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휴일 아침에 이 책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때마침 창문으로 눈부신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봤다면 그 빛에 눈이 부셔서 눈물을 흘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마음에 파문이 일고, 그러다가 끝내 눈물이 나듯이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는 그 아침이 그랬다. 오랜만에 문학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책은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에서도 44번이므로 꽤 앞에 속한다. 초판은 1990년 출간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여러 번 이 책을 마주했다. 책표지와 제목이 이제는 아주 낯익은 정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여태 읽기를 미루던 책. 그런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일 20대 또는 30대 초반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크게 와 닿았을까? 물론 그때도 그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지금처럼 이 작품을 온 마음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이 작품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문체가 아주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의 줄거리가 매우 특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척박한 스텝 지대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고달픈 삶이 그려질 뿐이다.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딱히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읽다보면 절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백년보다 긴 하루>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주인공인 ‘예지게이’와 그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까잔갑’- 이 두 사람은 내 기준엔 아름다운 인간의 전형이다. 근래 읽은 어느 문학 작품 속 인물들보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예지게이와 까잔갑뿐만이 아니다. 예지게이의 아내인 ‘우꾸발라’, 그리고 이들과 스텝 지대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 ‘아부딸리쁘’와 ‘자리빠’ 부부도 보기 드문 인간 유형임은 틀림없다. 이런 이들이 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세상을 살다가는 게 그리 헛된 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인물들이 한없이 선량하기만하다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떨어질 것이다.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테니까. 그러나 이들은 비록 드물지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만 같다. 예지게이는 성격이 완고하고 격렬하기 때문에 ‘눈보라’라는 의미의 ‘부란니’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을 잃어버린 뒤에는 존경해마지 않았던 까잔갑에게 비열하고 쪼잔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퍼붓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의 그 간절한 바람 때문에 아내 우꾸발라에게 더할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이라면 모두, 우꾸발라가 예지게이의 마음 속 폭풍을 알고 있었으리라고, 그럼에도 그녀는 끝내 모른 체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성품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 눈보라 같은 격정적인 성격의 남편 곁에서 묵묵히 ‘할망구’가 될 때까지 그 곁을 지킨 우꾸발라, 척박한 스텝 지역에서 때로는 헤매고 길을 잃더라도 인간다운 위엄과 예의, 정의로움, 이웃에 대한 따스함을 잃지 않고자 애썼던 예지게이. 그들이 삶이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예지게이를 있게 한 존재인 ‘까잔갑’. 그에게는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재산이 조금 불어나자 초심을 잃어버리는 듯한 예지게이에게 까잔갑은 말한다. “강도를 만나 털린대도 모든 걸 다 잃지는 않아. 그건 복구할 수가 있어. 하지만 영혼이 짓밟혔다면 그걸 다시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어.”(113쪽). 그의 이 말에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본다. 혹시라도 돈 몇 푼에, 눈앞에 보이는 알량한 이익 때문에 스스로 영혼을 짓밟는 일을 한 적은 없는가, 그 아침에 내 인생 전반을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산 적이 있었나보다. 까잔갑의 꾸짖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편,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날마다 글을 쓰는 ‘아부딸리쁘’도 인상 깊다. 섬세하고 예민하기에 한때는 삶을 다 놓아버릴 지경에 놓였던 그였지만 예지게이의 도움으로 또 다른 삶을 살게 되고 그 뒤로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쏟으며 헌신적인 삶을 사는 그. 그들의 평범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가득한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살더라도 ‘그 어떤 것’을 잃지 않는 한 행복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백년보다 긴 하루>는 척박한 스텝 지역에서 서로 의지하며 사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그린 소설인가? 쉽게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평범한 이야기 사이에 SF 같은 이야기가 삽입되어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묘지 ‘아나-베이뜨’의 전설이 된 ‘나이만-아나’와 노예가 된 그의 아들 ‘졸라만’의 이야기, 음유시인 ‘라이말리-아가’와 ‘베기마이’의 슬픈 사랑 이야기, 예지게이의 숫낙타 ‘까라나르’와 얽힌 사연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얽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예지게이가 까잔갑을 위해 ‘보란니-부란니’ 간이역에서 ‘사로제끄’로 가는 동안 벌어지는 ‘패리티 우주 정거장’의 우주 비행사 1-2와 우주비행사 2-1의 이야기는 대체 이 예지게이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러는 가운데 마지막에 가서 아, 하고 큰 깨달음을 준다. 이 작품은 이렇게 리얼리티 넘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위에 전설과 역사, 현실과 공상을 적절히 뒤섞으면서 전혀 상관없을 듯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예지게이 삶과 하나로 이어지면서 좀처럼 잊기 힘든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사로제끄의 간이역들에서 살아가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파멸한다.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卑小)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어디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면 더 행복할 터인데도 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거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괴로워한다. (<백년보다 긴 하루>, 21쪽)


