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장시 연구 - 5일장의 변동과 지역주민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1
허영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1.
일제시기 경제사 연구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성립을 둘러싸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양분된 입장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현재 그러한 대립은 각각의 입장만 확인한 후 다시 각자의 역사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증적인 연구로 침잠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기존의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근대 ‘긍정론’으로 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탈민족/탈식민주의적인 주장도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식민지기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식민지적 근대’라는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제출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근현대사 안팎의 연구사적 분위기 속에서 본서인 『일제시기 장시 연구』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서의 문제의식도 이러한 연구사적 대립과 한계를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의식과 역사인식 속에서 극복하고자 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시기 장시 연구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5일장의 변동을 지역주민이라고 하는 창으로 살펴본 글이다. 즉, 일제시기 장시의 증가, 변용, 존속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고 그러한 장시의 변화상을 크게 식민 권력, 지역, 주민이라는 입장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수집․활용하여 분석하였다. 따라서 일제시기 장시 연구는 교역 및 유통 공간으로써의 장시에 관한 연구이지만 상품을 둘러싼 경제적 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장시의 변화상 및 장시의 운영과 활용이라는 공간 활용의 측면에서 식민 권력, 지역, 주민에 초점을 맞춘 ‘장시의 사회사’ 또는 ‘장시의 정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경제사 연구에서처럼 장시를 돈과 상품이 오고 가는 교역과 유통의 장으로 파악하지 않고 식민 권력과 피식민자, 지역과 주민, 장시민과 농민이라는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장시의 사회사 또는 정치사로 파악한 이유는 본서의 장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서의 근원적인 물음은 서구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발전과정과 달리 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장시는 일제시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존속, 확산, 유지되었는가라는 점이다. 서구적 경로를 자본주의 발전 경로의 척도, 표준으로 보는 한, 당연히 사라져야할 ‘구시대의 유산’인 장시가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꾸준히 존속, 유지되고 있었던 이유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근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을 밝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역사 이론적 고찰에서 등안시해 온 이른바 ‘전통적인 것’ 또는 ‘한국적 특수성’을 어떻게 보편의 이름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는 현재 두 가지 이론적 참조점이 주목된다. 즉, 하나는 철저하게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를 극한으로 밀고 가서 보편을 해체하고 보편이라는 형태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편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데 최근 들어 보편(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또는 근대와 관련하여 보편(성) 담론은 서구의 이론적 논의 속에서 전개되었고 그 결과 보편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검토가 또한 서구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몇몇 논의를 살펴보면, 기존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척도였다고 부정하고 기준이 되어 차별을 생산하는 보편이 아니라 보편의 틀을 ‘텅 빈’ 것으로 간주하거나 ‘부정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와 유사한 이론적 지평에서 보편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범주 자체를 무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세계는 ‘보편적인 것들’로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보편은 ‘모호한 보편성’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보편을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든 기존의 획일적인 줄 세우기와 그에 따른 차별의 폭력적인 보편을 문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시 또한 서구적 보편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해서 없어져야할 것은 아니며 한국만의 특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장시의 역사는 한국 사회를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그런 점에서 본서의 문제의식과 문제의식에 따른 장시의 변동에 관한 연구는 시의적절하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서구 ‘비주류 경제학’에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물물교환 경제로 그리고 상품화폐경제로 이어지는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경제 발전 이론은 자유주의 경제학(주류 경제학)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시 문제도 이제 역사 이론적 고찰로부터 역사 사실적 고찰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어떠한 메커니즘 속에서 드러났는지를 심도 깊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역사학의 본연의 임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임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충실하고 두터운 묘사’가 이 때문에 가능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2.
