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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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은 <권력과 영광>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책을 읽다 보면 첫 작품만으로도 홀딱 반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레이엄 그린이 바로 그랬다. <권력과 영광>은 무척 독특하다. 배경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로, 황량한 멕시코를 중심으로 그 장소보다 더 황량한 인물이 나온다. 이른바 ‘위스키 사제’라는 인물로 그는 위스키에 절어 사는 '타락한' 신부이다. 이 작품이 뿜어내는 독특한 매력에 반한 나는 그 뒤 <제3의 사나이>를 통해 그레이엄 그린을 다시 만났다.

<제3의 사나이>는 동명의 영화로 매우 유명하다. <제3의 사나이>에서는 ‘위스키 사제’와 견줄만한 또 하나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해리 라임’이라는 인물인데, 그 또한 ‘위스키 사제’ 못지않게 복잡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 또한 특유의 우수에 찬 황량함, 그러면서도 묘하게 낭만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굉장히 이질적이다. <권력과 영광>은 타락한 신부-그러나 그 타락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의 고뇌와 방황을 쫓는 순수문학에 가깝다면 <제3의 사나이>는 하나의 추리소설로, 장르 소설을 읽는 대중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문학성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 모음집인 <정원 아래서 외>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다른 두 장편을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단편집은 저 두 장편의 모든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장장 930페이지, 총 52편의 단편 가운데 어떤 작품들은 <권력과 영광>계열의 작품으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고뇌와 고통, 공포 또는 두려움을 담아 인간 실존의 문제를 그려냈다. 또 다른 한 축에는 <제3의 사나이>계열로, 스릴러 같은 재미와 반전을 담았으면서도 그 안에서 마찬가지로 인간 실존의 문제를 담고 있다. <정원 아래서 외 52편>을 읽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아, 이런 단편들을 쓰면서 <권력과 영광> 또는 <제3의 사나이> 같은 장편을 썼겠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권력과 영광> 및 <제3의 사나이>도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열린책들'과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전부이다. 좀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싹트는 시점에 바로 이 엄청난 단편집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단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올해 1월)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곧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꼬박 반년이 걸렸다. 한꺼번에 다 읽기는 뭐해서 하루에 두 편씩 읽기로 계획을 세웠다. 중간 중간 다른 책도 읽다보니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읽은 보람이 있다. 어떤 단편은 필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다리 저쪽’ ‘파괴자들’ ‘8월에는 저렴하다’ ‘남편 좀 빌려도 돼요?’ ‘정원 아래서’ 등이 먼저 떠오른다. 그레이엄 그린 자신은 ‘다리 저쪽’을 가장 잘 쓴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지는 않았던데 나는 사실 이 작품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의 52편의 단편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꿈속에서 꾸는 꿈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꿈은 몽환적이다. 모호하다.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도 때때로 앞뒤 연결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그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춘다. 꿈속의 인물들이 하는 행동에는 ‘왜?’라는 질문에 어떤 동기랄까, 그 인과를 좀처럼 뚜렷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 속 인물들이 그렇다. 그들은 경계가 모호하다. ‘신부’라는 고결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락의 상징인 ‘위스키’에 취해 사는 ‘위스키 사제’처럼(사실 이 사제에게는 숨겨놓은 딸이 있다. 이 딸은 어쩌면 그의 원죄이리라), 선악의 경계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에 행동의 동기도 애매하다. 때로는 그 자신의 정체성도 모호하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뚜렷하게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 ‘파괴자들’의 소년들은 이유 없이 마을 영감의 집을 부순다. 파괴적인 그 행동에는 딱히 꼬집어 정의 내릴만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소년들은 부수는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그 행동의 동기는 딱히 설명할 수 없어도, 계획만큼은 치밀하다. 소년들의 이런 파괴적인 행동에 영감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소년들은 그런 영감을 보며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저 재미로 그랬다고 하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집요하고, 어떤 물질적 이득을 바랐다고 볼 수도 없다.

