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아르케북스 100
요시다 케이이치 지음, 박호원.김수희 옮김 / 민속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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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서는 한국 근대 어업사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한국의 근대 어업은 개항이후 일본인 통어, 식민지 전후 이주어촌, 그리고 식민지 중후기 조선총독부의 어업령과 어업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식민주의적 어업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번역자 중 한 분인 김수희선생님도 또 다른 책에서 지적하듯이 한국 근대 어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는 일본인 이주어촌은 식민주의적 상황을 제거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적이다. 다케구니 도도야스의 한일피시로드에서 주장하는 바를 언급하면 일본인 이주어촌의 식민성(일본과 일본 지자체의 자금적 지원과 조선총독부의 제도적 지원)을 강조하면 '식민어촌'으로 불러야 타당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식민지 어업 과정은 식민지 어업 및 수산의 '개발'이란 미명 하에 조선을 둘러싼 어획의 남발과 어장의 황폐화를 초래한 것은 당연히 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근대적 진보의 궤적이라고 볼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1954년 출간된 책답게 한일 양국의 우호에 이 책이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술한다고 하는 저자의 말처럼 이른바 조선 아니 한국의 어업 발전은 양국민의 개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현재적으로 그와 같은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출간되었다.  

다만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로, 어업 그리고 수산물의 기원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어 다시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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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협력 -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치참여
김동명 지음 / 역사공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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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협력에 관한 아래의 리뷰는 <<한일관계사연구>>(63집, 2019)에 게재한 서평(각주 제외)을 여기에 전재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일제강점기 정치사 연구는 지금까지 독립운동사 연구(저항)가 중심적이었고 점차 지배정책사 연구(지배)로 확장되었다. 최근 들어 식민지 근대() 연구와 함께 일제강점기 정치사 연구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지배권력과 지배정책의 균열에 대한 연구가 제국 일본의 다른 식민지를 중심으로 하여 적극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여전히 지배와 저항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정치사를 서술하는 연구도 지속되고 있지만 삶의 공간으로써 지역과 일상 같은 또 다른 관점에서 식민지 지배의 균열과 통치의 과정을 확인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독립운동의 가치가 여전히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저항만으로는 일제강점기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식민지민의 정치적 활동을 확인할 수 없다는 반성 아래 지역 및 일상과 직결되는 공공영역을 둘러싼 민족적지역적계급적계층적 이해관계의 표출을 정치적 활동으로 파악하여 적극 확인하고자 하는 연구로도 활성화되고 있다. 공공영역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표출은 대체적으로 자발적이지만 한시적인 각종 주민시민대회 등을 비롯해 제한적이고 한계는 있지만 제도적인 이른바 선출부문의 공직 3단체 등에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식민지 중앙의 자문기관과 달리 처음에는 자문기관으로 시작했지만 1931조선지방제도개정령에 따라 의결기관이 되는 이른바 지방의회는 다른 공직 단체보다 더 많은 피식민지민의 참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배의 측면에서든 저항의 측면에서든 중요한 정치적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지방의회는 그간의 연구에서 조선총독부의 기만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장치로 이해되며 민족사적 측면에서 식민권력과 식민지배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한편, 지방의회에 참여한 일부 조선인 지역유력자(유지)들의 친일적이고 부일적인 모습으로의 전환을 지적하고 조선인 상층자본가 또는 지역유력자의 반민족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해왔다. 이에 반해 최근 연구에서는 그러한 모습과 함께 또 다른 시각에서 식민권력과 조선인 상층자본가 또는 지역유력자와의 관계를 일방적인 동화와 협력으로 보지 않고 사안에 따라서는 대립과 갈등도 존재했음을 밝히면서 지방의회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모습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결코 지방의회가 저항의 장소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의회는 식민권력의 의도가 그 물리적 강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장이면서도 그와 상관없이 식민지민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것이 부상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지방의회는 식민권력이 식민지민의 협력을 이끌어내어 지배의 안정화를 추구하고자 했지만 불현 듯 부상하는 정치적인 것으로 인해 지배정책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일제의 난점인 지배 자체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을 폭로하는 장이기도 했다. 김동명의 󰡔지배와 협력󰡕(역사공간, 2018)도 이러한 복잡하고 중층적인 지방의회의 모습을 통해 그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고 있다.

2.

