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올해 우주 리뷰상에 응모할 작품으로 읽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할 이야기도 많고 좋았다. 그런데 중반쯤에 접어들면서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지더니 자꾸만 다른 의문이 고개를 치솟고, 더 읽어나가다 보니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졌다.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게 되는 동기는 두 가지가 있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글로 남겨 다른 이들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때, 또 다른 경우는 작품에 불만이 많아서 뭐라고 투덜거리고 싶을 때. 이 작품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후자에 속한다. 작품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뭐랄까 장점보다는 자꾸만 단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랄까. 처음에는 리뷰라는 게 꼭 장점만 써야 하는가 싶어서 내가 느낀 불만 그대로를 담아 우주 리뷰상에 응모할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그건 포기. 그러고 나서도 하고 싶은 몇 가지 말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이라는 한 남자의 일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반적인 통역사라면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을 법하나, 이 남자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게슈타포의 통역사가 된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유대인이 게슈타포의 통역사를 한다니.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의 통역사 역할을 하는 조선인 김첨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임무란 제 민족, 유대인을 팔아넘기는 일이 되기 쉽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 유대인으로 폴란드에서 태어나 나치 치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 때문에 히브리어와 폴란드어, 러시아어에 독일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 천재적 능력을 지니게 되고 그로 인해 게슈타포의 통역사로 살아가게 된다.
살아남고자 유대인 신분을 철저히 숨긴 그의 독일식 이름은 ‘디터’이다. 그러나 반전은 그가, 제 민족을 팔아넘기는 행위에 가담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는 데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못한) 그의 직속 상관 라인홀트 소령이 인도주의적 인물이기에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라인홀트가 적극적으로 디터를 도와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인홀트는 자신이 무척 아끼던 디터가 독일을 배신해 유대인을 살리는 데 몇 차례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아량을 베푼다. 그로 말미암아 디터가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가톨릭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라인홀트의 존재가 없었다면 통역사 다니엘은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 인물로서 이 작품은 끝을 맺었으리라.....
그러나 본격적인 이야기는 가톨릭 사제가 된 유대인 다니엘의 삶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유대인이 가톨릭 신부라니! 게다가 그는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유대 민족이 보기엔 게슈타포의 통역사 역할을 한 것도 1차 배신일 터인데,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배신일 것이다. 그렇기에 전후 이스라엘로 돌아가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애쓰는 다니엘에게 이스라엘 정부는 그를 전쟁 영웅으로 받아들여 (게슈타포의 통역관으로 유대인을 구한 일이 인정받는다), 귀화 시민권은 주되, 국적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종교 때문에 그 안의 유대인성을 인정하지 않아 국민으로 허락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곧 이스라엘 시민이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이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거야. 폴란드에 가든 독일에 가든 거기서 모두에게 나는 유대인이지만 오직 이스라엘 정부에게만 나는 유대인이 아닌 거라네. 내 증명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국적 미확인’” (p.114)
다니엘, 이 디아스포라적인 인물의 생을 지켜보노라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언어에 재능이 뛰어나,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게슈타포의 통역사요, 유대인임에도 유대교의 랍비가 아닌 가톨릭 사제로 살아가는 생이라니. 참으로 기구하구나. 그런데 여기서 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하는 지점들이 발생한다.
