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경제적인 공적 영역들을 ‘雜觀’, ‘夜話’, ‘片片’ 등의 짤막한 풍문, 소식 등 잡다함으로 대중에게 환기시켜 유통하는 방법은 개인의 사적 흥미(취미)를 창출/충족시켜 삼천리라는 ‘정치·문화적 공론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문화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삼천리의 입장은 대중의 욕망과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의 욕망이 정치·문화적 기획이라는 상호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삼천리를 “취미 중심의 교양잡지”라고 하든지 “취미와 교양의 종합지”라고 하든지 모두 ‘취미(흥미)’가 대중과의 관계 맺기의 한 방식인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인지 삼천리는 “‘대중문화화’된 ‘정치 군사 국제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앎의 새로운 배치”라고까지 제기된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의 취미화’라고 할 수 있다. 공사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근대사회에서 그래도 여전히 공사의 구분은 시도되곤 한다. 공적 영역을 정치의 영역이라고 하며 이를 사적 영역과 구분하여 보고자 한 고대와는 달리 근대는 공적 영역을 사적 영역과 구분할 수 없다. 그 만큼 ‘사회’가 공사 영역에 끼어들면서 공사영역의 구분이 어렵게 되었고 상호 연관관계(불리불가능) 속에서 주체와 주체를 둘러싼 환경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와 취미의 관계 또한 그렇다. 정치는 자타의 문제이지만 취미/취향은 개인의 문제이다. 물론 그 취미와 취향이 공통감각을 의미할 정도로 확대될 때 자타의 문제로 전환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취미/취향의 문제는 언제나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정치와 취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뉠 수 있으며 이를 근대는 상호 긴밀한 관련 속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삼천리를 통해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0~30년대 문화민족주의는 대중의 취미/취향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 취미/취향을 정치적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기획을 수립하고 전개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정치의 취미화’와 ‘취미의 정치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천리와 1930년대 문화민족주의자들은 근대적 취미/취향의 형성단계인 시대적 분위기와 자본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대중문화를 자신들이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취미의 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의 취미화’를 통해 정치의 장을 확보/확장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근대는 표상, 재편, 대표하는 것들이 언제나 권력을 획득하며 그에 따라 처음 기획된 내용과 의미는 사라지고 그 대리/대표/재현(re-presentation)의 권력화와 그에 따른 결과만을 배태한다. 저 유명한 맑스의 화폐 개념을 생각해 보라. 결국 정치를 ‘취미화’하여 대중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문화민족주의의 기획은 오히려 취미의 장에 정치를 가두는 꼴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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