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감독, <벌새>, 2018


<벌새>는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가족과 어디에나 존재할 것 같은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이야기. 그런데 그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벌새>는 특별하다.

1994년, 중학교 2학년 은희는 외롭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그리고 자신. 다섯 식구 중의 막내. 식구들은 서로 무심하지만 딱히 큰 문제가 있어 보이는 가정은 아니다. 은희에게는 단짝 친구도 있고,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있다. 그런데 은희의 일상을 엿보노라면 열다섯 살 이 소녀의 삶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딱히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영화 첫 장면부터 은희는 엄마를 목이 터져라 부른다. 이런 장면은 영화 중반 무렵에도 또 한 번 등장한다. 은희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엄마는 듣지 못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 없는 목소리. 열다섯 소녀의 목소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일 엄마조차도 듣지 못한다. 그저 파묻힌다. 목소리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집안에서 막내이기에 더욱 그렇다. 학교에서도 딱히 공부를 잘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은희의 존재는 투명인간과도 같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아무도 없는 집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고, 아무리 아파도 혼자 병원에 가야한다. 수술을 받아도 병실에 부모님은 잠깐 들를 뿐, 은희는 또 혼자가 된다.

은희뿐만이 아니다. 은희네 집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희의 엄마도, 언니도, 아빠와 오빠에 비하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가족의 풍경은 식탁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와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은희의 오빠는 집안의 제왕이나 마찬가지이다. 단, 아빠가 있을 때는 당연히 두 번째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아빠의 권위를 앞지르면 안 된다. 때문에 아빠 앞에서 은희에게 폭력을 휘둘렀을 때 아빠는 폭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감히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리”느냐고 분노하는 것이다. 밥상에서 젓가락을 흔들면서 가족에게 일장훈계를 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폭력 그 자체이다. 흔한 가족 풍경이지만 카메라 시선을 조금 돌렸을 뿐인데 아빠와 오빠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폭력적인 일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남자 형제가 없는 관계로 자랄 때 오빠로부터 맞는다거나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없다. 물론 자매들끼리도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성별끼리는 일정 나이가 되면 힘이 비슷해지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는 일은 없다. 같이 머리끄덩이를 잡든 멱살을 잡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가능하다. 그런데 은희는 오빠로부터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린다. 비단 은희뿐만이 아니다. 은희의 단짝 친구 지숙은 어느 날 학원에 마스크를 하고 나타난다. 마스크를 벗는 친구의 입가는 보라색 멍이 크게 들어있다. 은희와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나눈다. “생일인데도 맞았어?” “너희 오빠는 어떻게 때리니?” “오빠한테 맞아서 죽으면 가족들이 슬퍼할까” 등등. 너무나도 담담하게 폭력을 이야기하기에 그 모습이 오히려 기괴하다.

은희와 지숙만 그러할까? 잘 들여다보면 은희의 엄마 또한 은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장기를 보냈으리라 짐작이 간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은희의 외삼촌. 외삼촌은 술에 취해 자신의 여동생인, 은희 엄마를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린다. 외삼촌의 말을 듣다 보면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남자 형제를 위해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던 여자, 소녀는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던, 그런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위해 딸에게 “오빠 오면 밥 챙겨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엄마. 은희네 집안 풍경은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흔히 보아왔던 풍경이라 전혀 새롭지 않은데도 그 익숙한 풍경이, 너무나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기 때문에 끔찍하다.

그리고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김영지. 이 외로운 소녀에게 어느 날 빛과도 같은 존재가 찾아온다. 은희가 다니는 학원의 김영지 선생님은 무심한듯하면서도 세심하게 은희의 아픔을 헤아린다. 은희가 오빠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 표정, 그 얼굴은 짧은 순간, 많은 것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어쩌면 영지 선생님 또한 그런 10대를 지나왔으리라는 무거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더 이상 맞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은희는 이렇게 영지 선생님으로부터 조금씩 세상에 맞서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해간다. 

