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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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귀환> 두번째 권, `관중과 공자`!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춘추시대의 첫 패권 국가로 만들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 중 한사람이지만, 제자백가, 심지어 중국철학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공자에 가려져 응당 받아야할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공자를 둘러싼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한제국이 집권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19) 한 것이지만, 여전히 공자를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 같다.

저자는 춘추전국시대를 관통하는 현실주의적 사유 경향과 보수주의적 사유 경향의 원류가 관중과 공자이기 때문에 두사람의 사상을 꼼꼼히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자가 관중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건 첫째 권에서도 언급이 되었던 것 같다.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기까지 포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관중의 면모를 알아보고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포숙이 없었다면 춘추시대의 제환공은 결코 패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관포지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춘추시대에는 존왕양이의 명분이 지켜졌고 전국시대는 그 명분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시대였다고 설명하는데 그 구체적 사례를 이 책에서 얻었다. 제나라가 만약 존왕양이의 명분을 무시했다면 패자가 되기는 커녕 멸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와 하사품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나라 왕의 제안을 곧이 곧대로 듣고 따랐더라면 말이다. 예의 형식에 의한 주와 제나라의 책봉관계가 규구의 회맹을 통해 성립되었다.

관중과 공자는 `민중`에 대한 인식을 달리 했다. 관중은 국가나 군주의 편에서 민중을 최대한 동원하려했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자,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복종을 유도하기위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충분히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다. 반면 공자는 민중을, `지배층의 도덕적 행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이는 존재`(90)라고 보았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민중은 따라오게 하면 되지 알게 해서는 안된다`라고도 했다.

"민중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가 주창했던 인이란 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념이었다는 점과 그것은 단지 지배 계층에만 국한된 귀족적 고상함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213)

국가 통치 원리에 있어서도 둘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공자는 서주시대의 `가족=국가` 정치철학을 그대로 복원하려고 했지만, 관중은 <관자>「목민」편에서
"가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고을을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고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국가를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고,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다."고 했다. 가족 논리가 함축하는 강한 공동체주의는 다른 공동체에 대한 차별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뭔가, 지금에도 시사하는 점이 큰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저자는 바로 뒤에서 `유교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언급하며, 유학사상의 보수성이 현재 어떤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까지 보여준다.

공자가 어떤 제후로부터도 재상으로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과 그의 제자들 역시 거의 출세하지 못했다는 것은 공자의 사상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었으며 적어도 부국강병에 있어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공자 사상의 가장 큰 한계는 저자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공자 사상의 실천 주체가 철저하게 기득권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윤리적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가 부재하다는 점인 것 같다.

4장 `국가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관중의 정치철학에 녹아있는 지배와 억압의 기구로서의 국가를 극복해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아나키즘이 잘 이해가 안된다.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거겠지. 노자와 장자 편을 빨리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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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4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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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난 뒤 국민들의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게 노태우가 내세운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사상초유 여소야대의 정국에 놓이게 되자 중간평가를 통해 야당의 공세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더 커지게 됐다. 그렇지만 민정당과 김대중(평민당)은 중간평가에 대해 유보 입장을 보였고, 김영삼과 공화당은 이를 국민을 기만한 처사라며 비판했다.

 

이러던 중에 민주당이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1억 5천만원에 매수한 사건이 터져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저자는 이 사건이 한국의 정치사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벼랑 끝에 선 김영삼이 노태우와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3당 통합은 "광주학살과는 달리 합법적으로 공개리에 이루어진 호남 고립화 음모"였다.

 

89년에 황석영과 문익환, 임수경이 방북했다. 귀국하자마자 구속되었다. 같은 해에 정주영의 방북이 이뤄졌는데, 모든 신문들이 고무되어 당장 금강산 관광이 실현될 듯 설레발 칠 때, 유독 한겨레신문만이 현대그룹의 부당 노동행위와 테러를 비판하였다.

 

이 편 후반부에서는 극심했던 호남지역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책에서 인용한 글 중 일부다.

