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윌리엄!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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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오, 윌리엄!>을 읽을 때 자연스레, 그러나 예기치 못하게 떠오른 사람이 있다. 전에 만나다 헤어진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을 헤어진 후로 생각한 적도 딱히 그리워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떠올랐다. 이 작품이 화자인 루시 바턴이 헤어진 전 남편 윌리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거의 그랬을 것이다. 단지 루시는 윌리엄과 여전히 친구처럼 만나고 있다는 점이 나와는 다르다. 나는 헤어진 연인이나 배우자와 친구처럼 만나면서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국인이 아니고 이 보수적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탓도 있겠지만 상상을 해봐서 내가 미국인이라고 해도, 설사 프랑스인이라 해도 나라면 헤어진 연인이나 배우자를 다시 만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싶지 않을 것이며, 소식조차 알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좋게 헤어졌든 나쁘게 헤어졌든 그건 상관없다.

물론 루시와 윌리엄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이제는 장성했으나 각자 부모에 관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가 헤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도 아빠, 또는 엄마와 만날 수 없다고 부모 멋대로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루시처럼 윌리엄을 친구로 만나지는 않을 것 같다. 왜일까.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 헤어짐의 이유도 제각각이다. 지금의 애인을 만나기 전에 사귀던 그 사람은 나와는 6여 년을 같이 했고,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기에 이별을 통고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오, 윌리엄>의 윌리엄 같은 사람이었달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말들에 그때 그 사람은 내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기다릴 것이라고, 친구처럼 가끔이라도 보면 안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의 첫 번째 말은 불가능하다고,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없다고 네 마음도 곧 변할 것이니 기다리지 말라고, 그리고 만일 지금의 그 사람과 헤어지더라도 너한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친구처럼 보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내가 친구라고 해도 너는 친구가 아니잖아? 그때 그 사람은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윌리엄과 헤어진 후 데이비드를 만난 루시처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D. 정희진의 공부 7월호를 듣노라니 ‘사랑’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사랑은 철저히 제도적인 관계라고, 어떤 제도로 묶이지 않는 사랑이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3개월 정도일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기간이 지나고도 사랑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제도로 그 사랑을 존속하려고 한다고, 그것이 결혼이라고. 그런 의미로 본다면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라든가 사랑의 또 다른 시작이 아닌 사랑의 종말이나 마찬가지라는 그런 말들……. 지금의 애인과는 제도로 묶이지 않은 채 10여 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대단한 건가 싶으면서도 그렇게 굳이 제도로 묶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을 사랑을 왜 존속하려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들의 삶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제도로 묶지도 않았는데 그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정희진 선생님은 4가지(섹스, 돌봄, 돈, 지적인 충족) 이해(利害) 중 하나라도 충족되면 그 관계는 유지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바탕으로 우리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덧 세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어난 이 고양이들이 우리에겐 제도와도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양이들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가끔 심하게 싸우다가 헤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 저 녀석들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거짓일 것이다. 고양이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위태로운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라는 말에 서로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있었던 것만큼- 그리고 혹시 헤어지더라도 누군가 맡은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연락은 해주자는 말이 나왔던 적도 있었던 것만큼 우리에게 고양이는 루시와 윌리엄의 두 딸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루시는 윌리엄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그토록 오래 입고 다녔던 것일까. 윌리엄과 이별하고 만난 데이비드- 그가 루시에게는 더 잘 어울리는 옷이었는데. 루시는 데이비드에 비해 키도 크고 잘생긴, 어디에서나 ‘집’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을 갖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그 권위의 소유자,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기중심적이고 그러면서도 제 자신은 그렇지 않은 듯이 루시에게 “당신은 너무 자기몰두적”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 남자, 윌리엄을 만나 자식을 낳고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권위와 안전함에 기대어 친구처럼 지내면서 윌리엄의 온갖 부탁(때로는 좀 무례해 보이기도 하는)을 들어주고 함께 행동해준다.

