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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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경제적 식민성의 모습을 제3세계의 도시화와 슬럼이라는 공간과 거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물론 제3세계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의 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슬럼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 세계은행, IMF 등의 구조조정과 그 구조조정을 자신들의 치부수단으로 만들려는 '민족주의자(이런 걸 민족주의자들이라 해야할까? 어쨌든 현상은 그렇다)'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조정이 세상을 또한 한 국가를 '진보'시킬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환상이며 그러한 환상을 조장한 저 신자유주의도 이제는 그러한 환상실현을 포기하고 슬럼 도시를 적으로 돌리며 전쟁으로 응수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슬럼이 지구를 뒤덮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는 시가전이 전개되며 곧 인류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파국적 '예언서;다. 

 

하지만 저자는 파국을 얘기한다고 해서 미래를 비관과 냉소로 뒤덮지는 않는다. 파국은 경고이며 조건부이다. 그는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한 저항의 힘을 또 다시 슬럼이라고 하는 공간과 그 주민에게서 찾는다.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슬럼을 낭만적으로 사유하는 포스트이론들과 대결하는 지점은 흥미롭고 그의 다음 저작을 기대케 한다. 개인적으로 <<뉴욕열전>>과 함께 읽으면 두 책의 차이와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현실을 두텁게 묘사하며 직시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뉴욕열전>>은 슬럼 속의 인간들이 어떻게 희망을 만들고 있는지를 여러 형태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한가지 첨언하면, 우리가 빈곤과 슬럼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다른 빈곤과 슬럼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어쩌면 우리도 경제적 식민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자신의 행복이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자신의 행복과 더불어 이웃의 행복도 생각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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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분석 -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카이로스총서 25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 갈무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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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는 주인공 오스카어의 북소리가 나치의 군대행진곡을 왈츠로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오스카어의 개인적이며 타자화된 리듬이 획일적이고 동일한 국가적 리듬(나치즘)을 변주하는 리듬의 다리듬성과 또 다른 의미에서 조화리듬성을 보여준 기가막힌 예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장면이었다. 당연히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이러한 제한된 예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 책은 시론적 분석이기에 수많은 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향후 그러한 작업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 시도의 예가 이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앙리 르페브르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근대의 몸과 공간을 일상이라는 시간을 통해 분석하며 그 해방의 중요한 요소로 리듬에 주목한다. 일상이 국가권력과 미디어의 '현재'라는 이미지에 식민화되어 진부한 것으로 무화되었다면, 르페브르는 일상을 리듬으로 '현존'시킨다. 따라서 리듬분석은 몸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몸안과 몸밖의 상호관계를 사유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리듬의 속성을 다리듬성과 조화리듬성으로 정의하며 식민화된 근대의 리듬 자체를 동일리듬성과 부정리듬성으로 비판한다. 근대의 몸과 공간이 식민화된 이유는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발산하는 진부한 반복의 '현재(표상)'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성 개념이 진부한 것으로 오염되었다. 그렇기에 앙리 르페브르는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발산하여 현실을 오염시키는 진부한 '현재'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험과 감각적인 것을 통해 현실을 '현전'시키는 리듬에 주목한다. 일상성을 반복과 차이의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과 사건은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리듬은 기계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발견과 창조, 순환적인 것과 선형적인 것, 영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본다. 이처럼 리듬분석은 헤겔의 '정-반-합', 맑스의 '경제-사회-정치'와 같이 '시간-공간-에너지', 즉 '멜로디-하모니-리듬'의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기반한다. 결국 리듬분석은 식민화되어 있는 시공간의 동일리듬성과 부정리듬성을 다리듬성과 조화리듬성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리듬에 의한 몸의 회복과 식민화된 공간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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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 문화동역학 라이브러리 3
정병욱.이타가키 류타 엮음 / 소명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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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푸코의 책<<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2)을 읽어서일까?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소명출판, 2013)는 일기 등 에고도큐멘트가 이른바 권력에 의한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품행' 지도는 물론이고 도리어 그에 대항하는 '대항품행'의 형성까지 생성시키는 이중적인 것임을 잘 드러내준다. 일단 이 책은 서구 역사학에서 최근 들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에고도큐멘트에 관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에고도큐멘트는 '자기증언'이라는 실천적 행위의 글들을 수집하여 연구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증언의 자료란 일기를 비롯한 자서전(소설 포함), 편지 등 개인이 쓴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간 역사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이용되던 지극히 일반적인 인물들의 개인적인 기록물들이 이른바 민중사로부터 시작된 아래(밑)으로부터의 역사 및 미시사의 영향아래 새로운 역사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기는 근대 이전에도 쓰여지긴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적이지 않은 공공성을 지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일기를 썼고 이를 가족이 모두 열람하는 등 전혀 사적이지 않았다. 반면 근대에는 프라이버시 탄생과 함께 일기는 숨겨야하는 지극히 사적인 것을 표방하며 대중적으로 폭넓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부모와 선생을 통한 국가권력의 검열을 당하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근대의 일기는 사적이면서도 근대 이전과 다른 의미에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연구에서 근대적 개인(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일기쓰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기는 근대적 개인의 주체성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장치로 사용이 되었다고 해서 단순히 자아성찰이나 개인의 일상을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집단기억을 드러내주는 창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고도큐멘트라는 지위를 획득하며 일기쓰기와 일기의 내용은 주체를 형성하는 측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일기와 같은 자기증언은 그러한 국가권력이 인도하고 지도하는 품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에 대한 대항품행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개별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니시카와 유코의 <근대에 일기를 쓴다는 것의 의미>에서는 국민교육장치로써의 일기와 그로부터의 일탈의 예를 동시에 제기하는데 후자의 예가 나카이 히데오의 반전일기와 전쟁 직전 농민들을 봉기시켜 자치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여성 아나키즘 운동가인 야기 아키코의 일기이다. 둘다 국가권력에 의한 품행의 내면화된 신체로부터 일탈된 모습을 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편, 김무용의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유족의 자서전 분석>에서는 일기는 아니지만 민간인 학살 유가족의 그간 생활과 달리 자서전 쓰기가 국가에 충성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문제삼아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대항품행을 형성하였다는 실례를 그/그녀들의 자서전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학살 이후 권력에 의해 강요된 삶(반공투사)을 자선전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 형성과 대항품행의 장을 열고 있음은 주목할만 하다. 이처럼 이 책은 일기와 같은 자기증언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권력과 개인과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읽고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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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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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는 말그대로 '삶의 방식'이다. 즉,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한다. 교육을 통해서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세계가 구성한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그런 삶의 방식이 누가 만든 방식이고 누가 작동시키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삶을 '인간쓰레기(잉여인간)'로, '벌거벗은 목숨'으로 '생존'만을 영위하는 삶이라고 문제제기한다. 결국 이 책은 근대 자본권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불확실한 사회에 맞게 살도록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해결책은 전혀 없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스로 "질문은 던지지만 명쾌한 답변은커녕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답변이 독단적이고 시기상조이며, 사람들을 호도할 여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요컨대, 앞에서 말한 변화들로 인해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예상 손익을 계산하고 결과를 평가하면서 계획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 그리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런 장애물들을 통제하려 할 때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도전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대처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내가 이제껏 노력해 왔고 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바우만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의 구축이 지닌 문제들을 아주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거시적인 것까지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다. 인간쓰레기의 탄생과 확대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어떻게 보면 바우만의 문제제기는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아예 잠재적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을 다시 확인해야한다. 인간쓰레기 또는 벌거벗은 생명을 명명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자본권력이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하고 있다. 나아가 삶의 방식도 그들이 만드는 것에 개별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인간들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야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를 쓰레기로 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다. 우리들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한에서 말이다. 이건 가난과도 관련이 있다. 부유해 지려고 하는 삶은 어쩌면 자본권력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이미 쓰레기가 되는 삶이 되는 거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든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면 전혀 쓰레기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 잣대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건 이미 스스로 인간쓰레기가 된 삶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NGO 등이 실행하는 각종 사회 개혁프로그램 또는 이른바 약자 또는 타자에 대한 긍적적이고 실천적 활동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한편으로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이 의미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실천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하는 삶의 방식 또한 자본권력이 만든 것이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조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런 작은 실천이 자본권력의 삶의 방식을 거스르는 또는 빗나가게 하는 행위이면 오히려 자본권력을 문제삼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도 바우만의 숨은 얘기기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우만의 말은 작고 큰 실천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행위 또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방식일 때 더욱 암울한 현재를 형성한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고민은 오히려 작은 실천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실천이 자본에 포섭 또는 활용되지 않을까 더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작은 실천적 행위가 실은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니까.

