 것을 모두 헤아린 다음 결국 넬 자신에게 가장 좋으리라 여겨지는 선택을 한 것이겠지만, 오랜 세월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보니 스스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더욱이 티그와 함께 살면서 넬과 어머니 사이는 더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결혼하지 않은 상대와 함께 사는 것을, 그것도 아내가 있는 남자와 동거하는 것을 어머니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넬의 이 인생이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문학을 선택한 일? 티그를 선택한 일? 티그와 함께 농장에서 살게 된 일? 티그를 고른 일만큼은 분명 나쁜 선택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이런저런 불행과 고통과 ‘도덕적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 언제나 좋은 선택만 있을 수는 없다.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선택이 얼마나 많은가. 그로 인한 결과도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넬은 그렇게 한다. 자기의 선택이 빚어내는 온갖 결과들을 스스로 감당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늙어간다. 넬 뿐만이 아니라, 티그도 넬의 동생도, 넬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늙어간다(<래브라도의 대실패>, <실험실의 소년들>). 생의 끝에 놓인 넬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에서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진다. 모두가 그렇게 늙어갈 테니까. 노년의 커플이야기로 시작해, 황혼기에 접어든 부부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도덕적 혼란》은 이렇게 한 여성, 아니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그리면서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평생 붉게 타오르는 유화와 같은 작품을 썼던 작가가 노년에 이르러 남긴 단 한 편의 수채화 같은 작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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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18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읽어보려고요. 원래 읽으려했지만 ㅎㅎ 잠자냐님 리뷰 읽으니 새로운 세계네요. 새로운 우주가 열리려고 해요!

잠자냥 2020-11-18 21:01   좋아요 0 | URL
넵넵 읽어 보세요~

비연 2020-11-1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야겠네요 ^^

잠자냥 2020-11-18 21:01   좋아요 0 | URL
읽으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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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절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다. <내가 버린 여자>라니. 제목 자체도 문제가 많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예상 가능하다.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여자를 뻥 차버리는 나쁜 놈 관점에서 쓰인 소설이겠지. 우리나라 70~80년대 호스티스 문학이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난하고 순진한 여자를 못된 놈이 등쳐먹고는 나 몰라라 ‘버리고’ 달아나는 그런 문학이나 영화(‘버린다’는 표현도 불쾌하다). 그런데 이렇게 삼류 멜로, 에로(?) 영화나 문학이 상상되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순전히 작가가 ‘엔도 슈사큐’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 저자가 그 옛날 유명했던(?) 나상만(이 이름을 아는 사람, 연식 나온다)이었다면, 그래서 그 저자가 이런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더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이다. 물론 그의 작품임에도 내용이 예상 가능하다. 어떤 못된 놈이 여자를 사귀면서 단물 다 빨아먹고 차버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너무나 성스러운 인물이었던지라 쉽사리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마음속에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그래서 훗날 후회하는 심정으로 그 ‘버린’ 여자를 회고하는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 얼마쯤은 이런 예상을 하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은 들어맞는다. 작품 초반부터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 작품은 ‘나의 수기’와 ‘손목의 반점’이라는 두 개의 제목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나의 수기’는 주인공인 ‘나’, 즉 ‘요시오카’ 관점으로 서술된다. ‘나’는 전후(戰後) 일본의 가난한 대학생이다. 소설 첫 장은 ‘나’와 함께 생활하는 친구 두 사람의 가난하고  비루한 일상, 너무나 더럽기 짝이 없는 하숙 생활을 묘사하는데 엔도 슈사쿠가 직접 그런 생활을 해봤는지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서 구토가 날 듯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 두 남학생은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늘 굶주려있다. 실제 배고픔과 성욕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가난하니까 연애를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끓어오르는 성욕을 채울 길 없고. 이 두 남자는 돈도 벌고, 여자와 연애도 하고 싶다고 늘 노래를 부른다.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날 우연히 삼류 잡지를 살펴보던 중 잡지 독자란에 올라온 어떤 여성이 보낸 글을 읽게 된다. 여자는 참 순진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로부터 답장을 받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자기 주소를 남겼다. 될 대로 되라, 아무나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나’는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렇게 해서 나, 그러니까 ‘요시오카’는 드디어 그 여자를 만나게 된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이 여자를 저렴한 가격으로 ‘해치울’ 생각밖에 없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에게 욕지기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삼류 잡지 독자 투고란에 글을 보내는, 그것도 맞춤법도 엉망진창인 여자가 헤겔과 마르크스 운운하는 대학생인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리가 없다. 실제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그 여자, ‘미츠’를 보고는 크게 실망한다. 못생겨도 저렇게 못생겼을 수가. 게다가 비누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여공인지라 차림새도 형편없다. 그럼에도 요시오카는 소기의 목적. 그러니까 여자와 하룻밤 섹스하려는 그 목적을 위해서 그 모든 못마땅함을 꾹 참는다. 술을 이용한 고전적인 나쁜 수법을 써서 미츠를 여관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미츠의 강한 거부와 함께 어떤 점 때문에 결국 자신의 동물적 욕망을 이루지는 못하고 터덜터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두 번째 만남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기어이 이루고 만다.