영화가 계속 이렇게 흐른다면, <벌새>는 한 소녀의 성장담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4년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일성이 죽었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이기도 하다. 은희가 그 무렵 서울 강남의 한 동네에 살며 학원을 다니고 강남의 중학교를 다니는 설정은 그래서 꼭 필요한 장치였다. 김일성의 죽음은 중학교 2학년인 은희에게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다. 이 소식을 병실 텔레비전으로 본 은희의 표정은 그래서 어른들과 달리 심드렁하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무너진 소식을 학교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접한 은희는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간다.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또한 10대였다. 김일성 사망 소식은 그 무더운 여름날 보충수업 중에 들었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어져서 자다가 아이들이 “야, 김일성 죽었대”하며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죽었다고?” 하고 다시 엎드려 잤다. “전쟁 날까?” 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때 대개 아이들은 ‘전쟁이 나서 시험 안 보면 좋겠다’로 귀결될 정도로 김일성의 죽음은 터무니없는, 왠지 나와는 상관없는 비현실적인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성수대교 붕괴는 달랐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강남에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많은 아이들이 소식을 접하고는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날, 학교 공중전화 앞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디론가 연락을 하려고 긴 줄을 선 아이들로 가득했다. 교실 책상 서랍이나 아이들 가방에서는 숨겨둔 삐삐가 미친 듯이 울려대기도 했다. 그러니, <벌새>의 은희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크게 놀랐을까.
 
<벌새>는 이렇게 1994년이라는 특수했던 한 해, 어느 평범한 가족과 한 소녀의 이야기를 엮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은희는 그 엄청난 무너짐, 충격 앞에서도 영지 선생님이 가르쳐줬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절감한다. 고통과 상처를 쓰다듬는다. 큰 폭력도 작은 폭력도, 큰 상처도 작은 상처도 그렇게 끌어안고 쓰다듬으면서 1994년 그 한해를 보내며 성장하고 자란다. 그런데 은희는 아마도 1995년에 또 한 번 심장을 쓸어내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 뒤로 백화점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배가 가라앉았다. 은희의 1994년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은희의 후배가 말했듯이 “그건 지난학기”라고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벌새>는 그런 세계에서 앞으로도 여러 차례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해야 할 나, 또는 세상의 모든 은희에게 가슴으로 남을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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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0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상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님. 이 리뷰를 먼저 읽어서 제가 앞으로 영화 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도 다가오는 주말에 이 영화 보기로 했거든요.
리뷰로만 읽어도 참 좋은 영화네요. 저도 꼭 볼게요, 잠자냥님.

잠자냥 2019-09-03 16:09   좋아요 0 | URL
네, 영화 즐겁게 보세요. 저는 또 한 번 봐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책도 궁금해요. 무려 정희진 님의 글이 있어서요. ㅎㅎ

케이 2019-09-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저는 아직 영화 못 봤는데, 저 책에 정희진 님 글이 있다니! 정희진 님의 영화평 너무나 읽고 싶네요. (책에만 있는 거겠죠? 신문 같은 데 기고하신 게 아니고?) 이 영화 기생충을 넘어선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여성 감독이 이런 성과를 냈다는 게 참 소중해요.

잠자냥 2019-09-03 17:12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저도 이 책은 관심 밖이었는데, 정희진 님 글이 있어서 한 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두둥=33
저도 꼼수부려서 어디 글을 기고하지 않으셨나 찾아봤는데 검색에는 안 나오더라고요. 아마 책에만 실려 있는가봐요. ㅎㅎ
암튼 이 영화 보고 나서 책을 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케이 님도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세요. 영화도 책도.
전 이 영화 개봉하자마자 봤는데, 책은 자꾸 9월 1일 출간, 9월 2일 출간 등등 미뤄지더니 드디어 나온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19-09-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볼 영화가 없어 살짝 목마르던 차에 이렇게 소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좀전에 예매했어요 ㅎ

잠자냥 2019-09-04 10:25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