여기 오기 전에는 다리를 건너면 인생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색과 태양 빛 그리고 – 내 생각으로는- 사랑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거라곤 밤새 내린 비로 웅덩이가 괸 널따란 진흙 길, 지저분한 개들, 침실에서 나는 냄새와 바퀴벌레뿐이었다. 사랑 비슷한 게 있다면 상업학교의 열려 있는 문 정도였다. 거기에선 예쁘장하게 생긴 혼혈 여자애들이 오전 내내 앉아서 타이핑 교육을 받았다. 타닥 타닥 타다닥. 아마 그 애들 또한 꿈을, 다리 저쪽 지역에서 일자리를 얻는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인생이 훨씬 더 호화롭고 세련되고 즐거우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그레이엄 그린, '다리 저쪽', <정원 아래서 외>,134쪽


<다리 저쪽>의 한 구절이다. 백만장자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볼품없는 잡종 개와 함께 멕시코 한 국경 지역 마을에 하릴없이 앉아 있다. 그는 아마도 유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달아나 숨어 지내는 신세인 것 같다. 이 멕시코 지역에서는 뇌물을 잔뜩 주면 신분을 숨기고 잠시나마 머물 수 있다. 그는 다리 저쪽,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숨어 지내는 이 지역보다는 좀 더 나아 보이는 다리 저쪽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마치 그곳이 자신이 떠나온, 실제 인생, 즉 화려하고 즐겁고 온갖 멋진 일들이 일어나는 진짜 삶이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그의 곁을 지키는 볼품없는 개 한 마리는 늘 그에게 발길로 걷어차인다. 그를 찾아왔던 형사들은 개가 불쌍해서인지, 또는 그가 다리 건너 저쪽 미국땅으로 오도록 유인하기 위함인지 그가 없는 사이, 개를 데리고 ‘다리 저쪽’으로 건너가 버린다. 전에 키우던 개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잡종이라면서 구박하던 그의 개, 그는 자신의 개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국경을 넘어 ‘다리 저쪽’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가 ‘다리 저쪽’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훨씬 더 호화롭고 세련된, 진짜 삶이 존재하는 그런 곳일까? 그는 툭하면 발로 걷어차던 그 개를 무사히 찾았을까?

이 작품에는 인생의 온갖 쓸쓸함과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리 저쪽 사람들은 이쪽을 동경하고, 또 이쪽에서는 다리 저쪽을 동경한다. 마치 서로 그곳에 진짜 삶이, 멋진 삶이 있으리라고 상상하면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멕시코와 미국, 완전히 다른 나라이지만 사실 그 마을들은 크게 차이가 없다. 그저 국경 지대의 낡고 쇠락한 마을일뿐이다. 어쩌면 인생이 그렇듯이 말이다. 또 다른 단편 ‘8월에는 저렴하다’에서도 이런 인생의 비애와 쓸쓸함은 고스란히 재현된다. 8월, 절정의 여름휴가 기간이 끝난 뒤에, 모든 것이 저렴해진 어느 휴가지에 한 노인과 남편을 집에 두고 홀로 여행을 온 중년의 여인. 그들이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은 예기치 않은, 아니 어쩌면 예상했던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8월에는 모든 것이 저렴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쓰레기도 치웠지만, 다 줍지는 못해서 바닷가에 굴러다니고 있는 바랜 쓰레기들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한없이 남루하다.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고, 또 자기가 그렇듯이 상대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때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마저 제대로 알지 못한다(‘남편 좀 빌려줄래요?). 그들은 그렇기에 사랑에 곧잘 실패하고, 부부관계를 비롯한 가족,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종교적 믿음마저도 온전히 갖출 수 없으며, 일에 실패하고, 단 한 순간의 욕망(일회성 만남 같은)이나 아주 작은 소망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달음질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모두 그렇지 않은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고, 그런 인물들이 살아가면서 빚어내는 일들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없이 슬프기도 하며, 때로는 악의로 가득 차기도 한다. 그런 인물들이 마치 주변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레이엄 그린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극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이미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과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우울증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절망의 결과물들이 바로 이 찬란한 작품들이다. 고통에서 빚어낸 결과물. 그렇기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진실’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작품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피츠제럴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헤밍웨이나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의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단, 그 모든 작품들을 꿈속에서 읽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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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7-07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다양한 독서 세계를 알려주시니
제 독서 시야가 넓어지려 하네요.^^

잠자냥 2017-07-07 10:56   좋아요 1 | URL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거의 소설에만 빠져 있는걸요. 암튼 감사합니다. ^^

nama 2017-07-07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영미소설시간에 읽은 <사건의 핵심>을 아직도 마음 속에 품고 있답니다. 그레이엄 그린 셰계에 일단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죠.^^

잠자냥 2017-07-07 14:17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이 그레이엄 그린의 마력에 빠지기를 바라며.. ^^

cyrus 2017-07-07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의 위로>라는 책에 그린이 했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글쓰기는 치료의 형태이다.” 그린은 언행일치를 보여준 훌륭한 작가였습니다. ^^

잠자냥 2017-07-07 15:2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정말로 그레이엄 그린에게 글쓰는 훌륭한 치유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린에게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글쓰기가 그렇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