‘여자와 자고 싶다’는 그 목적을 이루고자 요시오카는 미츠에게 온갖 떼를 쓰고 심지어 강요와 협박을 하는데, 거기에 꿈쩍도 않던 미츠가 결국 마음을 연 까닭은 조금 뜻밖이다. 요시오카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왜소한 데다가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다. 그 모습을 본 미츠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연민이 스쳐지나가고, 바로 그 순간을 요시오카는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몸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연애 상대로 보지도 않으며, 값싼 동정만 한다고, 미츠 너마저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고, 그래서 나와 함께 자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라고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짓고는 미츠의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미츠는 가여운 마음에 자기 몸을 허락한다.

남루한 여관에서 치르는 사랑 없는(요시오카는 미츠를 1%도 사랑하지 않는다) 섹스는 허무하기만 하다. 요시오카는 그런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자기에게 화가 나고, 아무리 욕망 때문이라도 다시는 이런 섹스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여관을 나온다. 그것도 모자라 뒤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미츠에게 폭언을 퍼붓고 떠나버린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놀란 눈으로 요시오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미츠. 미츠는 그 뒤로 요시오카에게 연락해 보려고 애를 쓰고 그의 하숙집도 물어물어 찾아가 보지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고 그 짧은 인연은 일단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후 재건 시기였던지라 쉽사리 일자리를 얻은 요시오카는 반드시 출세하리라는 꿈을 품고 사회에서 첫 출발을 야심차게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끔 미츠가 떠오른다. 남루한 옛 거리를 지나거나, 둘이 몸을 섞었던 그 허름한 여관 근처를 지날 즈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못생기고 촌스러운 미츠가 생각난다. 왜일까?

‘손목의 반점’에서는 미츠의 삶이 작가의 눈으로 그려진다. 미츠가 요시오카처럼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조리 있게 해나갈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방식일 것이다. 미츠는 요시오카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기에 대학생인 요시오카를 동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서 그 별것도 아닌 놈을 그토록 헌신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바보 같은 여자, 미츠의 삶에는 늘 타인에 대한 고통이 크게 자리한다. 절대로 그런 여관에서 그렇게 남자와 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요시오카의 불쌍한 모습에 마음이 허물어져 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시오카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돈을 모아 마침내 원하던 가디건을 손에 넣을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도, 돈이 없어 쩔쩔매는 누군가에게 결국 그 돈을 모두 줘버리고 만다.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107쪽) 생각하면서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자기 자신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가난한 여공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아서 미츠의 삶은 자꾸만  밑바닥으로 떨어져 간다. 그러다가 급기야 사형 선고 같은 소식을 접하고 만다. 무심코 넘겼던 ‘손목의 반점’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의사가 ‘한센병’이라는 말을 하고, 그것이 뭔지 몰라 간호사에게 물어본 미츠는 ‘나병’이라는 말에 휘청거리고 만다.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채 밑바닥 삶을 살다 끝내 한센병 환자가 되는 미츠- 이런 여주인공이라니, 정말 신파도 이보다 더한 신파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 작품 말미에서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미츠는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제는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는 이들, 누군가의 애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의 삶을 마주한다.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더더욱 그럴 일이 없는 자기 인생을 저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왠지 그들의 모습이, 고통이 마음에 아리도록 맺힌다. 그러는 사이에 요시오카는 출세도 하고, 자기가 꿈꾸던 매력적인 여자와 연애도 하는 등 나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가끔은 미츠의 소식을 뜻밖으로 듣게 되기도 하고, 문득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서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 떨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124쪽)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면서.