"... 영남인들의 단결이 공세적인, 기득권 유지 차원이라면 호남인들의 그것은 수세적인, 인간다움을 확인하려는 실존적인 차원이다. 이 둘을 똑같이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쟁점을 호도하려는 수상한 의도를 가진 이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해도 되는건지.. 안되는건지.. 잘 판단을 못하겠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말. 문부식,

"권력은 지지하는 군중이 존재함으로써 성립하고 보존된다. 권력 없는 군중은 현실에서 있어 본 적이 없지만, 군중 없는 권력은 가설로도 불가능하다." 문부식이 이 말을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했다고 봤을 때, 적어도.. 문부식이 얘기한 '군중'에서 호남인들은 제외되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전두환을 지지했던 적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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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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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에서는 직선제 개헌 운동과 양김의 분열,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그리고 노태우 당선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들이 보이자 전두환은, 개헌 문제는 서울 올림픽이 끝난뒤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대학 교수들의 양심선언이 잇달았고, 학생들은 분신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저항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1천만명 개헌 서명운동'으로 모아졌다. 재야인사들과 각종 시민단체가 동참했지만,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라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5공의 부도덕성을 여실히 드러내줬다. 권인숙은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 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했다.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했는데, 검찰은 그런 행위가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5공과 그 나팔수 노릇을 하던 언론들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역공을 가했다. 정말 치졸하고 비윤리적이고 몰상식하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보도지침을 뿌려댔다. 사건 발생 3년만에 문귀동은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다 사퇴하게 된 고려대 총장 김준엽도 전두환의 치적이라 평가하는 것이 바로 88올림픽 개최와 물가안정이었다.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이른바 '3저호황'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릴 정도로 이 시기, 증권 부동산 관광 등의 붐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중산계층이 육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86, 88 국제대회를 앞두고 빈민들과 소시민들은 강제 철거 당해 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녁 시간에 올림픽 TV중계를 보게 하려고 시계 바늘을 1시간 앞당겨 생활하게 한 '서머타임'의 실시는 정말 엽기적 정책이었다.

 

전두환은 6월 항쟁 당시에 병력 파견 계획을 결정했었다고 한다. 미국은 반대했다. 전두환은 결국 올림픽 개최를 앞둔 시점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을 염려해 군부개입 시도를 포기했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중산층은 직후의 노동자대투쟁에 등을 돌리고 거리를 뒀다.

 

6.29선언은 어느 면에서는 노태우 자신이 표현한 대로 국민에 대한 항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다른 면에서는 항복을 가장한 권력 연장의 합리적이고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대선 직전에 발생한 KAL858기 폭파사건은 소련과 중국이 88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하자 고립감을 느낀 북한이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저지를 사건이라고 결론이 났지만, 암튼 이것이 노태우에게는 엄청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당선 직후 노태우는 5공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를 실천했는데, 5공 청문회도 그 과정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5공 비리를 추궁하던 10여 명의 야당의원들이 5공 비리와 관계되어 있는 재벌들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아 쳐먹었다는 사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국민들이 놀아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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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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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적인 지식.. 이랄수도 없는, 파편적 정보!들이 아주 조금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전두환은 신군부 집권의 정당성을 '방미'를 통해 획득하고자 했다. 그래서 김대중을 살려주는 대신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또 방미교섭 진행중에 박정희시절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통폐합 해버렸다.

책에서는 "미국은 한국이 추진했던 자주국방계획과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전두환정권의 출발을 용인해주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녹화사업은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인간성 파괴행위였다. 강제징집자들은 녹화사업에 따라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의식화 정도를 측정받았다. 이후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체제를 긍정하도록 하는 '역의식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사회에 내보낸 후 대학 선후배 등을 만나 학생운동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강요했다. 동지를 팔아야만, 전향을 인정해주었다.

 

이 편에서의 기억에 남는 사건은 KAL기 실종 사건.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KAL기가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호전적 군사정책을 부르짖던 레이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철저히 이용했다. 레이건은 소련이 KAL기가 민간항공기임을 알고 있었고, 미사일 발사 전에 경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는 모두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전두환이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었고, 그러던 와중에 미얀마에서의 아웅산 암살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불신의 골이 깊어져 결국 무산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다.

 

1984년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유시민이 썼다는 '항소이유소'의 일부다.

"...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더욱 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270)

 

여기서 네크라소프의 시구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로 바꾸고 싶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슬퍼하고, 노여워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ㅠㅠ

 

1985년 학원안정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운동권 학생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에 반대해 분신 자살을 시도한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고 하니, 시행되고 나서 무고하게 죽어갔을 수많은 생명을 생각하면 다행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가슴 아픈 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김근태 고문사건이 다뤄졌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현역 정치인이 되고 나서 전두환과.. 또 당시의 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치인들을 대면했을때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을때 고통을 느꼈던 모든 세포들이 분노감에 부들부들 떨리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지난달에 돌아가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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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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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70년대 시리즈에 비해 서문이 굉장히 길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다는 게 느껴진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광주학살에 대한 기억과 양심은 '중산층신화'와 국가주의 담론에 파묻혀 버리고 한국인은 '경제동물'로 다시 태어났다. 국가주의 담론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통해 표출되었다. 그리고 3저 호황은 각종 스포츠, 놀이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동시에 계층간의 분열도 심화되었다.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언론을 통제, 활용하였다.

