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오랜만에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꺼내 읽었다. 여러 번 읽어도 여전히 좋은 작품. 다시 읽고 싶어진 까닭은 최근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눈사태>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품은 ‘불륜’을 소재로 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현실의 나는 불륜을 극도로 혐오한다.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두 사람이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면 서로 배신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윤리를 지녔다면 그래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결혼 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숨겨서는 안 된다고, 배우자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헤어지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인생, 그리고 그와 얽힌 다른 이들의 인생도 거짓이 되고 만다. 이런 까닭에 현실의 나는 그 어떤 불륜 커플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떤 소설, 아니 몇몇 소설에서 그려지는 불륜의 사랑이야기에는 그처럼 단호할 수가 없다. 때로는 마음이 흔들린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그런 작품 중 단연 압도적이다. 매우 짧은 단편인데도 어쩌면 그토록 흡인력 있게 써내려갔는지 그 둘의 사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이 깨지지 않기를, 그들의 작은 호텔 방이 산산조각 나지 않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그런 작품 중에는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그 시절의 연인들’도 있다. 이 작품도 어떤 면에서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떠올리게 한다. 불륜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애잔하고 쓸쓸한, 윤리에 어긋나는데도 왠지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는 간절함까지 닮았다. 그 사랑이 그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앞으로 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책을 덮은 후에도 그들이 그 사랑을 온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라게 된다.

<눈사태>는 이 두 작품의 계보를 잇게 될 것 같다. 나만의 계보랄까.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눈사태’처럼 밀어닥친 불륜의 사랑을 그려나간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구로프와 안나처럼 여기에는 ‘이고리’와 ‘률랴’가 있다. 이고리는 어느덧 쉰 줄에 들어선 사내로, 제법 성공한 피아니스트이다. 고르바초프의 개방, 개혁 정책 덕분에 유럽 곳곳으로 투어를 다니며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유럽에서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내와 딸, 아들에게 주려고 정성껏 고른 값비싼 선물을 여러 개의 가방에 담아서 갖고 올 만큼 가정적이기도 하다. ‘구료프’가 마흔이 아직 되지 않은 나이에 열두 살 난 딸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을 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이고리’나 ‘구료프’나 모두 아내와 일찍 결혼했다. 자신의 아내를 천박하고  촌스럽다고 여기면서 집에 있기를 꺼리는 구료프와 달리, 이고리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에게 아내는 늘 숨 쉬는 공기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눈사태’는 벌어진다. 어느 날, 홀로 휴양지로 떠난 이고리는 그곳에서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 앞에 서 있게 된다. 그런데 전화기 부스 안에서 통화 중이던 한 여인이 이고리를 돌아보며 눈물 가득한 눈으로 동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고리는 자기가 쓸 동전 밖에 없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동전을 건넨다. 그녀가 바로 ‘률랴’이다. 구료프와 안나가 휴양지에서 만나는 장면과 닮은 듯 다른 지점이다. 구료프는 휴양지에서 흰 스피츠를 산책시키는 안나를 멀리서 흥미롭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여자가 남편이나 친구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애초부터 관찰하면서 마음속으로 약간의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고리는 률랴를 관찰하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동전을 빼앗기고 만다.
 