그렇지만 그 데이비드- 요거트에 산딸기를 올려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한 그 소박한 데이비드-키도 작고 살집도 있는, 그래서 윌리엄에 비하면 외모로는 형편없을 그 데이비드와 함께 할 때 루시는 집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어린 시절의 상처나 결핍, 트라우마로 인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자기 집을 소유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서로에게서 ‘집’을 발견한다. 같은 상처가 있음을, 비슷한 결핍이 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때로 어떤 공감의 말 한마디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삶이 다해 데이비드가 먼저 루시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계속 삶을 같이 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내 연인은 루시와 데이비드처럼 어린 시절의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 비슷한 결핍이나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야기한다. 그 비슷한 결핍의 감정이, 상처가 우리를 좀 더 단단하게 묶어준다고. 우리에게는 루시의 딸들 같은 여섯 고양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보다는 비슷한 결핍과 상처의 기억이 서로를 서로에게 더 붙어있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K. 대학시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집에서 잘 자란 사람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좋은 집이란 무슨 의미일까, 잘 자란 사람이라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아, 내가 연기를 참 잘 했구나, 스스로 감탄했던 적이 있다. 살면서 내 집안이 좋은 집이라고(10대와 20대 때는 더더욱) 생각한 적이 없다. 10대 시절에는 더 그랬다. 그 후배가 말한 ‘좋은 집’이 부유한 가정을 뜻한다면 그건 정말 그릇된 판단이고, ‘좋은 집’이 ‘화목한 가정’을 의미한다면 그 또한 어긋난 판단이다. 루시만큼은 아니지만 가난은 나에게는 늘 결핍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일상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이에게는 이 세상의 사랑이나 결혼은 그 감정이 주는 따뜻함과 안온함을 먼저 일깨우기보다는 환멸을 먼저 심어준다.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스스로 맹세하던 아이는 세상에서 냉소와 환멸을 먼저 발견한다. 그렇게 자란 내게 ‘좋은 집에서 잘 자란 사람’같다는 말은 얼마나 우습고 쓸쓸한 농담인가. 한 살짜리 딸을 놓고 다른 삶을 꿈꾸며 집을 나가 마을을 떠나버린 캐서린- 그녀의 삶에 그토록 지독한 비밀이 있을 줄은 루시도 윌리엄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루시는 캐서린과 윌리엄을 보면서 투명 인간 같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 부유하고 세련된 공간에 앉아 있는 게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축된다. 한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루시와 윌리엄 앞에 드러난 캐서린 그녀의 삶은 얼마나 지독했던가. 골프를 치는 캐서린, 어떤 세련된 공간에서나 자연스럽고 우아한 캐서린, 그 캐서린이 애초부터 그런 삶을 살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지독하고 쓸쓸한 농담인가.

L. 그런데 루시는 어째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윌리엄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일흔이 되도록 엑스 와이프, 현재 와이프, 딸들, 엄마, 누나에게 칭얼거리기만 하는, 우쭈쭈해 달라고, 자기처지부터 좀 생각해달라고 하는 이 권위 있는 척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왜 이토록 연민어린 시선으로 하는 걸까 못마땅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윌리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루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고 아이 둘을 낳아 함께 키우고, 사랑에 빠진 순간, 그러면서도 이질감을 느끼고 외로움이나 고독감, 결코 채울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모두 윌리엄이라는 상대가 있기에 가능하다. 거기서 루시는 자기 자신의 여러 모습을 발견한다. 정희진의 공부 7월호에서 말하는 “너라는 생활” 그 자체이다. ‘너’를 이야기하는 ‘나’를 이야기하고 있음. 루시는 윌리엄과의 세월을 차곡차곡 되짚어보다가 캐서린에 관해서도 윌리엄에 관해서도 심지어 어쩌면 데이비드에 관해서도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음을, 누군가 타인을, 그 타인과 함께 한 인생들을 완벽하게 알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윌리엄이라는 환상이 준 권위나 안온함이 루시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데 역할을 했음을 깨닫는다. 이 잔혹한 인생에서 그 환상이나 착각마저 없다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윌리엄도 루시와 캐서린을, 루시도 캐서린과 윌리엄을 전부 알지는 못하고 자신이 알고 싶은 대로, 상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안다고 생각해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앎들이 엮여 그들 저마다의 삶을 버티고 나아가게 해준다. 윌리엄에게 루시가 밝은 빛으로 환히 빛나는 사람이라는 오해 또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더 외롭지 않았을까.