이상의 문제의식 속에 본서는 일제시기 이래 1980년대까지 장시가 존속되고 도리어 확산된 구조적, 주체적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문제 삼고, 그러한 실마리를 일제시기 장시의 변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시기 장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경제체제이기는 하지만 조선 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당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도 장시에 대해서는 ‘시장규칙’을 만들어 규제적 통제권을 확보하는 이외에 그다지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시는 원시적 시장제도이고 이는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당연히 자연적으로 축소․소멸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시는 폐지되지 않고 줄곧 존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오히려 원래의 생각과는 달리 이를 식민 정책의 선전장으로 적극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일제시기라는 현실 속에서 장시는 그 내부적인 변동은 상당히 컸지만 없어지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제시기 장시의 변동과 관련하여 1940년대 초까지 존속, 확대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본서는 그 원인을 장시의 존속, 확대 이면에 드러나는 다종다양한 갈등과 그러한 갈등의 배후와 갈등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사람들에서 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식과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본서는 장시의 변동을 둘러싼 힘의 역학을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 즉 장시를 둘러싼 지역사회와 장시를 활용하고 있는 주민에서 찾고 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으로 식민지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권력(의사국가)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식민 권력은 장시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며 자연적인 축소․소멸을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다 할 역할은 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를 정책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다면 결국 장시의 변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은 장시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변동과 장시 문제에 개입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본서는 지역사회가 장시의 변동에 미치는 영향(제2부 장시변동과 지역사회)과 장시를 삶의 터전을 삼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중심으로 장시의 변동을 둘러싼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제3부 장시갈등과 ‘시민’, 제4부 장시와 농민). 장시의 변동에 영향을 끼친 객관적 요인으로는 교통, 운수체계의 변화를 들고 이러한 교통, 운수체계의 변화는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시의 변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장시가 변동하기는 하였지만 역으로 장시의 변동이 지역사회의 이해관계를 재편하고 변화를 추동한 경우도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장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장시는 경제적 공간인 동시에 정치, 문화적 공간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장시가 정치적 공간이 될 때 이를 둘러싸고 정치적 주체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치적 주체를 본서에서는 장시민과 농민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 이들은 장시 변동을 둘러싼 갈등과 분규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이러한 갈등과 분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지역주민에 의한 각종 집합 행위들이 정치적 활동의 사례들인데, 이 사례들을 통하여 본서는 장시가 그 변동의 폭은 컸지만 결과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해방이후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관점에서 본서는 ‘민중’에 기반을 둔 ‘지방정치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시를 둘러싼 갈등과 그에 따른 장시의 존폐는 지역과 장시라고 하는 삶의 공간을 둘러싼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공론장이 장시의 변동이라는 문제를 통해 그리고 둘러싸고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이 탄생되고 그에 의한 정치적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장시 변동에 가장 큰 힘을 장시라는 공간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변동과 장시를 드나들면 삶을 영위해 가는 ‘장시민’, 즉 ‘시민’으로 상정함으로써 근대적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과 연결시키는 듯 보인다. 물론 본서에서는 지속적으로 ‘시민’을 ‘장시민’으로 한정하며 구분하고 있다. 해석의 과잉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암흑기로 묘사된 일제시기에 장시를 둘러싼 정치적 주체로서 장시민과 농민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이면에는 근대적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의 모습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본서는 문제의식과 내용을 통해 드러나듯이 조선 경제의 정체성론에 기반한 식민사관이나 그것의 극복인 ‘민족주의 역사학’의 이론적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사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그를 통해 유의미한 점들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시를 교역과 유통이라는 경제의 장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사회의 장 및 문화의 장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더불어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 대문자 역사가 아니라 소문자 역사를 지역과 민중에 기반하여 ‘두텁게’ 서술하고 있는 점에서 그 가치는 빛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중에 기반한 역사적 서술을 중앙이 아니라 지역, 즉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의 공간, 경험의 장을 중심으로 파악함으로써 기존의 근대 국민 국가가 주도하는 내부적 위계화와 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역사학의 실천적 기여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본서의 빛나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는 몇 가지 논쟁점과 아쉬움을 제시하며 본서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3.
먼저, 장시가 기반하고 있는 경제체제의 변화에 대한 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지역공동체적 호혜주의가 작동하는 장시는 전근대적 장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장시의 이와 같은 기능은 근대 이후에도 줄곧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규칙’이라는 근대 법 체제 속에 장시가 포섭됨으로써 경제제도로서의 근대적 ‘공공재’ 또는 ‘집합재’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공공’ 또는 ‘집합’은 공동체의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그것과는 구별된다. 즉, 표지로서의 ‘公’과 내용으로서의 ‘共’이 결합된 개념으로 공동체적 모습은 항상 재현되는(Representation) 표지에 의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시의 변동과 관련하여 장시민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활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이해관계의 틀인 자본 및 지역 또는 식민 권력이라는 장 속에 제한된다. 그렇다면 장시의 변동은 식민 권력과 지역이 맺는 관계를 자본의 입장(경제체제의 변화)에서 보다 더 집중적으로 파악해야하지 않을까?