김동명의 󰡔지배와 협력󰡕은 그 부제처럼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치참여가 지니는 가능성과 한계를 중앙참정제도의 논의와 공포, 지방의회의 실제, 그리고 도()와 부() 지방의회의 정치적 전개를 통해 탐색한다. 3부로 나눠져 있는 이 책은 1<중앙참정제도 실시 논의와 공포>에서 31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저항에 부딪칠 만큼 조선에서의 지배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라는 총력전 체제 속에서 식민지민의 전시 동원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부여하고자 한 중앙참정제도를 둘러싼 제국 일본에서의 4차례 논의 과정과 실시안의 내용을 분석한다. 애초 동화의 정도에 따라 지방참정권으로부터 차츰 중앙참정권까지 부여하고자 한 일제는 오히려 대대적인 식민지민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동화를 위해 참정권 부여를 어쩔 수 없이 논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는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겨우 지방참정권 정도만 자문기관에서 시작해 의결기관이 되면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중앙참정권은 전쟁 동원이라는 강제적 의무를 지우기 위해 권리의 일부로써 실시된 차별적 귀족원 의원의 칙임과 패전으로 실시조차 하지 못한 제한된 중의원 의원 선출계획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일제의 중앙참정제도 실시 논의와 공포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가벼운 권리의 향유를 맛보면서 무거운 의무의 수행을 감수해야만 했다고 진단한다.

이어 2<지방참정제도의 실제>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부 실현된 지방참정제도의 실제를 부회와 도회를 통해 분석한다. 먼저 지방참정제도의 흐름을 1910년대 관선 자문기관인 부군참사자문회 및 부협의회, 1920년대 관민선 자문기관인 부협의회와 도평의회, 1930년대 관민선 의결기관인 부회와 도회, 마지막으로 1943년 이후 추천선 의결기관인 부회와 도회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들 기관이 자문기관에서 의결기관으로 위상이 격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 조선내 조선인과 일본인의 격차가 유지되는 매우 불완전한 형태였다고 강조한다. 이는 지방참정기관의 선거과정과 선거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일제는 이와 같은 민족적 격차를 줄이지 않을 경우 스스로 동화주의와 지배 실적을 부정하게 되고 그것을 줄일 경우 경기도회의 예처럼 지배 자체에 대립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진단한다. 물론 경남도회의 예처럼 아시아태평양전쟁기가 되면 대립과 갈등의 지역정치는 점점 소멸되어 갔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지방참정기관인 <(협의)회 및 도(평의)회의 정치적 전개>조선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절대적으로 존재했던 민족 모순을 바탕으로 식민권력에 대립하는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통해 분석한다. 구체적인 예로 도평의원 야마노의 조선인 무시 발언으로 야기된 전남도평의회의 조선인과 일본인 알력 사건, 도평의원 김기정의 조선인 무시 언행으로 시민대회로까지 확대된 경남도평의회의 김기정 징토 시민대회 사건 조선인의 관심 사안인 11교정책의 연기로 발생한 예산안 반상 사건, 조선인 거주 지역의 차별적 예산편성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초래된 부산부회의 조선인 의원 총사직 사건을 들고 있다. 이에 의하면 지방참정기관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식민권력 및 식민자와의 대립과 갈등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안팎에서 인식되고 식민정책으로써 드러날 때 이를 시정하고 조선인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사건에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치활동은 지배권력 또는 식민자와의 협상으로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결국 일제의 압도적이고 강제적인 물리력에 의해 실패로 귀결되거나 유야무야되고 봉합되고 있다. 이는 일제가 지방의회를 설치하고 그 위상을 자문기구에서 의결기구로 격상해 더 많은 협력세력을 구축하여 안정적인 지배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이들 지방의회에서조차 순조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지방의회의 구성원도 조선 사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식민권력으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매개적인 위치에서 줄다리기했지만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인해 그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지방의회의 구성원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지역의 각종 이익을 실현하려고 한 지역주민도 지방의회의 한계와 일제의 강력한 지배의욕 앞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 이를 조선에서 전개된 일제의 난점이고 지방정치의 실제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3.