책 한 권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내 이야기를 했다. <오, 윌리엄!>은 그런 책이다. 이 글에서 알게 된 나에 관한 이야기가 당신이 나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나를 다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읽을 당신에 관해서 나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 더 친밀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친밀감이, 거기서 빚어지는 환상 또는 착각이 우리를 버티고 살아가게 한다. 루시, 윌리엄, 캐서린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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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0 12: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휴, 리뷰 너무 좋아 죽겠네요.
저는 예전부터 느낀 것이긴 하지만, 잠자냥 님이 리뷰를 잘 쓸 수 있는 건, 책을 잘 읽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잘 읽는 사람이 잘 쓸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리뷰는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고요.
리뷰가 소설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흑. 너무 좋아 ㅠㅠ

잠자냥 2023-07-10 12:25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의 ㅠㅠ 를 보았으니 오늘은 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7-1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요 시기에 딱 희진 샘 매거진 7월호 ‘사랑‘ 팟캐를 들으며 대입시켜 주시니 쏙쏙 읽힙니다.
전 토요일에 ‘사랑‘ 그 부분을 버스 안에서 들었어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긍정적인 결론으로 내려지긴 했지만요. 나는야...긍정적인 여자!!ㅋㅋㅋ
고양이들이 자냥 님께 미치는 영향이 참 감동스럽네요. 매번 감탄 중입니다.

윌리엄과 루시는 떨어져 살고 있기에 지금의 우정이(사랑과 우정사이 같아 보입니다만^^) 존속된다고 봅니다.
서로의 오해와 믿음이 충만하여 또 합쳐 살았다면 과연 이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을지?ㅋㅋㅋ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미리 축하드려요.^^

잠자냥 2023-07-10 14:30   좋아요 1 | URL
응 네? 뭘 축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무 님은 긍정 에너지 넘치십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3-07-11 11:34   좋아요 1 | URL
저도 이달의 리뷰로, 축하드립니다!

잠자냥 2023-07-11 12:38   좋아요 1 | URL
네?! ㅋㅋ 그럼 저는 이번달에 그만 쓰는 걸로......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7-11 12:4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써주셔야죠!
우리에게도 읽는 기쁨을 달라!!!!

암튼 또 축하합니다♡
자목련 님도 인정하셨어요.ㅋㅋㅋ

은오 2023-07-11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으라고 하셔놓고 이런 리뷰를 써주시면 어떡하죠? 궁금해지네....
잠자냥님이랑 집사2님이 생각보다 더 찐사랑인 것 같아서 속상하네요 ㅋㅋㅋㅋㅋ 찐으로 속상하다!
그래도 이 리뷰 너무 좋습니다. 근데 부족하다. 난 잠자냥님을 더 알고싶다.... 저랑 언젠가 만나서 술한잔 해주시죠

잠자냥 2023-07-11 10:26   좋아요 1 | URL
당신은 지금 잠자냥이라는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은오 님하고 술한잔은 다부장님하고 술한잔 하게 되면 그 이후..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11 11:42   좋아요 1 | URL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거다 해도되나요?

잠자냥 2023-07-11 12:38   좋아요 1 | URL
엥? 나원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7-11 12:5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꺅!!! 안 돼!!!! 오글오글~
말하기 전에 소줏잔 얼른 뺏어요!!!ㅋㅋㅋ

2023-07-1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