둘째, 근대적 공공재를 둘러싼 경합의 의미가 능동적 정치활동 또는 주체적 정치활동으로 긍정할 수 있는 점도 있다. 그 속에서 특히 식민 권력의 분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식민 권력의 분열을 야기하는 경합의 장 자체가 식민 권력에 의해 다시 봉합되는 것으로 진행될 경우 이는 근대 국가(또는 식민지)를 유지하는 또 다른 고도의 정치 기술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즉 지역민들의 정치적 활동이 근대 권력의 정치 테크놀로지에 장악되어 있다는 암울한 생각이지만 지역주민들의 정치적 활동 또한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줄곧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수동적 활동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근대적 공공재 또는 집합재는 그 생성에서 소멸까지 이를 둘러싸고 언제나 경합하는 공공영역이 된다. 이러한 경합하는 공공영역에서는 공공성을 대리․대표하는 자를 두는 데, 이때 대리․대표는 항상 개인의 사적 이익에 이끌릴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공공성과 달리 근대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적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자본가의 사적 이익이 항상 존재하고 그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으로 대리․대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에서 파악하고 있는 ‘시민’의 존재 또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일차적으로 장시의 변동을 이끄는 ‘장시민’은 시민에 대한 구별과 함께 제시하고는 있지만 은연중에 근대적 시민계급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60~162쪽). 하지만 시민계급의 집합재 또는 공공재에 대한 운동이 호혜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인가는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작업인 것 같다. 오히려 일제시기 자료에서 드물게 등장하지만 ‘시민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지수걸의 논의처럼 지방의 유지정치가 식민 권력과의 ‘야합’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호혜적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무(225쪽)인지도 의문이다. 그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는 장시의 변동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이상 자신들의 사적 이익 획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점에서 1920년대부터 장시가 조합과 조합의 대표에 의해 경영 또는 유지되는 점은 중요하다. 본서도 이런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고 시민, 행상인, 농민을 구별하고는 있다. 하지만 계급, 계층적 위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
넷째, 본서의 의미가 장시를 경제적인 장으로 보지 않고 사회, 정치적 장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 주체의 내부적 차이를 드러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내부적 차이는 장시를 둘러싼 경제적 장에서 파악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장시와 농민에 관한 장에서만 경제적인 측면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농민들이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공간에서 그 매개가 되는 상품과 유통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다소 아쉬운 점이다. 또한 장시는 지역의 문화적 공간이었다. 장시의 변동은 시민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한 영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삶과도 결부되어 있는데도 농민들의 실질적인 문화적 공간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는 것 같아 이 점 또한 아쉽다. 농민에게는 유통공간으로서의 장시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간으로서의 장시 또한 삶과 경험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사소한 것으로 본서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문제의식과 의의를 크게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원문은 <<지역과역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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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인문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을 어떻게 활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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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은 <<목적없는 수단>>의 <이 망명지에서, 이탈리아 일기 1992~4년>에서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글이라 단순한 대입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아감벤은 패배와 불명예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며 1994년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의 좌파 패배를 언급한다. 이탈리아 좌파의 패배는 아감벤이 보기에 대립적인 우파와의 입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스펙터클, 시장, 기업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좌파나 우파 중 "누가 실천할지를 결정해준 것"이었기 때문에 불명예라고 강조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는 좌파나 우파나 모두 스펙터클한 자본, 국가,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치뤄진 선거였고 여기서 좌파가 패배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아감벤은 지성의 완전한 부패를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진보주의를 기만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한다. 장-클로드 밀네르의 글을 인용하면서 더욱 그 이유를 명시하는데, 밀레르는 '진보주의'를 다음과 같은 타협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혁명은 자본, 권력과 타협해야 하곤 했다. 마치 교회가 근대 세계와 협정을 맺어야 했듯이 말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주의의 전략을 이끌던 좌우명이 그런 식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모든 것에 양보해야 한다. 반대파와 모든 것을 화해해야 한다. 지성은 텔레비전, 광고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은 자본과 화해하며, 언론의 자유는 스펙터클한 국가와 화해하고, 환경은 산업발전과 화해하며, 과학은 의견과 화해하고, 민주주의는 투표기계와 화해하며, 죄의식, 개종은 기억, 충실성과 화해해야 한다."(148쪽)

