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라는 한마디. 내가 너를,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이 세계에 넘치도록 부유하는 저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할까. 내가 원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응답을 받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고통이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리틀 라이프> 1권을 읽고 나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혐오했다. 그 순간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온갖 폭력과 착취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과연 기쁨을 주는 단어인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 또한 하나의 이기적 욕망의 발현일 뿐이지 않을까. 사랑이 그토록 끔찍하게 다가온 순간도 없었다.
<리틀 라이프>는 출간된 지 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표지를 보았을 때 남자의 기묘한 표정 때문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중일까? 고통이든 쾌락이든 어떤 쪽으로든 극한의 체험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책 표지가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의미로든 그의 사연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달자 님이 읽고, 달자 님의 평을 본 은오가 읽고 은오가 읽은 후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저 남자의 표정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기억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고통이든 쾌락이든 그의 사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표지를 다시 보고 또 봤다. 아, 그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단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닌 육체,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지경이구나. 그 남자의 이름은 ‘주드’- 토머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승산 없는 것들의 성자”이자, 낙심한 자들,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 절망에 빠져버린 이들의 성자인 ‘주드’- <리틀 라이프>는 이 주드라는 청년의 절망스러운 생을 훑는다. 그의 사연을 좇다보면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고도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 무엇일지 가늠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어린 시절이 사라진 사람, 도리어 그 시절이 너무나 참혹해서 현재의 고통의 기반이 되어버린 사람. 안전에 대한 광적인 집착, 주위 사람을 통해 학습하듯이 유년 시절을 새로 창조해 내려고 애쓰는 모습, 타인과의 신체 접촉에 극도로 공포를 느끼는 모습, 자기 몸을 드러내기를 몹시도 꺼리는 모습 등등에서 그가 겪은 일들을 유추할 수 있다.
사랑한다
그리고 루크 ‘수사’라는 단어를 통해 주드가 어린 시절 학대를, 그것도 여러 명의 수사들에게 지속적으로 구타와 강간 등의 참혹한 일을 겪었음을 곧 알게 된다. 그러나 <리틀 라이프>는 그 예상의 정도를 넘어선다. 수사들의 지속적인 강간이나 구타도 역겹고 지켜보기 힘겨운데, 루크와 수도원을 탈출해 주드가 겪는 일들은 일은 차라리 지옥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사랑한다’는 말 아래 이루어진다. 일찍이 버림받아 기댈 곳도 없고 어떤 가치판단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부당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 아이는 왜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때 다가오는 선한 미소의 그 사람은 진짜 천사일까. 작품 밖에서 지켜보는 눈은 루크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더 지독한 악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주드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리고 그가 그토록 어린 아이라면 루크의 사랑이 세상의 전부일 것이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는 절박함이 당연히 싹틀 것이다. 그 때문에 더 없는 고통을 겪는다하더라도 저 사람 만큼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을 것이다..... 루크는 주드를 “사랑한다” 말한다.
사랑해
첫 번째 책을 덮고는 사랑이 혐오스러워진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일어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실재함을 알기 때문에 더 그 사랑이 역겹다. 그런데 사랑은 때로 완전히 다른 가능성을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윌럼과 주드, 그리고 맬컴, 제이비 이 네 사람은 이십 대 때부터 친구이다. 인종도 성정체성도 나고 자란 환경도, 계급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오랜 세월을 함께 한다. 그런 중 어떤 두 사람은 마침내 자기의 필생의 사랑이었을 그 사람을 조금 늦게 알아본다. 정상을 가장해야 해서 늘 피곤했던 주드는 더 이상 그 앞에서는 정상을 가장하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된다. 그들 각자의 필요 또는 욕망 때문에 이루어진 이 사랑은 상호의존적이다. “결코 성문화할 수 없는 결합에 대한 상호 간의 헌신에 의해 묶여 날마다 계속 함께” 있기를 선택한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2권 p.333) 그런 관계이기도 하다. 이 때의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해” 하고 말한다.