어린 시절, 그리고 20대만 하더라도 내 인생은 꿈꾸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만하게 세상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바란 대로 이룬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예지게이 또한 그렇다. 그는 때로 자기 삶을 후회한다. ‘어째서 이제껏 그런 삶을 영위해 왔을까? 어째서 손 털고 사로제끄를 떠나지 못했을까? 어째서 이 몹쓸 운명으로 괴롭힘 당하는 불행하고 불운한 가족을 자기 삶에 끌어들였을까. 그들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 조용하고 안락한 삶을 꾸려갔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한때는 무척 탐을 냈던 숫낙타 까라나르도 이제는 그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었으며 신이 내린 형벌이었고 그에게 어떤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의 삶에 행운이라고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어! 삶에 대해서 뭣 한 가지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신이 어디 있어? 신 같은 건 있지도 않아!’ 소리치기도 한다. ‘삶이란 믿을 수 없는 농담’처럼 그의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나 또한 예지게이처럼 때때로 세상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나 자신을 책망하고 한심한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대체 그런 일은 왜 일어났을까,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까 후회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이 세상이 다 엉망진창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지게이 만큼만 살다간다면 ‘인간’으로서 이 세상 한평생 잘 살다가는 게 아닐까. 예지게이와 까잔갑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곰곰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어느 것에나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그의 말처럼 살면서 일어나는 일에는 모든 것이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 삶의 비밀을 <백년보다 긴 하루>는 수수께끼처럼 들려준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5-0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침부터 기다렸어요. 오늘은 잠자냥 님 글 안올라오나... 그런데 오후에 이렇게 소원대로 똭!

감사합니다. 헤헷.

잠자냥 2019-05-09 16:51   좋아요 0 | URL
앗, 정말요? 요즘 연휴라 (실은 이 책 읽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ㅎ) 글이 좀 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05-09 16:52   좋아요 0 | URL
저 잠자냥 님 좋아하나봐요.. (수줍)

잠자냥 2019-05-09 16:5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회사에서 지금 육성으로 실소가 터져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5-09 16:56   좋아요 0 | URL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syo 2019-05-10 01:30   좋아요 0 | URL
얼레리꼴레리~~ 다락방님은~~~ 얼레리꼴레리~~ 잠자냥님을~~~ 좋아한대요~~ 좋아한대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9-05-10 06:51   좋아요 0 | URL
☺️

케이 2019-05-10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저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마다 가장 적당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해 왔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나중에 시간이 지나 그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아 가슴이 아플 때도 있지만, 결국 그 시절 나에게는 이외 선택안이 없었던 적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전 스스로 인생을 망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면 실패한 선택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타인이 보기에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내가 조금은 겸손해졌으리라... 조금 더 나은 늙은이가 되기 위한 과정이리라.. 스스로 위로하고 달래며 살곤 합니다. (실패자의 정신승리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요 ㅋ) 잠자냥님을 종종 절망하게 만드는 과거의 어떤 선택도 분명 당시 잠자냥님께는 최선이었을 거예요. 수준 높고 재밌기까지 한 리뷰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

잠자냥 2019-05-10 14:07   좋아요 1 | URL
저도 돌이켜보면 가장 적당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해 온 것 같아요. 그런데도 결국 그랬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가끔 있고요. 그런데 케이 님 말씀처럼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도 나 자신이고, 그때는 아마 그 선택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살아갈 나날 중에서도 또 그런 일은 있겠지요. 그래도 정신승리하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의 인생이 아닐까요. ㅎㅎ 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케이 님의 댓글 오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