이상과 같은 타협적인 전략이 좌파를 모든 영역에서 화해의 도구와 합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선거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우파가 별 어려움 없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구와 합의를 그저 사용하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패배가 아니라 불명예라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와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한국의 좌파는 밀네르를 인용한 아감벤의 주장처럼 '진보주의'는 아닌가? 한국의 좌파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니 무엇을 할 것인가? 스펙터클, 자본, 권력과의 타협 아니면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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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권력의 공간 지배와 지도로 재현한/된 지역, 국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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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풀어쓴 글을 참조하여 <<목적없는 수단>> 제2부를 '미학-정치적 실험'으로 붙여본다. 제2부는 아감벤의 사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은 범부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일단 아감벤은 정치철학자로 소개되고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호모사케르로 표상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철학과도 연관되지만 또 다른 측면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서 의미있을 것 같다. 물론 오독에 의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보고 그 소통가능성을 몸짓, 언어, 얼굴을 통해 찾는다.

제2부
5. 몸짓에 관한 노트  


아감벤은 19세기 말경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렸다고 선언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린 시대는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그 몸짓에 집착하며 잃어버린 것을 영화를 통해 되찾고자 하며, 동시에 영화에 그 상실을 기록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이율배반적인 극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한편으로 몸짓의 사물화이자 말소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디 그대로의 잠재력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이미지에 작동하는 마법인 일종의 ‘구속’ 또는 사물을 마비시키는 힘을 풀어야 하며 이미지를 몸짓 쪽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미지를 몸짓으로 되돌아하게 하는 장치임을 강조한다. 더불어 영화의 중심은 몸짓에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윤리와 정치 분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바로의 지적을 받아 들여 몸짓을 행동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행위와 제작과 구별한다. 즉, 몸짓의 특징은 “그것이 생산되거나 행위되는 것이 아니라, 맡고 짊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에토스(윤리와 정치)의 영역을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열어젖힌다고 한다. 더 나아가 만일 제작이 목적의 관점에서 수단이고 행위가 수단 없는 목적이라면, 몸짓은 도덕을 마비시키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드리고 그런 이유로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몸짓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곳은 그 자체로 목적인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행동(몸짓)을 소통수단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초월성도 없이 말 고유의 매개성 속에서 그 자체의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그 말을 전시한다는 뜻이며 이런 의미에서 몸짓은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짓은 말해야 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 매개성으로써의 “인간의 언어활동-안에-있음”이며 항상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말과 입을 틀어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억과 말이 안 나올 때 얼버무리려고 배우가 즉석해서 하는 연기인 ‘개그’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몸짓, 철학, 영화는 근접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접성의 지점을 순수 몸짓성, 즉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의 개그, 치유할 수 없는 ‘언어장애’로서 전시하는 개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치를 순수 수단의 영역으로 인간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몸짓성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6. 언어와 인민
아감벤은 알리스 벡커-호의 한계는 있지만 독창적인 테제(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를 통해 언어와 인민 사이의 균일한 관계를 문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모든 정치 문화는 인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 정치이론과 근대의 언어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불명료한 어떤 것(인민 개념)을 좀 더 불명료한 어떤 것(언어 개념)의 도움을 받아 명확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거의 자연적인 유기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정치이론은 다수성의 사실(인민, 공동체)을 설명 또는 증명하지도 못하고 전제해야 하듯이, 언어학도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하며, 이 두 가지 사실의 단순 대응이야말로 근대 정치담론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시와 아르고의 관계가 이런 대응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집시와 인민의 관계는 아르고와 언어의 관계와 같다고 하며 “모든 인민은 패거리이자 ‘코키유’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이자 ‘아르고’”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정치적 상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착적이고 집요한 기계들은 갑작스레 그 권력을 상실할 것이며, 인민이라는 관념은 그 수호자이자 발현물인 근대 국가에 의해 무의미해져 그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공허한 받침대에 불과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라는 개념과 그 어떤 국가적 위엄도 갖지 않은 언어들은 시민권 개념 안에서 재코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언어, 인민, 국가는 사악하게 꼬여 있는데, 아감벤은 모든 인민은 집시이고, 모든 언어는 은어라는 테제가 이런 꼬임을 푼다고 한다. 그리고 이 테제는 서구 문화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출현했지만 오해되고 지배적인 개념화로 되돌려졌을 뿐인 다양한 언어활동의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체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말한다는 사실[행동]과 다수성의 사실[공동체]이 한 순간 명확하게 되는 이런 중단의 형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경우에서 쟁점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며 철학적이라고 강조한다.