김동명의 󰡔지배와 협력󰡕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지방의회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제의 식민지화가 고착화되고 심화되면서 정치적 활동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정치적인 것이 부상되는 곳이 지방의회였다. 따라서 지방의회는 식민지 지배정책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일제의 난점인 지배 자체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을 폭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능성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식민지배의 모순이 폭로된다고 해도 일시적이었고 그 해결도 요원했다. 이는 지방의회 자체가 의결기구로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하더라도 여전히 권한의 부족과 민족적 차별의 유지(同化異化의 표리관계)라는 제도적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제는 동원과 협력이 아닌 대립과 갈등에는 다시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이를 제압하고 봉합함으로써 지방의회 구성원은 물론 지역주민의 정치적 활동을 완전히 제한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이 책은 지방의회의 한계에 직면하여 그 가능성을 결국 협력의 범주에 다시 넣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방의회의 한계를 민족 모순에 대한 정치적 전개만으로 한정지어 파악하는 것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방의원 구성원 개인의 친일적 행위(사적 영역)정치적 장 안에서의 대립과 갈등(공적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더라도 그렇다고 동일한 것으로 파악해야하는지는 앞으로 논의해야할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이러한 한계에만 주안점을 둘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지방의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 정치적인 것이 어떤 것이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식민지배와 식민권력의 모순은 물론 식민지민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밝혀냄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다루지 못한 부분은 향후의 연구 과제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 책이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의 정치참여를 다루면서도 가장 직접적인 단계의 지방의회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 가장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읍면(협의)회에 대한 협력과 대립의 정치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면 일상에서 지배의 의미와 정치적인 것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지방의회의 정치적 전개를 대체적으로 민족적 대립과 갈등의 상만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지방의회가 표면적으로는 대체로 협력의 모습이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이 늘 잠재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표출되었다고 하면서 순수하게 지역의 이해에 결부된 지역 문제인 경성부협의회의 신당리 토지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예는 없어 여전히 아쉽다. 식민지 시기 일차적 모순이 민족 모순이라고 해도 계급, 계층, 세대, , 지역, 지방간의 다양한 모순이 중층적으로 존재했다. 실제 지방의회는 지역민의 삶과 그 삶의 터전으로써 지역별, 지방별, 도농별, 산업별로 다양한 몫의 요구가 부상했고 이로 인해 민족, 계급, 계층을 넘어선 결합과 연대, 타협과 협력, 갈등과 불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 책이 제시하는 지방의회의 민족적 대립과 갈등 이외에 또 다른 다양한 대립과 갈등의 정치적인 것이 부상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식민지배와 식민지민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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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생활공간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동아시아 모더니티 4
조던 샌드 지음, 박삼헌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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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샌드의 <<제국일본의 생활공간>>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제국의 회로라고 할 수 있는 태평양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고(서로 맞물려) 있는 점을 제국일본의 생활공간 속 양관, 아지노모토, 몽타주로 그린 환태평양의 사람과 이동, 문화주택, 등나무 의자, 관광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조던 샌드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제국적 근대가 글로벌한 근대와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분리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불안'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레오 칭의 표현을 빌려, 일본의 입장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쌍방에 동시에 놓였기 때문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안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제국적 근대가 민족적 히에라르키, 즉 불평등을 전제하고 강제적인 동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등나무 의자에 관한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좌식 문화에서 의자식 문화로 바꿔 동남아시아에서 군림하고자 한 일본인들의 제국적 근대는 외형적으로 의자식 문화를 통한 민족적/인종적 히에라르키를 보여주긴 하지만 가정에서는 여전히 좌식문화가 유지됨으로써 의자식의 타이완 한족과의 대면에서 오히려 역전된 형태(가역적 주장)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에로틱 그로테스크 넨센스>>에 인용된 "외부의 '야만인'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문명'이 발견 된다"는 가와무라 미나토의 통찰을 "대단히 가역적인 주장"이라고 한 미리엄 실버버그의 인용을 가져와 "식민지의 일본인 가족이 때로는 서양 제복을 착용하고 때로는 도우미도 보여주며 등나무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향해 착실히 자세를 취했을 때, 그것은 문명화된 상태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출에 의해 자신 스스로 그 상태에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자식 생활을 하는 한족의 문명과 조우했을 때, 기념할 일이 아닌 일상의 시간에서는 좌식을 계속했던 일본인 식민자는 또한 당당히 자신들 특유의 '원시성'을 연출하고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언급하는 대목이다. 