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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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3.15 부정선거였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3.15 부정선거는 전국민적 항거를 이끌어낸 직접적 계기, 시발점, 도화선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 중, 그러니까 무수히 많이 열거되는 쉼표, 쉼표, 쉼표, 쉼표,,,,에 종지부을 찍은 마침표에 불과했던 거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에 대한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의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사건, 북진통일론, 한강 다리 폭파, 거짓 녹음 방송,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헤아릴 수가 없다.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나서 자란 이승만에게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있었기를 기대하는 게 무리인건가. 정말이지 이승만은 왕조의 부활을 꿈꿨던 게 아닐까. 친일매국노에게 보여준 관대함을 중도 세력, 좌익 세력에게도 조금만 나눠줬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1940년대를 읽는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다.

6.25전쟁을 지나고 있어서 그런가.. 이 시대를 활자로 접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물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백선엽은 이렇게 말했다.

'지옥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이 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자들의 유족들까지도 탄압을 받았다는 것 역시 놀라운 사실이었다.

 

2004년에 거창사건 관련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100만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와 부수단체의 반발 때문에 정부가 보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어느 외국 기자가 남긴, "전쟁의 최초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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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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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리영희.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Anti-Trusteeship'과 '신탁통치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 ...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씨 집권과 그의 타락,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39)

 

 

"역사적 조건화로 인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극단으로 몰고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극단주의는 너무도 뚜렷이 대비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중간은 없다. 흥망 양자택일이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가는 속도도 빠르다. 분열하고 증오하는 일도 목숨 걸고 하지만, 공부하고 일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치닫는 한국은 참으로 묘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사회다. 아니 공존하는 정도를 넘어 '뫼비우스의 띠' 처럼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활력이 넘친다. 이기적인 생존경쟁도 치열하지만 이타적인 사회참여도 왕성하다. ....

 전투적 극단주의의 유산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펄펄 살아 있다. 좌우 그 어느 쪽이건 늘 에너지 과잉이다. '오버'는 기본이요, 필수다. 그래서 재미있고 무한한 가능성도 열려 있긴 하지만... "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있는 내용인데.. 해방정국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내 얘기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후에서 저자는, '이제는 중간으로 가야할 때'임을 피력하고 있다.


1947년,김원봉이 좌익 중심의3.1 기념 시민대회에 참여했다가 검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노덕술에 의해 고문까지 받았다. 김원봉이,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수가 있소"라고 말했다.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게 만들었다.

친일파와 한민당은 민족주의 이념을 독점한 김구가 자기들 보다도 강경한 반탁, 반모스크바 협정 태도를 취한 결과 어부지리 효과를 극적으로 얻었다. 이것은 하나의 반전이었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 반공주의는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했었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 세력에게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김구는 반탁 주도로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던 친일파에게 큰 힘을 준 셈이었다.

<5.10 총선거 거부는 옳았는가?> 에서.. 저자는, "만일 남북 협상파 정치 지도자들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그들은 선거에서 이승만을 패배 시키는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김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좀 더 심화시켰다.;;;;


인상적이었던 부분.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중간파 정치인들이 명분을 중시하여 5.10 선거를 전면적으로 보이코트한 것은 이승만을 선두로 하는 보수세력에게 큰 정치적 이득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무릇 정치란 것은 결코 관념의 유희가 아니고 구체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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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일본과 通하다 - 우정과 배신의 오백 년 역사
손승철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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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가 임란 이후 이뤄진 12차례의 사행에 대해 각 통신사 파견의 목적, 경과, 결과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손승철 교수의 이 책은 왜구의 출현에서부터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교린체계가 막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1. 동아시아 해역의 약탈자, 왜구
2. 공존의 시대, 통신사와 국왕사
3. 경상도의 저팬 타운, 삼포
4. 임진왜란, 불구대천의 원수
5. 통신사의 부활, 돌아온 평온의 시대
6. 침략의 전주곡, 통신에서 배신으로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는 이 책의 5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일본 탐방때 손승철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때 책 들고가서 사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못한게 너무 아쉽다.
강연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었지만 확실히 활자로 보는 것보다 생동감있고, 머리에 잘들어온다.

다음 학기, 한국사 수업에서 조선통신사 부분은 꼭 이 책을 가지고 교수님처럼 수업할거다. ㅋ ppt만들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피해상황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켜주고, 왜구가 조선인이었다거나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단순 영웅화 시키는 등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서 이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도 알려줘야지.

쓰시마도주가 기록한 통신사 일행의 식단이라든가, 통신사 행렬을 지켜본 네덜란드인의 목격담 등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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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투쟁'과 '면죄부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 초기 사회주의의 인기가 많았던 것도 그들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 민족, 민중들 삶의 문제에 훨씬 적극적으로 천착해왔기 때문이었다.