‘미츠’는 얼마 전 읽은 <바보>의 ‘가스통’과 똑닮은 인물이다. 자기 자신이 가진 것도 없고 더 내줄 것도 없으면서 결코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한다. 자기보다 못나고 약한 존재는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서도 고통과 아픔을 발견하면 쉬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끌어안는다. 그 포용력은 끝을 몰라 결국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왠지 어딘가에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미츠와 가스통 그 두 사람은 모두 예수의 현신과도 같다. 그래서 가스통의 주변 사람들이 그랬듯이 미츠의 주변 사람들도 쉽사리 그녀를 잊지 못한다. 동물적인 욕망, 출세와 성공, 안락한 삶, 부와 그것이 가져오는 평온한 일상 등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추구하면서,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 정도는 괜찮다고 자위하면서도 요시오카는 종종 미츠를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왠지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하고, 굳이 그런 줄 깨닫지 못해도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돌덩이 하나를 얹은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시오카와 비슷한 인생을 살 것이다. 요시오카는 아주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츠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으니까. 지금에 만족하는 요시오카는 그 소시민적인 삶에 안주하게 되겠지만 앞으로도 가끔은 미츠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요시오카처럼 인간의 마음에는 ‘미츠’ 또는 ‘가스통’ 같은 존재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런 희미한 마음에서 믿음이, 구원이 싹틀 수 있다고 엔도 슈사쿠는 믿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도 ‘미츠’나 ‘가스통’을 닮은 그 무엇인가가 툭툭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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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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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방랑자들><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난 후, 이 작가는 참 독특한 글쓰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이번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으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다음에는 어떤 소재와 주제, 어떤 독특한 형식으로 작품을 내놓을까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스릴러, 그것도 추리 소설형식을 띠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살인이 잇달아 일어난다. 어떤 죽음은 영문조차 알 수 없지만, 또 어떤 죽음은 유혈이 낭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공통점을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살해당한 이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과연 범인은 누구인지 추적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살인도 여러 차례이고, 범인도 쉽게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나간다. 매 장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것도 독특한데, 단지 블레이크의 시로 문을 여는 것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들이 즐겨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다. 그중에는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도 있다.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제는 폴란드 외딴 고원에서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육십대 여성 두셰이코 야니나와 그의 옛 제자 디오니시오스가 블레이크의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다.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도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 아니 작가는 하필이면 왜 윌리엄 블레이크 시를 계속 읊조리는 것일까? 더욱이 이 책 안에는 여러 개의 삽화가 들어있다. 뭔가 투박한 느낌이 판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판화 느낌이 나는 그림을 삽입한 까닭도 알고 보니 윌리엄 블레이크와 관련이 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봤을 때는 크게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전통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뛰어난 탐정이나 수사관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살해당한 이들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데다가 주인공 노년 여성은 점성학에 빠져서 무슨 말만 하면 별자리 운운, 점성학을 들이대며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동물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사람이라, 동물과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장 연설을 종종 늘어놓는데, 그이의 장광설을 듣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추리 소설 읽는 게 아니었던가? 때때로 잠시 현타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재미는, 알고 보니 텍스트 밖에 있었다. 애초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를 내가 잘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한결 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자면 블레이크는 시인이자 급진적인 사상가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판화를 연상시키는 이 책 속 간결한 그림체는 결국 생계를 위해 판각사로 일했던 윌리엄 블레이크,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시를 동판화에 새기던 그의 삶과 겹치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한 각 장 도입부에 인용된 블레이크의 시도 결국은 두셰이코, 디오니시오스 등 이 작품의 소외된 이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작품에서 내내 윌리엄 블레이크를 불러온 까닭은 바로 그 반 문명, 생태주의적인 가치관을 이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으리라.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권려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게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39~340)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를 비롯해 이웃인 괴짜’, 중고 옷가게 점원 기쁜 소식등 두셰이코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모두 사회 주변부 인물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쓸모 있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눈으로 보자면 낙오자라고 낙인이 찍히고도 남을 이들이다. 그에 비해 살해당한 자들은 저마다 사회에서 모두 한자리씩 차지한 기득권층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옹호되고 정당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회의 주요 가치관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이상한,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두셰이코처럼 가진 것도 없고, 이제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노년 여성이 주장하는 말이라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실은 지금 누구나가 귀 기울여 마땅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히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관례라는 이름 아래,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장려되어 온 기존의 가치관들이 사회를, 자연과 동물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고, 더 나아가 그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성장과 반 성장, 문명과 반 문명, 인간과 자연(동물을 포함한)의 대결 구도를 통해 지금 세계가 나아가는 길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계속 그렇게 해도 온당한지 질문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