이른바 가역적이라는 것은 역으로 "외부의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야만'이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던 샌즈는 제도 도쿄의 관광 코스를 통해 제국의 근대는 노골적 불평등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과 동시에 문명화와 통합의 사명이 있었다는 것이 합쳐져서 해결불가능한 딜레마와 불화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평등 없이 피지배 민족을 어떻게 동화시킬 것인가라는 식민지 지배자의 불안과 동화에 의한 복종과 문화 소멸 없이 어떻게 평등을 얻어 낼 것인가라는 피식민지 민족의 불안이 식민지 경영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역설이 제국의 다양한 일상적 만남 속에서도 전개되었고 동화와 문화적 히에라르키에 대한 일상의 불안이 제국 안을 돌아다닌 유학생들의 기록에서 줄곧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그 자체는 착취의 구조임과 동시에 문화적 불안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치이며, 권력의 스펙터클, 만남의 장, 일본 제국의 근대를 형성했던 사람과 지식과 상품이 흐르는 네트워크의 중심적 연결점으로서 제도 도쿄는 이런 '불안을 응축하고 재생산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조던 샌즈의 이 책은 제국 일본의 근대를 '제국적 근대'로 개념화하면서 그 모순과 불안의 이유를 다양한 일본제국의 생활문화사를 통해 밝히고 있는 점에서 시사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조던 샌즈는 기존의 '식민지적 근대'에는 식민본국의 근대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포함시킨 새로운 개념으로 '제국적 근대'를 사용한다. 하지만 '식민지적 근대'가 '제국적 근대'에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구분을 통해 이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심화되면 좋지 않을까.

둘째,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서로 맞물려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또는 포스트 식민주의에 의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을 불평등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물론 글로벌한 근대도 그의 표현을 밀리자면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결정권이나 '문명의 이기'가 가능하게 만든 쾌락과 표현 수단 등의 평등한 기회라는 약속을 제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글로벌한 근대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한 근대 자체도 이미 식민적일 수밖에 없음은 서발턴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불안'과 '가역적 주장'은 제국적 근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근대에도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셋째, 제국적 근대가 불평등을 전제하고 동화를 주장하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샌즈의 언급은 없지만 식민지적 근대도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면 글로벌한 근대는 불안이 없는 것인가. 오히려 근대 자체가 태생적으로 불안을 내재하고 있으며(평등을 주장하지만 평등하지 않는 현실, 항상 미뤄지는 평등) 이러한 점이야 말로 근대성은 식민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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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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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을 읽고 나의 생각과 유사하면서도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대신해 내가 다른 논문에서 일부 언급한 글을 붙여둔다. 이른바 '식민 2세'의 식민지 이후 식민지 인식에 관한 글이 이 책이라면 나의 글은 '식민 2세'의 식민지 생활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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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식민통치기간이 길어지면서 처음 50명 남짓의 재조일본인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거주 집단이 되었다. 그런 만큼 이주 시기와 거주 지역과 상태에 따라 조선인식제국의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다양한 차이 중 확실한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세대 간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식민 1세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도 않고 있고, 1세대조차 도래자신도래자로 스스로를 구분하고 있으며, 식민 2세대(조선에서 태어난) 또는 식민 1.5세대(조선에서 자라난) 중 일제 말기에 성인이 되는 세대와 패전 후 성인이 되는 세대로 구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식민 1세와의 차이가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문화 및 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 패전 이후 고착화된 식민지 지배의 망각과 봉인,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그동안 숨겨왔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식민지 경험을 하나 둘 씩 말하기 시작한 세대가 식민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거나 자라나 패전에 의해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닌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패전 이후 망각의 매커니즘 속에서 부유하던 이들은 1970년대를 전후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출판한 체험기, 수기, 소설, 그리고 인터뷰를 토대로 식민 2세들에 대한 연구들이 21세기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식민 2세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는 니콜(Nicole Leah Cohen)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은 이 연구에서 1940년대 식민지 조선, 그 중에서도 경성의 재조일본인 상류계층에서 자라난 京城子제국의 아이들로 명명하며 그 경계적인 정체성과 문화적 혼종성을 통해 탈민족주의적인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그 외 문화, 문학계에서는 식민 2세 작가들의 작품 분석을 통해 식민 2세의 경계자적 위치와 내셔널리즘 비판의 테제로 삼고 있다.


