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풀어쓴 글을 참조하여 <<목적없는 수단>> 제2부를 '미학-정치적 실험'으로 붙여본다. 제2부는 아감벤의 사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은 범부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일단 아감벤은 정치철학자로 소개되고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호모사케르로 표상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철학과도 연관되지만 또 다른 측면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서 의미있을 것 같다. 물론 오독에 의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보고 그 소통가능성을 몸짓, 언어, 얼굴을 통해 찾는다.
제2부
5. 몸짓에 관한 노트
아감벤은 19세기 말경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렸다고 선언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린 시대는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그 몸짓에 집착하며 잃어버린 것을 영화를 통해 되찾고자 하며, 동시에 영화에 그 상실을 기록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이율배반적인 극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한편으로 몸짓의 사물화이자 말소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디 그대로의 잠재력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이미지에 작동하는 마법인 일종의 ‘구속’ 또는 사물을 마비시키는 힘을 풀어야 하며 이미지를 몸짓 쪽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미지를 몸짓으로 되돌아하게 하는 장치임을 강조한다. 더불어 영화의 중심은 몸짓에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윤리와 정치 분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바로의 지적을 받아 들여 몸짓을 행동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행위와 제작과 구별한다. 즉, 몸짓의 특징은 “그것이 생산되거나 행위되는 것이 아니라, 맡고 짊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에토스(윤리와 정치)의 영역을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열어젖힌다고 한다. 더 나아가 만일 제작이 목적의 관점에서 수단이고 행위가 수단 없는 목적이라면, 몸짓은 도덕을 마비시키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드리고 그런 이유로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몸짓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곳은 그 자체로 목적인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행동(몸짓)을 소통수단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초월성도 없이 말 고유의 매개성 속에서 그 자체의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그 말을 전시한다는 뜻이며 이런 의미에서 몸짓은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짓은 말해야 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 매개성으로써의 “인간의 언어활동-안에-있음”이며 항상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말과 입을 틀어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억과 말이 안 나올 때 얼버무리려고 배우가 즉석해서 하는 연기인 ‘개그’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몸짓, 철학, 영화는 근접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접성의 지점을 순수 몸짓성, 즉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의 개그, 치유할 수 없는 ‘언어장애’로서 전시하는 개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치를 순수 수단의 영역으로 인간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몸짓성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6. 언어와 인민
아감벤은 알리스 벡커-호의 한계는 있지만 독창적인 테제(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를 통해 언어와 인민 사이의 균일한 관계를 문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모든 정치 문화는 인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 정치이론과 근대의 언어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불명료한 어떤 것(인민 개념)을 좀 더 불명료한 어떤 것(언어 개념)의 도움을 받아 명확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거의 자연적인 유기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정치이론은 다수성의 사실(인민, 공동체)을 설명 또는 증명하지도 못하고 전제해야 하듯이, 언어학도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하며, 이 두 가지 사실의 단순 대응이야말로 근대 정치담론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시와 아르고의 관계가 이런 대응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집시와 인민의 관계는 아르고와 언어의 관계와 같다고 하며 “모든 인민은 패거리이자 ‘코키유’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이자 ‘아르고’”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정치적 상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착적이고 집요한 기계들은 갑작스레 그 권력을 상실할 것이며, 인민이라는 관념은 그 수호자이자 발현물인 근대 국가에 의해 무의미해져 그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공허한 받침대에 불과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라는 개념과 그 어떤 국가적 위엄도 갖지 않은 언어들은 시민권 개념 안에서 재코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언어, 인민, 국가는 사악하게 꼬여 있는데, 아감벤은 모든 인민은 집시이고, 모든 언어는 은어라는 테제가 이런 꼬임을 푼다고 한다. 그리고 이 테제는 서구 문화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출현했지만 오해되고 지배적인 개념화로 되돌려졌을 뿐인 다양한 언어활동의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체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말한다는 사실[행동]과 다수성의 사실[공동체]이 한 순간 명확하게 되는 이런 중단의 형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경우에서 쟁점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며 철학적이라고 강조한다.