 

첫 번째로 살해당한 왕발은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꾼이다. 그는 목에 사슴 뼈가 걸려 질식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두셰이코는 동물들이 사냥꾼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인간을 향한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이의 이런 주장은 정신 나간 과격한 동물보호가가 지껄이는 헛소리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쩐지 정말 동물들이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기후 변화로 인해 동물들이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일 수도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복수를 시작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달리 보자면 동물, 자연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런 주장이 결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낯선 전개만큼이나 작품의 결말 또한 조금 충격적이다. 이렇게 끝나면 안될 것 같은, 어쩐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불편한 느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지구의 기득권층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래서 지구 자체가 정의롭지못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작품의 이런 결말은 차라리 온당한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죽은 목숨도 여럿 있고 범죄의 진상도 낱낱이 밝혀지지만 왠지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여전히 남는 느낌. 아마 그런 질문들을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세계에,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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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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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은 이제 더는 새롭지 않다. 영화나 문학에서 익숙하게 접해온 풍경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어디론가 뚝 떨어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나 또한 이런 설정으로 만들어진 책이나 영화를 보면 한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어디로 갈까? 하지만 왠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굳이 과거로 가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그 과거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라면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온다.

 

대부분의 나라는 과거에 신분제가 엄격히 존재했다. 조선시대 또한 엄연히 노비와 양반으로 나누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내가 어느 양반집 종 신분이 된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게다가 돌아가 보니, 그 양반집에 내 조상이 있다. 남자 조상은 양반집 자제인데, 여자 조상은 그 집 노비이다. 이런 설정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양반집 자제가 강제로 그 여종을 취할 것이며 그렇게 내 조상의 핏줄은 이어져서 오늘날의 내가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옳지 못한 일을 내가 현대에서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미 다 알고 있고,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이런 이야기가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에서 펼쳐진다.

 

배경은 물론 내 상상과는 다르다. 주인공 다나가 사는 세계는 노예제가 사라진 1976년의 미국이고, 그 다나가 어느 날 갑자기 시간여행을 하게 되는 곳은 노예제가 존재하는 1819년의 미국 남부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체 어떤 여행을 떠났기에 왼팔을 잃은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다나의 남편인 케빈이 폭행을 가한 당사자가 아닐까 의심받게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참 느닷없게도 다나는 한 세기를 넘고 5천 킬로미터를 지나 죽은 조상들을 만나고 온 것이다. 1819년의 루퍼스앨리스가 다나의 조상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여행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루퍼스, 그러니까 다나에게는 남자 조상에 속하는 그 아이에게 있다는 점이다. 처음 다나가 과거로 돌아갔을 때 소년 루퍼스는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 강물에 빠져죽을 위기에서 다나가 갑자기 나타나 루퍼스를 살려주고 그 인연으로 루퍼스의 집에서 노예이지만 조금 색다른 존재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흑인인 다나는 1976년에는 자유인이지만, 1819년에는 자유인이라는 신분증명서도, 누군가 자기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백인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도망 노예 취급을 받고, 그렇기에 루퍼스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때 다나는 루퍼스의 집에서 소녀 앨리스를 보게 된다. 루퍼스는 백인 농장주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앨리스는 그들이 소유한 노예이다. 다나가 태어나려면 앨리스와 루퍼스 사이에 성적 결합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과 노예 사이이자, 백인과 흑인이다. 이 둘 사이에 일어날 일은 독자는 물론 다나도 예상할 수 있다. 설마 루퍼스가 앨리스를 사랑할까, 설마 앨리스가 백인 주인인 루퍼스를 사랑할까. 그 시대는 이 작품에서도 언급하듯이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부끄러울 것은 없어도 흑인 여자를 사랑한다면 부끄러울 수 있는 시대’(236)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서 다나의 조상들이 태어나고 그 핏줄이 1976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다나는 한 번의 시간여행으로 내내 1819년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나? 여자 흑인 노예로 목숨을 부지하기 쉬울까 무척 걱정스러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주 위험에 처할 때면, 즉 다나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그 죽음의 공포는 다나를 1976년 그녀의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 그러니까 루퍼스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다나를 과거로 불러가고, 반대로 다나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1976년의 현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사이 시간은 점차 흐른다. 과거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 다나가 1819년에서 며칠, 몇 달을 머무르다 현재로 돌아와도 고작 몇 초, 또는 몇 시간, 하루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과거에 입은 육체적 상처는 현재로도 이어지기에 루퍼스 와일린, 즉 와일린 농장에서 다나가 채찍으로 맞거나 구타당하면 현재로 돌아와도 그 채찍자국이나 맞은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은 이런 설정을 통해 당연하게도 노예문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지적한다. 노예가 아닌 현대 여성이 과거로 돌아가 노예인 조상과 그 노예의 주인인 또 다른 조상을 만나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 취급을 받는다는 설정은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인종차별과 노예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젠더문제이다. 다나가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소년이었던 루퍼스는 어쩌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단지 피부가 하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루퍼스가 성장하면서도 흑인 노예에게 무고한 존재로 자랄 수 있을까? 혹시 흑인 노예인 앨리스를 사랑하는 마음에 자애로운 농장주가 되어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고 더 나아가 노예 탈출을 돕는 백인이 되는 걸까 상상해 볼 수도 있지만 실제 루퍼스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평범한 그 시대 백인 농장주가 되어간다. 아버지가 여자 노예를 여럿 강간했듯이 앨리스를 강간하는 점까지 똑 닮아가면서 말이다.