소련과 미국이 진주할 것이 확실해지자 일본은 하루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에게 해방은 16일 하루 뿐이었다.

"1946년은 단순히 1945년과 1947년의 사이가 아니다. 그것은 미군정 3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다."는 말은 1946년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줬다.

 

1946년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건 역시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바로 이것이 좌우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상호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남북분단으로 치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왜 그렇게 반탁운동에 매달렸을까?

서중석이라는 사람은, 김구가 "미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계속 반탁투쟁을 벌인 것은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이 기본이유였다"고 말한다.


1946년 2월 우익 진영 중심으로 민주의원이 출범하였는데, 이를 임정 내부의 좌파인 민혁당계가 반대하였다. 임정 법통론을 완강하게 고집한 쪽은 김구의 한독당계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신축적이었던 민혁당이 아닌 한독당측이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민주의원을 포용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인 것 같다. 민주의원은 과도입법 의원이 창설될 때까지 미군정의 자문기구 역할을 했다.(여기서 3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하자 김규식은 몇번이고 거부하다가 결국 승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올라선 다음에는 형님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압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의 모든 것을 희행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너무 드라마틱 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 직후 김구가 보인 반응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 라고 했다는데, 그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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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정장식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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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 한민족사' 연수를 앞두고 읽게 된 책.

부산에서 출발하여 크루즈를 타고 5박 6일 동안 진행될 예정인데, 통신사가 떠났던 것과 비슷한 여정이 될 것 같아 찾아 읽게 되었다.

 

일단 책을 통해 앍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면,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최초의 통신사는 회답겸쇄환사(1607년)로서, 임란 직후라 믿음을 통한다는 기존의 통신사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임무는 일본이 재침해올 기미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주된 임무는 일본 조총을 사오는 일이었다.(조총은 일본에 1543년 포르투갈로 부터 들어와 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 사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통신사들의 사행은 반드시 대마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대마도의 다이묘들은 사신을 매우 극진하게 대접했는데, 조선의 사신들은 이것을 순수하게 막부의 선의로만 해석하였지.. 막부가 사신을 극진히 대접한 것에는 조선 사신이 장군을 알현하는 것처럼 연출하여 다이묘들에게 새롭게 출발한 도쿠가와 막부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통신사 파견의 명분은 언제나 포로 쇄환이었지만, 처음에 피로인 수는 1418명에 불과했다. 갈수록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더 감소했다. 조선은, 일본에 20여년 자리잡고 살았던 포로들에게 그동안 일구어왔던 것을 버리고 돌아갈 만큼의 가치가 없는 나라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1636년 네번째 사행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사신들은 막부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예물을 받았는데 거절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대마도쯤 와서 사람들이 보게끔 한뒤 강에 버렸다고 한다. 막부의 체면도 살리고 대마도에도 이득이 돌아가게 되어 삼자 모두 만족해했다고 한다.


1643년에도 사행이 이뤄지는데 이때는 병자호란 이후라 조선의 사신을 대하는 대마도주의 태도가 전과 달리 거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패배의식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기에 3대장군 이에미쓰에 의해 이에야스의 신격화 사업이 이뤄지는데.. 이때 막부는 천황의 권위를 규제하는 등 그 지위를 압도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통신사 일행도 닛꼬 동조궁의 이에야스묘를 참배했다. 단순한 유람도 거부했던 사행인들이 이를 수락한 것은 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 의도에 의한 것이기도 했고, 병진호란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811년에 마지막 사행이 이뤄졌다. 이때는 이미 일본내에 사행의 필요성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라, 형식적 수준의 문화교류에 그쳤다고 한다.

 

조선은 막부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동향을 살폈다. 조선과 막부 모두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비용을 들여 사행을 지속시켰던 데에는 각자 사행을 통해 얻어고 했던 나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군사력이나 각종 물력의 위력은 인정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교화가 필요한 오랑캐라 여겼고 이를 왜란에 대한 정신적 복수라 생각했다. 반면 막부는 통신사를 '조공사' 처럼 보이게 하여 막부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대마도로서는 사신 접대를 명분으로 막부로부터 받는 경제적 지원이 간절한 입장이었다.

 

이때 우리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향을 살폈다면, 세계 정세에 좀 더 일찍부터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행의 기록이 역관에게 맡겨졌던 몇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에 대한 무시와 적개심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임란 이후 전개된 12 차례의 사행에 대해 파견된 인물, 파견의 배경과 목적, 내용 등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대마도의 컬러 사진이 여러장 수록되어 있고, 사행인들 모두가 대마도의 풍경에 감탄했었고 하니까,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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