7.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전략가
아감벤은 기 드보르의 책을 오늘날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스펙터클의 사회의 비참과 예속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엄격한 분석이라고 전제하고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해야하며 순수한 지성의 역량[잠재태]에서 행동하는 어떤 독특한 전략가의 저작, “지성의 능력 또는 자유의 작전을 위한 전략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타스마고리아
아감벤은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궁전이 맑스의 「상품의 물질적 성격과 그 비밀」에 강한 인상을 끼쳤다고 본다. 그리고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 즉 그 극단적 형태에 도달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이 명백한 맑스의 흔적 위에 세우는 몸짓은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따라서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 궁전은 스펙터클에 대한 예언, 혹은 오히려 19세기가 20세기에 대해 꾸었던 악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상황주의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밤
아감벤은 발푸르기스의 밤, 즉 최후의 심판을 둘러싸고 기 드보르와 드보르가 비교해도 좋다고 한 칼 크라우스를 대비한다. 칼 크라우스의 『세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1952)에서 “히틀러에 대해서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이 잔혹한 기지가 묘사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직면했을 때 풍자가 보여주는 무능을 표시한다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에 반해 드보르의 담론은 풍자가 입을 다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며, 언어활동의 옛 집(그리고 문학 전통)은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되고 변조된다고 한다. 즉, 크라우스는 언어를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만들면서 이 상황에 대처한다면 드보르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 참이 거짓의 한 계기로서 인정됐을 때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에서의 최후의 심판과 스펙터클의 발푸르기스의 밤은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상황
아감벤은 상황이란 “집단적으로 통합된 환경을 조직하고 주변의 사건들로 자유롭게 유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구축된 삶의 순간”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상황의 실제 본성은 우리가 상황을 예술의 종언과 자기파괴 이후에, 그리고 니힐리즘의 시험을 거치는 삶의 이행 이후에 역사적으로 위치시키는 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상황 그 자체의 고유한 장소는 삶과 예술이 서로 차이나지 않는 지점이며, 삶과 예술 모두 동시에 결정적인 변신을 겪는 지점이며, 결국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삶을 무능하게 만들기 위해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매우 구체적이지만 정반대의 기획을 제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점은 상황주의자들이 전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어나는 곳이며, 니체가 말한 자기 사유의 결정적 실험을 위치시키는 비참한 무대이며, 세계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메시아적 전위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지점, 즉 구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잠재태의 현실화가 아니라 차후에 있을 역량의 해방이며, 여기서 몸짓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짓은 삶과 예술, 현실태와 잠재태, 일반과 특수, 텍스트와 상연이 마주치는 이 교차점을 가리키며, 몸짓 때문에 “공통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는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아우슈비츠/티미쇼아라
아감벤은 오늘날 세계 정치가 기 드보르의 『논평』(1988)의 시나리오를 성급히 패러디한 연출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구의 인민민주주의들의 집중된 스펙터클과 서구 민주주의들의 산재된 스펙터클이 통합된 스펙터클 속에서 하나의 실체로 통일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테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된 스펙터클을 위해 동구 유럽의 정부는 레닌주의 정당의 추락을 방치하였으며 서구 유럽의 정부는 다수결의 투표기계와 미디어의 언론통제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평형, 사유와 소통의 실질적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루마니아혁명을 상징하는 티미쇼아라는 극단 지점을 대표한다고 한다. 즉, 텔레비전과 비밀경찰의 통합된 스펙터클은 위조(가짜)를 진짜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제 진짜는 가짜의 필연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며 이렇게 참과 거짓은 식별불가능하게 되었고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티미쇼아라는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의 아우슈비츠이며,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예전처럼 쓰고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티미쇼아라 이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셰키나