사랑한다
주드를 둘러싼 “사랑해”의 세계에는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 다 큰 성인을 선뜻 양자로 입양하는 해럴드와 줄리아가 있고, 늘 헌신적인 앤디가 있기도 하고 맬컴이나 리처드처럼 조금 떨어져서 묵묵히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제이비에 대한 마음은 나도 좀 복잡해서 이런 친구의 “사랑해”를 감히 윌럼이나 해럴드, 애너, 앤디, 맬컴, 리처드와 동일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또한 주드에게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은 루크 수사의 사랑한다와 무엇이 다를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주드를 사랑한다. 욕망, 필요 또는 헌신…. 사랑한다는 말 자체는 똑같다. 심지어 케일럽. 그 또한 어떤 형태로는 주드를 사랑했을 것이다. 주드 또한 케일럽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있을까. 절대 상처주지 않을 게 확실했던 사람들, 친절하다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살다가도 주드는 케일럽을 선택한다. 그가 나쁜 사람임을, 나쁜 냄새를 풍기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감수한다. 망가진 사람과 망가뜨리는 사람, 쓰레기 더미와 그 주위를 킁킁대는 자칼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택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도리어 “살짝 더 인간다워진 느낌”(p.472)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트레일러 박사와 윌럼을 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브리엘 신부와 앤디는? 루크 수사와 해럴드는? 첫 번째 집단에 존재하는 것들이 두 번째 집단에도 존재하나? 그렇다면 두 번째 집단은 어떻게 다른 길을 갔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p.202)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와 ‘당신을 많이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려고요‘ 사이에는 서로 다른 사랑의 세계가 존재”(프랑수아즈 사강, <길모퉁이 카페>, p.153)하듯이 똑같은 “사랑해”에도 서로 다른 사랑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해
이 책을 읽은 어떤 이들은 주드의 끝 모를 자기 파괴적 성향과 자기혐오를 징징거림 정도로 치부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기도 하다. 주드 같은 생을 살았는데 그렇게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견디고 버틴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이 선택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온전히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주드의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일어난다. ‘만약에 내가 그때 루크 수사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잡혀가지 않았다면, 케일럽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애너 말을 좀 더 들었더라면...’ 그는 계속한다. 비난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윌럼을 절대 만나지 못했더라면, 해럴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줄리아나 앤디나 맬컴이나 제이비나 리처드나 루시엔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만약‘들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좋은 ‘만약‘들도 마찬가지다.”(p.401)
주드는 생을 사랑해보려 애썼음에도, 그 자신에게 “사랑해”를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실패한다. 학대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루크의 또 다른 형태인 케일럽에게 자기를 내맡긴다. “경솔하게 자신을 맡긴 사람, 너무 큰 희망을 걸었던 사람, 자기에게 구해주길 바랐던 사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을 때도, 희망이 썩어 들어갔을 때도 그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다”(p.477)…. 이것을 단지 철부지의 징징거림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너무나 참혹한 인생이라 주드에게 잠깐 햇볕이 들고 행복한 순간이, 기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세월들이 끝난 후에는 그가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 같기도 하다. 그렇게 버틴 것만으로도 당신은 생의 의무를 다했노라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준다. 주드의 생에 찾아온 그 잠깐의 행복한 순간들도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토록 눈부신 보상 없이 그저 지루해도 안온한 생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보상의 기대어 이 덧없고 고통스러운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버티고 견딘다. 인생이란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으며… 그리고 그 위안거리에는 역시나 사람과 사랑이 가장 큰 크기로 존재한다. 윌럼이 말했듯이 “좋아하는 일과 살 곳,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2권 p.146)이 있다면 이 생 자체가 견뎌볼 만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기만의 “사랑해”를 찾아나서는 것이겠지..... 주드와 윌럼의 그 나이로 나도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다. 여전히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듣는다. 이 보잘것없는 생, 극도의 쾌락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이 생에서도 좋은 “만약”을 알아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