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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권력의 시선이 폭력적임을 그 때문에 그로 부터 벗어날 사적인 내밀하고 은밀한 공간을 많이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말하고 있는 벤담-오웰류의 권력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날 장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낙담하며 이같은 권력의 시선, 통제의 시선을 없애고자 노력한다. 

 

 

 

 

 

 

 

  

러나 과연 그런가? 오히려 이와 정반대는 아닌가?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통제받고 있다는 불안이 아니라 타자의 응시에 항상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다.” 최근 아동 성범죄를 비롯한 각종 파렴치범들의 소행에 대해 그 근절책으로 나온 것들을 보라. 더 많은 감시카메라를 사회 곳곳에 달아야한다고 우리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의 모습을 언제든지 보여주지 못해 환장해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각종 블로그, 그리고 카메라 들을 보라. 그래서 “우리라는 주체는 자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일종의 존재론적 보증자로서 카메라의 응시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캉을 통해 지젝은 이야기한다. “정신분석학이 생각하는 환상, 진정한 환상은 우리를 매혹시키는 어떤 장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실존하지 않는 상상된 응시라고. 요컨대 가장 기초적인 환상의 장면은 우리가 눈으로 보게 되는 어떤 매혹적인 장면이 아니라 '저 밖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며, 꿈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의 꿈의 대상'이라는 생각인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트루먼 쇼>나 네델란드에서 시작하여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는 각종 '리얼리티 쇼'를 보라. 적절한 예는 무궁무진하지만, <우리 결혼했어요>가 좋은 예일 것이다. 이와 같은 “‘리얼리티 쇼’의 주체/연기자들도 인위적 격리공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트루먼 쇼>와 대조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 역할을 '실제상으로' 살아간다. 문자 그대로, 허구가 현실과 뒤엉켜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실제의 삶과 연기된 삶 사이의 구분은 '해체'되어 버리고 어떤 면에서 그 둘은 일치하게 된다.”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 엔디와 솔비의 경우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별이 안간다. 가상에서 준 반지를 실제에서 잃어버졌지만 또 다시 가상에서 그것이 가상 부부간의 문제로 대두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의 삶' 그 자체를 연기하고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그렇다면 텔레비젼은 우리의 실제 사회적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떤 허구적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도피적 오락거리를 제공한다고 여겨져왔다. 하지만 '리얼리티 쇼'에서는 마치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적 허구로 제공되고 레크리에이션(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곁가지지만 여기서 지젝은 라캉의 '성 관계는 없다'라는 말을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섹스란 언제나-이미 어떤 환상적 시나리오를 바닥에 깔고 있는데, 그 시나리오는 사실상 자위행위를 이끄는 환상과 동일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나를 쾌락에 들끓게 만드는 것은 나와 살을 맞대고 있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은밀한 환상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의 삶'에서 언제나-이미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며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자신을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어떨까?”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애인으로서, 부부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무한~~~로서

이 지점에서 지젝은 “'전체주의의 위협'이라는 것이 이처럼 타자의 응시가 가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실현됨으로써 제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란 숭고한 대상>>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예로 들었지만 그것보다 여기서 들고 있는 예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의 논의를 더 따라가 보자.

1999년 마지막 날, 전 세계는 한 가지 사건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밀레니엄 버그라는 비-실체에 출현에 대한 불안 말이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객관화된 앎, 그래서 우리 존재의 상징적 실체이며 우리의 상호 주관적 공간 전체를 관장하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큰 타자') 것이지만 1999년 마지막 날 앎의 결여('00'이라는 숫자를 읽지 못하는 컴퓨터의 무능)가 왔다. 그 때문에 각종 혼돈이 예견되었던 것이고 불안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런(? 아마 혼돈이 온 곳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일이 없었다.

이를 지젝은 “우리가 현실에 접근하도록 매개해주고 지탱해주는 디지털 네크워크가 만약 제거되었더라면, 거기서 우리는 매개 없는 진실 속에서의 자연적 삶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폐허와 맞닥트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밀레니엄 버그야 말로 “라캉이 '작은 타자', 욕망의 대상-원인, 상징적 질서인 큰 타자의 결여를 구현해주는 사소한 티끌 한 톨, 대상 소문자a라고 불렀던 것이며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한다. 요컨대 “버그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작동 양상을 버그의 다섯 가지 뜻(①고장/결함, ②병, 감기 바이러스 같은 것, ③벌레, ④광신도, ⑤도청 장치)을 가지고 설명한다. “사소한 결핍이나 고장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병으로 변형되고, 그 다음엔 하나의 실정적 원인으로, 질서를 교란하는 벌레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를 비밀리에 감시하는 이 벌레에는 어떤 심적 태도(열광)가 부여된다. 이처럼, 처음에는 그저 뭔가 잘못 들어간다는 정도에서 순전히 부정적인 양상에 불과했던 오작동이 어느새 적극적인 실존성을 획득하게 되며, 그 실존성은 마치 벌레처럼 박멸되어야 할 열광적(광신도)도청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2000년 1월이 되고 아무 일이 없자, 세계는 다시 후편집증적 딜레마(각종 비난의 목소리, 음모론 등등)에 빠졌다. 여기서 지젝은 라캉을 끌어들여 “다시 한번 가장 순수한 형태의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이 '되는' 텅 빈 공허를 만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 진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조차 분명치 않은 어떤 실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풍의 눈처럼 그 주위 전체에 엄청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밀레니엄 버그를 히치콕의 맥거핀의 하나와 같다고 하고 있다.(아~~~ 그 맥거핀...ㅎㅎㅎ)

이제 결론이다. 그럼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이명박정부가 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장악하고자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모두 잘 알 것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의 유목민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틈새, 균열 등등의 게릴라씩으로 대응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다음 아고라가 장악되면 또 다른 곳으로, 그 곳이 장악되면 또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하며 저항하는 식 말이다. 그러나 지젝은 큰 타자인 디지털 네트워크는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하며 적절한 유물론적 응답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 자유의 섬으로 후퇴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의 더욱더 강력한 사회화하여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새물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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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경쟁자, 짝패와 차이의 소멸, 그리고 만장일치적 폭력의 희생제의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의 본능은 모방욕망이며 이 모방욕망은 라캉의 거울이론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자아는 타인 즉 모방모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자신과 모델은 점차 경쟁자의 위치에 두며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점점 소멸해가면서 둘은 짝패가 된다. 이러한 짝패들이 넘쳐나는 사회 즉 차이가 소멸된 사회는 상호폭력이 팽배한 사회이고 이런 사회의 지속은 멸망과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 제의가 필요하게 된다. 특히 짝패 중 괴물같은 짝패가 희생물로 선택되며 이 희생물에 대해서 만장일치적 폭력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되고 희생물도 다시 제의적 대체에 따라 실질적인 죽음은 외부에서 가져온 희생물에 의해 이루어지고 내부의 희생물은 신성 즉 성스러움을 지니게 된다.

=> 이것을 식민지 시기 조선과 일본으로 전치하여 보면 어느 정도 유사한 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개항과 동시에 근대화를 모방하게 된다. 그 때는 서구적인 근대화부터 일본식, 중국식 등 다양한 모방의 대상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병합이후에는 유일하게 모방의 대상은 일본이 된다. 조선의 일본 모방은 일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고 둘은 여전히 서로 다르다고 인정하면서 경쟁자가 되고 결국은 외부에서 볼 때 차이의 소멸을 초래하여 짝패가 된다. 차이의 소멸은 지라르에 의하면 희생위기이며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제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 희생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거친 대입이지만 생각거리가 많아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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