아감벤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셰키나의 고립”이라고 불렀던 것(앎과 삶의 분리)을 우리 시대의 조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즉 구체제에서는 인간이 지닌 소통적 본질의 외화가 스스로를 공통의 토대 역할을 하는 전제조건으로 실체화했다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이 소통성 자체가 자율적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소통가능성 자체가 소통을 막게 되었고, 인간들은 자신을 이어주는 것에 의해 분리되었으며, 저널리스트들과 언론 통치가들은 인간의 언어적 본성을 소외시키는 새로운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극단의 지점에서 언어활동은 모든 것의 무를 계시하며 숨겨지며 분리된 채 머물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운명 짓는 권력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시대는 처음부터 인간들이 각자의 고유한 언어적 본질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시대이며, 그렇기에 현대 정치는 지구 전체에 걸쳐 전통과 신앙, 이데올로기와 종교, 정체성과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비우는 파괴적인 언어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들만이 전제조건도 국가도 없는 공동체, 즉 공통적인 것을 무화시키고 운명 짓는 권력이 평정되는 곳의 첫 번째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톈안먼
아감벤은 세계 정치가 국가형태의 마지막 진화단계인 통합된 스펙터클-국가(혹은 스펙터클-민주주의 국가)로 황급히 달려간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스펙터클-민주주의 조직은 유례없는 최악의 참주정이 될 위험이 있으며, 그 최악의 참주정이 맡은 임무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인류가 생존하도록 관리하는 것이지만 그 성공은 확실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어쨌든 스펙터클-국가는 모든 국가처럼 사회적 유대가 아니라 와해에 바탕을 둔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스펙터클-국가는 그 내부에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실제적인 귀속조건으로도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진정한 임의의 독특성을 대량으로 발생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정치는 국가에 맞서 단순히 사회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한다. 톈안문 사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즉 톈안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공통된 삶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귀속의 전제나 조건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속 자체, 즉 자신이 고유하게 언어활동-안에-있음을 고유화하려는 독특성, 그 때문에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주체적이지도 사회적으로 안정되지도 않은 새로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8. 얼굴  


아감벤에 의하면 인간만이 열림 속에 있고 겉모습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며 빛을 발한다고 한다. 이는 언어활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겉모습(얼굴)은 인간에게 진리를 위한 투쟁의 장소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얼굴은 공동체의 유일한 장소, 유일하게 가능한 도시로 얼굴의 드러냄은 언어 자체의 드러냄이고 이런 드러냄은 다만 열림이며, 그저 소통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출은 정치의 장소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거나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키며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현시해야 하는 겉모습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를 재인할 수 없는 겉모양이 된다. 얼굴은 진리의 장소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직접적으로 가장의 장소이자 환원불가능한 비고유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은 가장 공하고도 비실체적인 것, 즉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춰져 있는 것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 자기 자신이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겉모습 자체를 겉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정치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국가권력은 무엇보다도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무엇보다 순수한 소통가능성(즉, 언어활동)을 소통하기 때문에, 정치는 인간의 얼굴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소통적 텅 빔으로서 떠오르며, 정치가들과 미디어 통치가들은 이 텅 빈 공간을 확실하게 통제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굴이고 오로지 얼굴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은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 참과 거짓,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안면이 함께-있음이며, 따라서 얼굴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안면들의 동시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감벤은 얼굴은 바깥이며, 모든 고유성,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차이나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얼굴은 또한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며. 그 문턱에서만 모든 양태와 성질은 순전히 소통가능해지며 얼굴을 찾는 곳에서만 바깥이 도래하고 외부성과 마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되라고, 문턱으로 가라고, 고유성이나 능력의 주체로 머물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을 넘어서 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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