구료프는 내내 흰 개를 산책시키는 안나를 지켜보면서 휴양지에서 하룻밤 정도 상대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안나와 그런 사이가 된다. 이고리와 률랴는 동전을 주고받은 그 첫날부터 불꽃이 튄다. 아니 불꽃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순간의 일탈이라고 해야 하리라. 전화를 마친 률랴가 굳이 동전을 갚겠다며 이고리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은 어쩌다 보니 그날 술을 함께 마시게 된다. 그러고는 무려 야외, ‘눈’ 밭에서 서로 몸을 탐한다. 하얗게 내린 눈 위에서 광폭하게 정사를 나눈 뒤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률랴의 외투는 얼룩과 물기로 망가진 상태다. 그 얼룩처럼 두 사람의 섹스는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눈사태>에서는 이렇듯 ‘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후 이고리는 이상하게도 률랴를 잊지 못하고, 계속 그녀를 찾는다. 휴양지에서의 하룻밤 일탈로 생각한 사이였는데 현실로 돌아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구료프와 안나, 그리고 이고리와 률라. 그들은 모두 둘 만의 비밀스러운 생활을 위태롭게 유지해 간다. 이고리와 률라, 구로프와 안나에게는 두 사람만이 은밀히 만나는 작은 호텔 방이, 그 호텔에서의 짧은 시간이 차츰 진짜 삶이 되어 버린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만큼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눈사태가 속도를 내게 되면, 그 앞의 모든 것들을 몽땅 휩쓸어버린다. 집들도, 나무들도, 전신주들도, 눈사태 직전엔 특히 고요해진다고 한다. 아마 자연은 행동하기 전에 숨 고르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 눈사태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 길은 아무도 모른다. 눈사태 스스로도. (<눈사태>, 66~68)


<눈사태>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가장 다른 지점은 이 뜻밖의 눈사태, 이고리와 률랴의 격정적인 사랑이 빚어내는 뜻하지 않은 여파가 주변 인물들, 그러니까 이고리의 가정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과정까지 내밀히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고리는 률랴에 대한 사랑을 숨길 수 없어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아내에게 털어놓게 되고, 그 폭풍은 뜻하지 않은 결과로 흐른다.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지 않는 눈사태처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구료프와 안나 커플은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뜯는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테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되리라 생각하면서 둘만의 은밀한 만남을 이어나간다. 그렇듯 불안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남들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며 호텔 방 안에서의 ‘진짜’ 삶을 지켜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 지나갈 걸세.” 장모는 침착하게 약속했다.
 “만일 이게 지나간다면, 당치도 않은 거죠….”
 이고리의 눈에 진짜 두려움이 서렸다.
 “자네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세. 하지만 조심하게.”
 “무슨 뜻이죠?” 이고리가 눈을 들었다. 장모가 마주 쳐다보았다.
 “자네를 짓밟을 걸세.”
 “누가요?”
 “삶이.”  (<눈사태>, 110쪽)


떨어져 내린 눈사태는 언젠가는 속력을 잃고 결국은 멈추기 마련이다. 그런 후에는 ‘무사히 살아남은 자들은 질서를 향해서 신의 세상으로 기어나갈’(<눈사태>, 93쪽) 것이다. 구로프와 안나의 ‘눈사태’는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끝이 나고, <눈사태>는 눈사태가 마침내 멈춰버린 지점, 그리고 그 이후의 삶까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고리의 장모가 경고했듯이 그 모든 눈사태가 지나간 뒤에 그에게 남은 것은 폐허뿐이다. 눈사태를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몰려오는 눈사태가 위험함을 알아차리고 피했다면, 그날 그 새하얀 눈 위에 그 여자의 몸 위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고리의 삶에 그런 폐허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이고리는 률랴에게로, 그 새하얀 눈 위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행복을 맛보았다. 외투에 생긴 얼룩쯤은 지우면 그만이었다.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면 새 외투를 사주면 그만이었다. ‘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 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 미친 듯한 카드놀이, 폭식, 폭음, 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 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 실없는 농담뿐이다. 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266쪽) 외치던 구로프의 삶이 안나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은 의미를 찾았듯이…….