이들 연구에서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가 구분되는 첫 번째 이유는 고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으로 이주해 거주한 식민 1세대는 한국을 집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일시적인 거주지이며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 식민 2세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처럼 일본이 고향일 수 없으며 도리어 조선이 고향이 됨으로써 돌아갈 조국도 없는 일본과 조선의 낀 세대일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식민 1세대는 식민지에 거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본토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조선인 앞에 군림하는 제국의식속에서 살았고 그들의 자식에게도 일본인다움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다. 반면, 식민 2세대는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거의 비슷하기는 했지만 완전하지 않는 위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은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경계적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세대 구분론은 먼저, 식민 2세대가 자신이 태어난 조선을 그리워하며 그들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식민지배의 실상을 반성하든 아니면 단순히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든 사후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자적 삶이나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인식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으로서 느끼며 품었던 생각과 인식이 아니라 패전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정착하면서 느끼며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인 것이다. 물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주의와의 만남이든 고통 받는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든 전후 반성 없이 기억을 봉인하고 망각하는 일본의 과거 인식을 문제 삼으며 스스로가 식민자였으며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고 느끼는 감정과 인식이 전후 각각의 국가에 만연하는 내셔널리즘에 따라 과거를 한 방향으로만 보는 시각을 해체할 수 있는 탈민족적이고 트랜스내셔널한 시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는 여전히 주목해야할 긍정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인식이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세대 구분을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 이주하는 시기적 차이와 더불어 지역별, 계층별, 젠더별로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여 다양한 재조일본인 상을 확인하고 이를 구축하는 것이 역사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군다나 식민 1세대는 물론 태어난 고향이 일본이기에 돌아갈 조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조선에 뿌리박고 제국의식속에서도 조선본위또는 지역본위’, 예를 들어 경성의식또는 부산의식을 앞세우면 살아갔다. 그들은 살아서 돌아갈 고향을 일본에 두고 있었지만 죽어서도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조선에 눕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성공한 재조일본인들은 더욱 그랬다. 패전이 되었을 때 자신이 모은 농장과 재산을 조선에 두고 갈 수 없어서 한국인으로 귀화하고자 했던 군산의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 야소야의 일화는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식민 1세대가 고향으로 귀환을 생각하며 조선에서 거주했다면 일본인 거주지마다 조성된 무덤들은 어떤 의미일까. 오히려 이들은 조선에 건너와 뼈를 묻을 각오였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재조일본인 상층부의 인물들도 조선에서 죽으면 자기가 거주한 조선의 거주지와 일본의 고향에서 각각 장례 의식을 거행했지만 결국 조선에서 묻힌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1세대와 2세대를 태어난 고향과 조국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식민 2세대는 오히려 일본인다움또는 본토 일본인이 되기 위한 교육과 활동에 앞장섰다. 그들은 본국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동일한 여가의 대부분과 소비를 추구했고 자주 일본 스타일의 집에서 사는 동시에 신사와 사찰에 예배하거나 일본 상점에서 쇼핑하거나 다른 일본인들과 클럽이나 이웃 단체에서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들은 일본의 각 지역 사람들이 섞이기도 하고 조선이라는 풍토적 속성도 가지고 있었기에 절충적인 문화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일본 문화라고 여기며 살았다. 또 다른 식민 2세 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민 2세들 중 성인으로 조선에서 활동하거나 조선과 일본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은 스스로 내선일체의 선봉에서 활동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과 패전 이후 일본에서 등단한 작가들은 등단의 차이와 전후 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 세대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식민 2세로서 제국의 딸이 된 아사노 시게노를 볼 때, 이들은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그리고 제국의 딸이라는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재조일본인들의 다양한 모습과 정체성은 세대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조선으로 건너온 시기적 차이, 태생적 차이, 계층적 차이, 지역적 차이, 젠더적 차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가 축적되고 난 이후 이들 차이를 통해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재조일본인 연구는 보다 다양한 군상들을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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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학교.식민지 - 지배를 위한 종교-교육
히우라 사토코 지음, 이언숙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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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지배는 이데올로기 중 종교, 특히 신사는 민족적으로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잘 전파되지 못하고 식민자인 일본인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그렇게 때문에 신사 또는 신사를 둘러싼 지배 이데올로기는 학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학교야 말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파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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