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은 그의 마지막 영화로 십여 년 전인가 이제는 사라진 극장 하이퍼텍 나다에서 처음 봤다. 그 이후로도 이 영화는 몇 번 다시 봤는데, 볼수록 참 대단한 영화이다. 그 영화의 원작이 바로 피에르 루이스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으로 최근 발간되었다. 영화를 워낙 좋아했고, 영화에서 채워지지 않은 궁금증이 있어 나오자마자 책을 사봤다. 원작을 읽고 나서도 루이스 브뉘엘, 이 감독 참 대단하구나, 천재가 틀림없어 하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짧은 소설이다. 한 여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중년 남자와 그를 가지고 놀면서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콘챠는 팜파탈의 원형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녀가 하는 짓을 지켜보노라면 나마저도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미모는 어찌나 빼어난지 한번 스쳐가듯 보기만 해도 다들 그녀에게 홀딱 반해 정신을 놓고 만다. 이 작품의 앙드레 스테브놀또한 그런 남자로 세비야의 카니발에서 이 미모의 안달루시아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어찌어찌 성공해서 그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얻어내고야 만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알기 전까지 앙드레의 삶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런 목표도 생각도 없이 혼자, 그저 산책만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녀와 만나기로 한 아침은 바야흐로 다른 하루가 되리란 기대로 벅차 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거절이나 무시 혹은 속절없는 기다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갈망한다면 여인들은 자신을 내어준다. 왜 안 그러겠는가?’(27) 하고. 그런데 정말 그녀, 콘챠는 앙드레의 바람대로 갈망하면 자신을 내어주는그런 여인일까? 앙드레와 콘챠의 이야기인가 싶은데, 그런 앙드레 앞에 돈 마테오가 나타나 콘챠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테오는 앙드레에게 자신의 이야기, 콘챠와 있었던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거의 1년이 넘도록 정열의 노예이자 꼭두각시로 살아온 그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녀는 정직한 여자입니다. 네다섯 명 이상의 연인은 두지 않죠. 우리 시대에 이것은 일종의 정숙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생, 그녀는 위험해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란 말이오. 나는 그녀가 죽는 날 신이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란 기대를 품고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37)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 그녀가 죽는 날 신이 그 여자를 용서하지 않으리란 기대를 품고 그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는 존재. 그 여자가 바로 콘챠이다, 마테오는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토록 그녀를 증오하게 되었을까? 마테오 또한 앙드레가 그러했듯 콘챠의 미모에 반해 정열의 노예가 된다. 부유한 신사인 마테오에 비해 콘챠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어머니와 단 둘이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의 미모가 주는 혜택은 잘 알고 있어 이를 이용해 마테오를 노예처럼 부리며 자기 잇속을 챙겨나간다. 마테오는 이제나저제나 콘챠의 마음...(아니 ’)을 소유할 기회만 노린다. 이렇게만 하면 이 여자의 몸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의 다 됐다 싶을 때면 콘챠는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그 결정적 순간을 다음으로 계속 미루기만 한다. 마테오는 화도 내보고 애걸복걸도 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돌아서기도 하지만 콘챠의 예언대로 곧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 노예처럼 무릎을 꿇는다. 마테오는 과연 콘챠를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얼핏 보면 팜파탈 여자와 그 여자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부르주아 남자의 이야기로만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끝없이 욕망해도 그 대상에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의 모호한 실체에 중점을 두면서 작품의 결을 조금 색다르게 빚어내고 있다. 특히 루이스 브뉘엘 감독은 그 욕망의 모호한 실체에 집중해 영화화함으로써 원작을 뛰어넘는 한편의 잊을 수 없는 명작을 만들어냈다.

 

콘챠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도, 생활방식도 모두 다 말이죠. 그런데도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하나의 벽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79)


실제로 콘챠는 마테오에게 자기 생활을 속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오히려 상대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마테오는 그녀와 자기 사이에 아주 높은 벽이 있음을 실감한다. 만일 마테오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일, 그러니까 그녀의 내부(몸 안)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벽이 과연 사라질까? 그렇지 않으리란 것을 독자는 당연히 알고 있으며, 마테오 그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마테오는 그가 바라는 방식으로 콘챠를 소유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그녀를 완벽하게 자기 사람으로 삼을 수 없음을 알고 좌절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단 마테오만 그러할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그 욕망의 대상은 너무나 멀고 흐릿하며, 모호하기만 하다. 잘 안다고 생각한 그 대상이 어느 날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깜짝 놀라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애초에 욕망의 대상은 내 욕망의 투사일 뿐, 그 대상의 실체는 아니지 않은가.