꼭 불륜이 아니더라도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둘만의 세계가 존재할 때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고, 자신들만의 삶이 진짜라고 여기게 된다. 다른 것들은 중요성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깊이 헤아리지 않고, 아니 그럴 틈도 없이 그 사랑에 몸을 던지는 것이리라. <눈사태>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눈사태처럼 갑자기 닥친 사랑과 그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 나약하게 순응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을 저마다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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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03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참... 제가 잠자냥 님의 서재를 끊어내야지 이거 원 책 사는데 전재산 탕진하겠어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예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고 있던 책인데 비로소 구매해야 겠습니다. 눈사태도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아주 관심이 많거든요.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별하는지, 그 후에는 어떤 삶을 사는지요. 좋은 글 감사해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0-09-03 09:58   좋아요 1 | URL
아니, 탕진하면 아니되옵니다.... 그치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꼭 읽으세요. 사세요~ ㅎㅎ
<눈사태>는 책값이 비싸서.. 참 뭐라 사라고 말씀드리기 뭣합니다요. ㅠ_ㅠ 200쪽도 안 되는데 책값이... ㅠㅠ
암튼 저는 토카레바 작품이 좋아서 걍 샀습니다만, 다락방 님은 지난번에 산 토카레바 단편집 먼저 읽으시고 그 작가 느낌이 괜찮으면 그때 생각해보세요.ㅎㅎㅎ

다락방 2020-09-03 10:05   좋아요 0 | URL
제가 토카레바 단편집을 샀나요? 검색해보고 올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03 10:06   좋아요 0 | URL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6월달에 샀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딨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아- 점심 먹을 자격도 없네요, 저는... 하아-

잠자냥 2020-09-03 10:11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미쳐 이 사람아! <티끌 같은 나> 그것도 제 리뷰 보고 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ㅋㅋㅋㅋㅋ 다락방 님 머릿속에서 기억력 눈사태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9-03 10:14   좋아요 0 | URL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도 산 거 아닌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03 10:16   좋아요 0 | URL
티끌 같은 나 표지 보고 생각났어요. 잠자냥 님 리뷰 보고 땡투하고 샀다는게요.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겠지만...지가 어딘가엔 있겠죠.

잠자냥 님 댓글 보고 헉! 하고 구매리스트 가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검색해봤는데 다행스럽게도 없네요. 이건 안산게 맞는가봐요. 휴... ㅠㅠ

케이 2020-09-0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오랜만이예요. 엄마 때문에 정신이 없다가 오랜만에 아는 책 나와서 댓글 드려요. 전 안톤 체호프 선생이 쓴 불륜 소설 중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보다 ‘사랑에 관하여‘ 가 더 좋았어요. 나중에 두 남녀가 기차에서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만 하염없이 쏟을 때 저도 카페에서 그 책 읽으며 눈물을 질질 짰답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일부러 고약하게 구는 것도 좀 공감갔고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대학교 때 읽었는데, 유부남인 주제에 심심풀이처럼 가벼운 불륜을 일삼아온 남자 주인공이 마음에 안들었어요. 나중에 서른 넘어 읽어보니 남자가 이제서야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단 말에 그 둘의 사랑이 조금은 수긍이 가더군요. 그 둘은 어찌 되었을까요? 결국 시간이 지난 뒤 그 호텔에서 이별을 고하지 않았을까요. 삭막한 시기지만 즐겁게 지내시길 기도해요.

잠자냥 2020-09-03 14:16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에요. ㅎㅎ 안 그래도 엄마가 많이 안 좋아지셨나 조금 걱정했습니다. ㅎㅎ 별일 없으시길 바라고요.
‘사랑에 관하여‘도 분명 읽었을 텐데 생각이 안 나네요; ㅎㅎㅎ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자꾸 오타나서 ‘게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으로 쓰게 되는데, ㅐ ㅔ 차이 하나로 참 느낌 달라지네요. ㅋㅋㅋㅋㅋ 암튼)에서 그 두 사람도 결국에는 이별을 고하게 되겠지요. <눈사태>는 그런 이야기도 담겨 있어요.

케이 님도 건강하시고, 가족 모두 평안하길 바랄게요.

Alex 2020-09-0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만에 보는 좋은 독후감이었는데... 마지막 설명이 몰입감을 떨어뜨립니다. 그래도 너무 감사합니다. ˝체호프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눈사태˝. 꼭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09-07 21:07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책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2020-10-15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