7.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전략가
아감벤은 기 드보르의 책을 오늘날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스펙터클의 사회의 비참과 예속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엄격한 분석이라고 전제하고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해야하며 순수한 지성의 역량[잠재태]에서 행동하는 어떤 독특한 전략가의 저작, “지성의 능력 또는 자유의 작전을 위한 전략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타스마고리아
아감벤은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궁전이 맑스의 「상품의 물질적 성격과 그 비밀」에 강한 인상을 끼쳤다고 본다. 그리고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 즉 그 극단적 형태에 도달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이 명백한 맑스의 흔적 위에 세우는 몸짓은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따라서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 궁전은 스펙터클에 대한 예언, 혹은 오히려 19세기가 20세기에 대해 꾸었던 악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상황주의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밤
아감벤은 발푸르기스의 밤, 즉 최후의 심판을 둘러싸고 기 드보르와 드보르가 비교해도 좋다고 한 칼 크라우스를 대비한다. 칼 크라우스의 『세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1952)에서 “히틀러에 대해서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이 잔혹한 기지가 묘사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직면했을 때 풍자가 보여주는 무능을 표시한다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에 반해 드보르의 담론은 풍자가 입을 다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며, 언어활동의 옛 집(그리고 문학 전통)은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되고 변조된다고 한다. 즉, 크라우스는 언어를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만들면서 이 상황에 대처한다면 드보르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 참이 거짓의 한 계기로서 인정됐을 때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에서의 최후의 심판과 스펙터클의 발푸르기스의 밤은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상황
아감벤은 상황이란 “집단적으로 통합된 환경을 조직하고 주변의 사건들로 자유롭게 유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구축된 삶의 순간”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상황의 실제 본성은 우리가 상황을 예술의 종언과 자기파괴 이후에, 그리고 니힐리즘의 시험을 거치는 삶의 이행 이후에 역사적으로 위치시키는 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상황 그 자체의 고유한 장소는 삶과 예술이 서로 차이나지 않는 지점이며, 삶과 예술 모두 동시에 결정적인 변신을 겪는 지점이며, 결국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삶을 무능하게 만들기 위해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매우 구체적이지만 정반대의 기획을 제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점은 상황주의자들이 전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어나는 곳이며, 니체가 말한 자기 사유의 결정적 실험을 위치시키는 비참한 무대이며, 세계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메시아적 전위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지점, 즉 구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잠재태의 현실화가 아니라 차후에 있을 역량의 해방이며, 여기서 몸짓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짓은 삶과 예술, 현실태와 잠재태, 일반과 특수, 텍스트와 상연이 마주치는 이 교차점을 가리키며, 몸짓 때문에 “공통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는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아우슈비츠/티미쇼아라
아감벤은 오늘날 세계 정치가 기 드보르의 『논평』(1988)의 시나리오를 성급히 패러디한 연출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구의 인민민주주의들의 집중된 스펙터클과 서구 민주주의들의 산재된 스펙터클이 통합된 스펙터클 속에서 하나의 실체로 통일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테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된 스펙터클을 위해 동구 유럽의 정부는 레닌주의 정당의 추락을 방치하였으며 서구 유럽의 정부는 다수결의 투표기계와 미디어의 언론통제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평형, 사유와 소통의 실질적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루마니아혁명을 상징하는 티미쇼아라는 극단 지점을 대표한다고 한다. 즉, 텔레비전과 비밀경찰의 통합된 스펙터클은 위조(가짜)를 진짜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제 진짜는 가짜의 필연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며 이렇게 참과 거짓은 식별불가능하게 되었고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티미쇼아라는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의 아우슈비츠이며,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예전처럼 쓰고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티미쇼아라 이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셰키나
아감벤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셰키나의 고립”이라고 불렀던 것(앎과 삶의 분리)을 우리 시대의 조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즉 구체제에서는 인간이 지닌 소통적 본질의 외화가 스스로를 공통의 토대 역할을 하는 전제조건으로 실체화했다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이 소통성 자체가 자율적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소통가능성 자체가 소통을 막게 되었고, 인간들은 자신을 이어주는 것에 의해 분리되었으며, 저널리스트들과 언론 통치가들은 인간의 언어적 본성을 소외시키는 새로운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극단의 지점에서 언어활동은 모든 것의 무를 계시하며 숨겨지며 분리된 채 머물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운명 짓는 권력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시대는 처음부터 인간들이 각자의 고유한 언어적 본질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시대이며, 그렇기에 현대 정치는 지구 전체에 걸쳐 전통과 신앙, 이데올로기와 종교, 정체성과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비우는 파괴적인 언어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들만이 전제조건도 국가도 없는 공동체, 즉 공통적인 것을 무화시키고 운명 짓는 권력이 평정되는 곳의 첫 번째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톈안먼
아감벤은 세계 정치가 국가형태의 마지막 진화단계인 통합된 스펙터클-국가(혹은 스펙터클-민주주의 국가)로 황급히 달려간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스펙터클-민주주의 조직은 유례없는 최악의 참주정이 될 위험이 있으며, 그 최악의 참주정이 맡은 임무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인류가 생존하도록 관리하는 것이지만 그 성공은 확실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어쨌든 스펙터클-국가는 모든 국가처럼 사회적 유대가 아니라 와해에 바탕을 둔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스펙터클-국가는 그 내부에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실제적인 귀속조건으로도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진정한 임의의 독특성을 대량으로 발생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정치는 국가에 맞서 단순히 사회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한다. 톈안문 사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즉 톈안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공통된 삶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귀속의 전제나 조건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속 자체, 즉 자신이 고유하게 언어활동-안에-있음을 고유화하려는 독특성, 그 때문에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주체적이지도 사회적으로 안정되지도 않은 새로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8. 얼굴
아감벤에 의하면 인간만이 열림 속에 있고 겉모습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며 빛을 발한다고 한다. 이는 언어활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겉모습(얼굴)은 인간에게 진리를 위한 투쟁의 장소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얼굴은 공동체의 유일한 장소, 유일하게 가능한 도시로 얼굴의 드러냄은 언어 자체의 드러냄이고 이런 드러냄은 다만 열림이며, 그저 소통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출은 정치의 장소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거나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키며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현시해야 하는 겉모습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를 재인할 수 없는 겉모양이 된다. 얼굴은 진리의 장소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직접적으로 가장의 장소이자 환원불가능한 비고유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은 가장 공하고도 비실체적인 것, 즉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춰져 있는 것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 자기 자신이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겉모습 자체를 겉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정치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국가권력은 무엇보다도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무엇보다 순수한 소통가능성(즉, 언어활동)을 소통하기 때문에, 정치는 인간의 얼굴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소통적 텅 빔으로서 떠오르며, 정치가들과 미디어 통치가들은 이 텅 빈 공간을 확실하게 통제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굴이고 오로지 얼굴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은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 참과 거짓,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안면이 함께-있음이며, 따라서 얼굴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안면들의 동시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감벤은 얼굴은 바깥이며, 모든 고유성,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차이나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얼굴은 또한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며. 그 문턱에서만 모든 양태와 성질은 순전히 소통가능해지며 얼굴을 찾는 곳에서만 바깥이 도래하고 외부성과 마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되라고, 문턱으로 가라고, 고유성이나 능력의 주체로 머물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을 넘어서 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