 

루이스 브뉘엘 그런 욕망의 모호한대상을 기발한 방법으로 표현한다. ‘콘챠역할을 두 명의 다른 배우에게 맡긴 것이다. 영화 속 콘치타역할은 프랑스 배우 캐롤 부케와 스페인 배우 안젤라 몰리나가 각각 연기한다. 영화는 원작을 살짝 각색해서 중년의 사업가 마티유가 자신의 집에 새로 온 하녀 콘치타에게 홀딱 반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내용인데, 이 영화의 가장 재미난 점은 21역의 묘미에 있다. 영화가 시작된 후, 마티유는 새로 온 하녀 콘치타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한밤에 은밀히 다시 자기 방으로 부른다. 그런데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콘치타는 낮에 마티유는 물론 관객이 본 콘치타와 좀 다르다. 관객들은 분명히 이 여자는 아까 본 콘치타가 아닌데, 왜 마티유는 이 여자를 콘치타라고 생각하는 걸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캐롤 부케가 연기한 콘치타는 주로 마티유에게 도도하고 차갑게 굴며,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온다. 반면 안젤라 몰리나가 연기한 콘치타캐롤 부케콘치타에 비해서는 다정하게 마티유에게 말을 건네고, 좀 더 친숙하며 애교도 떨고 아양도 떨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콘치타역을 맡은 두 배우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관객도 두 배우가 맡은 역할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어지게 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루이스 브뉘엘은 이처럼 콘챠역할을 두 사람이 맡도록 해 인간에게는 이렇게 상반되는, 서로 다른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은 그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하다는 것 또한 전한다. 어쩌면 욕망이라는 것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콘치타 역의 캐롤 부케_ 루이스 브뉘엘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콘치타 역을 맡은 또 다른 배우 - '안젤라 몰리나'



영화에서는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영화 중간 중간 등장하는 폭발 사고 등 긴박한 테러 장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티유가 가끔 들고 다니던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자루이다. 원작과 달리 루이스 브뉘엘이 이런 장면을 끼워 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테러장면은 마티유가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인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는 장면과 자주 대비되어 나타난다. 어쩌면 감독은 사회가 이토록 어수선한데도 나 몰라라 자신의 욕망을 좇기만 바쁜 마티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냉소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티유와 콘치타의 물고 물리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긴박한 관계를 테러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은 아닐지. 마티유가 종종 들고 나타나는 남루한 자루도 상징적이다. 그 자루는 마티유가 거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이 들고 있기도 하다. 그런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에게나 어울릴법한 낡은 자루를 마티유 같은 상류층이 들고 다니니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 자루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은 아닐까. 인간은 그렇게 늙으나 젊으나 가난하나 부자나 모두 자기만의 욕망덩어리를 평생 쥐고 가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자루처럼 인간의 욕망은 지저분하고 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 손에 넣고자 해도 넣을 수 없는, 넣었다고 생각해도 도저히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욕망의 모호한 실체. 그럼에도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그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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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17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봐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ㅋ

잠자냥 2021-05-17 17:46   좋아요 2 | URL
저는 영화가 좀 더 재미났지만 ㅎㅎ 기회되신다면 둘 다 보시길 추천합니다.

mini74 2021-05-1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주인공이 둘이라니 정말 모호한 실체란 제목이랑 맞는 것 같아요. 캐롤 부케란 배우 도도해 보입니다 ㅎㅎ 영화 재미있겠어요 *^^*

잠자냥 2021-05-17 22:39   좋아요 1 | URL
네 영화 재미납니다~ 옛 영화지만 명작이에요. ㅎㅎ

북페스트 2021-05-18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가 이런 관점도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여 남겨봅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중 그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술자의 흔적 지우기에 있다고 보여졌습니다. 소설보다는 영화가 더욱 그 흔적을 잘 지우고 있죠. 동일한 여자를 연기하는 두 명의 배우, 저는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보면 여자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이 두 배우는 결국 영화의 화자, 앙드레의 시선, 앙드레의 내면, 앙드레의 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앙드레 입장에서 바라본 여자인거죠. 사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독자와 관객, 감독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불가해한거죠. 욕망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한데요, 원작 소설이 누군가에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점도 주목해야 봐야 할 것 같아요. 브뉘엘이 주목했던 것은 그 의식이 아니었나...영화가 의식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에 걸맞는 소설을 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5-18 14:10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것처럼 ‘콘챠‘는 앙드레(또는 마테오)의 시선, 앙드레(마테오)의 내면과 의식이 투영된 대상이죠. 애초의 ‘콘챠‘는 존재하지 않고 앙드레 혹은 마테오의 욕망이 투사된 대상만 존재한다는 것을 이 원작이나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말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