자기 아버지처럼 변해가는 루퍼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124)

 

다나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루퍼스를 교화할 수 없다. 앨리스를 향한 루퍼스의 집착-루퍼스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알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다나의 뿌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루퍼스와 앨리스가 성적으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다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러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루퍼스를 다나가 돕지 않는다면, 와일린 농장의 수많은 노예들은(특히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는 노예들은) 농장주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다나는 자신의 뿌리는 물론, 이 농장의 노예 가족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루퍼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계속 가담하거나 루퍼스가 앨리스를 강간하는 일도 묵인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제목이 <kindred>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족또는 친족이 이어지기 위해 한 남자의 파괴적인 행동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일은 용인되어도 괜찮은가?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동조하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다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다나가 루퍼스를 두 번째로 구하게 되는 순간은 앨리스에게 지옥이 열리는 순간이나 마찬가지이다. 루퍼스는 앨리스를 강간하려다 앨리스의 남편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때 다나가 나타나 이 청년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목숨을 건진 루퍼스는 앨리스의 남편은 다른 곳으로 팔아버린다. 루퍼스는 그 후 앨리스를 강제로 취하게 된다. 앨리스는 루퍼스가 끔찍하기만 하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아이들 때문에 앨리스는 달아나지도 죽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걸 알기 때문에 아이를 빌미로 루퍼스는 앨리스를 조종한다.

 

한편 루퍼스는 다나에게도 다른 방식으로 집착한다. 루퍼스에게 다나는 말이 통하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다. 다나를 강간하는 일만큼은 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나가 떠나지 못하도록 온갖 술수는 쓴다. 루퍼스는 자기 통제를 벗어나면 다나에게도 가차 없이 매질을 가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다나를 상처 입히거나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면 선물을 주곤 한다. 그러나 절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루퍼스가 앨리스나 다나를 대하는 태도는 많이 보아온 익숙한 모습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는 소유하고 강간하고 아이를 빌미로 떠나지 못하게 종용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구타하고 그러면서 잘 대해주는 척하고……. 다나의 모범적인 남편 케빈도 한계를 보인다. 다나를 향한 루퍼스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는 다나가 끔찍한 일을 당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고작 의심하는 일이 루퍼스가 강간하지는 않았을까이다. 노예가 아닌 오늘날의 여성들 중에서도 남편이나 연인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일은 너무나 많지 않은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도 똑같이 흑인 여성인 다나와 앨리스 두 사람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흑인이어서, 여성이어서 노예와 같은 처지에 놓인 여성의 삶을 극명하게 고발한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이 작품은 아주 성공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루퍼스를 살리는 일에 계속 애를 쓰는 다나의 선택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뿌리가 끊이지 않기 위해, 다른 흑인 가족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여성, 앨리스의 고통은 눈감아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개인의 역사가, 한 집안의 역사가 그렇게 이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가족이 해체되더라도, 자신의 뿌리가 뒤흔들리더라도 루퍼스라는 악의 씨앗을 잘라버리는 일을 시도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래서 앨리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되는 일이 일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아쉬움과 답답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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