도대체 그는 왜 가톨릭 사제로서 왜 굳이 이스라엘로 가야만 했는가? 이것도 일종의 시온주의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물론 영국의 제국주의가 가장 큰 원흉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 그들만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시온주의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폴란드가 조국인 다니엘은, 가톨릭 사제로 살아가면서도 왜 굳이 이스라엘로 간 것인가? 물론 다니엘의 이스라엘 행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영토를 유대인만의 땅으로 보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며 민족은 물론 종교적인 화해를 시도한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보는 유대 민족주의의 폐쇄성에 대한 도전이자 유대인, 아랍인, 기독교인이 역사는 물론·종교적 갈등을 넘어 서로 포용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른 행위이기도 하다. 종교와 민족의 경계를 허문 그야말로 화해와 공존의 통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가능한 것은 그가 아랍인에 비해, 팔레스타인 민족에 비해, 가진 자, 강자의 위치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위와 같은 화해와 공존의 실천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했을까? 나 같은 비종교인의 눈에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종교적인 오만으로 보인다. 굳이 무슬림들의 땅에 기어 들어가 가톨릭이든 기독교이든 자신들의 종교를 설파하는 그들의 행위가 나는 평소에도 종교적 오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미사를 드린다. 이 또한 언어적 시온주의가 아닌가? 물론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 전통의 복원 및 이스라엘 현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 는 있다. 더욱이 그의 이런 행위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눈에는 히브리어로 이방인의 종교인 가톨릭 미사를 보다니! 오히려 시온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도발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히브리어는 갈라진 유대교와 기독교를 연결 지으려는 또 다른 통역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로 가서 히브리어로 가톨릭 미사를....? 이것도 결국 또 다른 오만이 아닌가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그 언어 천재가 아랍 땅에서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점은 내 의구심에 기름을 붓는다. 그에게 감화받은 수녀 힐다가 말하길(그녀는 독일인으로 그의 민족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를 참회하기 위해 다니엘 곁에서 수녀로 살아간다), 다니엘 신부님은 폴란드어, 독일어, 히브리어를 잘하고, 다른 언어는 잘못한다고 하면서도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루마니어 등을 사용하며 이스라엘에 온 견학단을 데리고 다닌다. 체코인, 불가리아인, 아랍인 등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평생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언어 천재가 그 땅에 살면서 히브리어로 미사들 드리며 현지 이스라엘인들과의 소통에는 진심으로 애를 쓰면서 왜 그 땅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 아랍인들의 언어는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이제껏 그를 살려온 언어들- 그렇다 다니엘에게 언어는 살기 위한 도구, 실존을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과 달리 아랍어는 생존에 꼭 필요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인가? 이는 아립인들의 땅에서는 굳이 아랍어를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기 수월하다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또 다른 오만의 증거 아닐까. 다니엘이 살아간 시기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죽 이어지고 있는 아랍-팔레스타인 현실에 대한 방관이나 마찬가지까 아닐까. 다니엘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외치지만, 그의 신, 그가 외치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향하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인, 그들의 고통에는 다니엘은 물론 그가 믿고 따르는 신도, 그리고 이 작품을 쓴 작가도 눈을 돌린다.
그렇다. 다니엘, 디터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의 뒤에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있는 것을. 그녀는 실제로 이 작품 속에서도 직접 등장해 말한다. 이 작품을 “누구에게 필요할까 싶은 자유에 관해서”(p.167) 쓰노라 고심 중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자유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속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대상에 당연히 그들도 포함되지 않느냐고? 글쎄... 독자인 내가 읽기엔 유대인을 향한 핍박과 고난에 비하면 작가의 아랍인들을 향한 연민은 거의 느낄 수조차 없으니 무슨 일일까. 심지어 그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분노해 러시아를 떠나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살아가고 있는 행동파 작가가 아닌가. 그런데 왜 자기의 민족인 유대인에게는 이토록 한없는 연민만을 보내는 것일까.
루카치는 소설을 ‘총체성(Totality)을 상실한 시대의 서사시’로 정의하며 훌륭한 소설이란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도 개인과 사회적·역사적 현실 간의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관계를 복원해 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명백하게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억압하는 현실은 군사, 영토, 자본, 생존권이 얽힌 철저히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적 모순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 참혹한 현실을 다니엘 신부의,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식의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박애주의로 해결하려 한다. 그로 인해 이토록 참혹한 현실을 낭만화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역사적 토대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없이 그저 관념적인 도덕론으로 가해와 피해의 객관적 현실을 흐리는 부르주아적 기만이 아닐까. 게다가 역사적·사회적 구조를 총체적으로 직시하지도 못하고, 작가의 출신이 유대인이라는 주관적 한계와 수많은 인물이 주고받은 편지의 나열과 인터뷰 등등 파편화된 서사 형식, 종교적 관념주의 뒤로 도피함으로써 소설이 도달해야 할 진실의 총체성을 획득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만다.
10월 8일 오늘은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날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유력 후보는 아니지만 해마다 이 상의 후보자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이다, 나는 그녀의 수상을 점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오늘 수상자가 되어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하게 된다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저 만행에 대해 한소리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추상적인 말들-사랑과 용서 화해 운운하면서 자기의 수상 소감을 밝힐 가능성이 더 크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 피해자일까? 더는 아니다. 가해자의 위치에서 말하는 사랑괴 용서, 화해는 공허한 기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