 

또한 이런 점에서 바우만은 중요한 점을 언급한다. 근대 자본권력이 만든 삶의 방식은 이미 전제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그 잣대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는 개별존재로 파편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혼자서 고군분투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자본권력이 만들고 작동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답도 어느 순간 나와 있는 듯하다. 그가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연결을 의미하는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만이 우리가 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더 나아가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각각의 역할과 각각의 생각과 각각의 고민과 각각의 행위가 어울어져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연대야말로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며 권력을 향유하고 하는 근대 자본권력의 힘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타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공간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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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타자의 은폐 -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트랜스라틴 총서 5
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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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셀의 <<1492년, 타자의 은폐>>는 이른바 1492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서구 역사학 및 이를 자기동일화한 라틴 아메리카의 서구지향적 역사학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을 라틴 아메리카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은 그의 강연록을 묶은 것으로 그 강연이 전개된 시기가 1992년을 전후한 콜롬버스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각종 행사에 자극받아 행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논의의 핵심은 1492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에 두어져 있다. 기존의 역사가 1492년을 아메리카 역사의 시작이라고 했다면 듀셀은 오히려 1492년을 아메리카 역사의 은폐(종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히려 유럽중심주의적인 '근대성 신화'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이때 근대성의 신화는 '희생 신화'라는 것이다. 즉, 문명과 문화로 대표되는 자본의 승리(여섯번째 태양)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며 아메리카 타자들의 수많은 학살은 그 희생에 다름 아니며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폭로한다. 따라서 듀셀은 글의 모두에 밝힌 근대성의 두 가지 측면인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중 부정적 측면의 역사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내었다. 즉, 그 과정은 서구가 타자를 어떻게 발명하고 발견하며 은폐하는가의 역사적 과정이었다. 결국, 듀셀이 주장하는 것은 이 타자의 은폐(희생)의 고리를 해체하고 근대성 신화의 폭로해야지만이 근대성의 긍정적인 측면인 해방의 기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듀셀이 강조하는 근대성의 긍정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즉, 해방인 것이다. 

다만 듀셀의 논의에는 여성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서구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희생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이야기하면서도 정리하는 글에서 타자의 범주에 여성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은 어쩌면 그의 학문적 스승인 레비나스와도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도 든다. 어쨌든 한계는 있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통해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성의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한국의 근대성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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