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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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투쟁'과 '면죄부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 초기 사회주의의 인기가 많았던 것도 그들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 민족, 민중들 삶의 문제에 훨씬 적극적으로 천착해왔기 때문이었다.

소련과 미국이 진주할 것이 확실해지자 일본은 하루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에게 해방은 16일 하루 뿐이었다.

"1946년은 단순히 1945년과 1947년의 사이가 아니다. 그것은 미군정 3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다."는 말은 1946년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줬다.

 

1946년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건 역시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바로 이것이 좌우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상호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남북분단으로 치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왜 그렇게 반탁운동에 매달렸을까?

서중석이라는 사람은, 김구가 "미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계속 반탁투쟁을 벌인 것은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이 기본이유였다"고 말한다.


1946년 2월 우익 진영 중심으로 민주의원이 출범하였는데, 이를 임정 내부의 좌파인 민혁당계가 반대하였다. 임정 법통론을 완강하게 고집한 쪽은 김구의 한독당계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신축적이었던 민혁당이 아닌 한독당측이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민주의원을 포용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인 것 같다. 민주의원은 과도입법 의원이 창설될 때까지 미군정의 자문기구 역할을 했다.(여기서 3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하자 김규식은 몇번이고 거부하다가 결국 승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올라선 다음에는 형님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압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의 모든 것을 희행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너무 드라마틱 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 직후 김구가 보인 반응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 라고 했다는데, 그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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