"신군부는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시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94명을 1단계 회유 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이 가운데 회유정도가 양호한 이들을 2단계, 3단계로 넘겨 이들을 활용할 세부 계획까지 마련해 실천에 옮겼다."(p59)

대학 교수, 문인, 종교인 등 지식인들까지도 포섭대상이었다.

 

신군부의 등장 당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부마사태와 10.26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 다음의 정치적 기회는 자신에게 올 것이라 낙관했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안이함을 비판했지만 연금이 해제된 직후라 활동의 제약이 컸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3김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음모는 일찍부터 가동 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3김이 한 뜻을 모았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80년에 발생한 주요 사건 몇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80년 4월에 일어난 사북탄광사건 또는 사북항쟁. 석탄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면서 수많은 탄광이 문을 닫는 가운데 탄광노동자들의 열악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신군부에 의해 주모자로 몰려 불법으로 체포돼 고문과 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110여 명, 이 중 10여 명이 고문과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 사북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이미 그때에 언론 기능이 죽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

2) 자유언론실천운동

3) 서울역 회군 : 1980년 봄, 학원민주화 열풍 속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5.12 군부쿠데타설 사건'을 계기로 교내시위에서 거리투쟁으로 변모, 대학생과 신군부가 전면 충돌하게 됨.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감.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신군부 성토대회가 열렸는데,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해산하고 교내로 돌아가기로 결정. 이 '서울역 회군'은 학생운동 진영에 뜨거운 이론논쟁을 불러일으킴. 이른바 '무학논쟁'.(무림:서울대 총학생회, 학림:국민대, 전남대 출신)

4)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 여기에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리 음모가 작용.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은 구속 대상에 제외되었다.

5) 언론통폐합 : 1980년 서울지역 13개 언론사의 발행인과 경영주 17명에 대해 포기 각서를 받음. 지방언론사를 포함해 모두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언론통폐합의 주요 내용은 방송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금지, 신문통폐합,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 철수, 지방지의 1도 1사제, 통신사 통폐합으로 대형 단일 통신사 설립 등이었다. 기자들에게 보도증을 발급하는 프레스카드제도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언론통폐합은 언론매체시장의 독과점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박정희 정권 시기부터 이미 진행되어온 언론의 거대기업화를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언론사들은 권위주의 통치에 순응하였고, 1980년 대에 들어와 국내ㅐ 최고 수준으로 뛰어오른 언론사 급료체계는 언론의 비판적 기능 저하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267)

 

대부분의 언론사가 통제 속에 위축되어갔던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세를 키워나갔던 조선일보. 그러기까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신군부를 옹호, 지지했을지..

 

5.18 당시 진압군에 의해 자행된 악행들.

1)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2)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3)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4) 사람이 가득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5)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6) 며칠 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7)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8)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9)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10)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사람을 죽인 건 순간 정신이 나갔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붙잡혀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국인은 본래 이렇게 잔인한가..??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상황에서 가장 공포스런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오직 말 없이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폴고자 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한은, 모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죽은 걸까? 그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154)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겠지.

 

신군부가 저지른 잘못 중 하나는 서로를 적대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마저 모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언론인의 말이다. "그래, 너희들은 3등 국가의 군인들이요, 나는 저항의 몸짓 한번 제대로 지어 보이지 못하는 3등 국가의 쟁이. 유유상종이라고 했지. 지금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우리 수준에 딱 어울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뭐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모멸가 현실 부정의 의지가 잘 느껴진다.

 

신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전체 기자의 30%가 해직되었고, 나머지 기자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숨죽여야 했다.

 

7월 30일 국보위는 대학입시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대학입시제도 개혁안'과 과외를 금지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 교육학자들은 7.30교육조치를 '교육쿠데타', '교육테러'라고 혹평했음. 졸업정원을 전제로 한 대학의 팽창은 교육의 질적 저하와 졸업생 취업난을 유발시켰으며, 취업의 불이익은 주로 비명문대와 지방대, 그리고 여성들의 받았다. 또한 대학 졸업자들의 공급과잉은 고졸 이하 노동자들을 저임금 상태에 묶어놓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다.

 

8차 개헌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게 했는데, 여기서 기존의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통합하여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삼청교육대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 역시 한국인은 원래 잔인한가..라는 의구심을 생기게 했다. 삼청교육은 불량배를 검거하여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목적하에 시행된 것인데, 담당 위원회가 삼청동에 위치해 '삼청교육대'라 부르게 되었다. 저자는 국보위가 내세웠던 '사회악 일소'보다는 정권장악을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정치적 보복의 목적이 더 컸다고 얘기한다. 삼청교육의 대상이 전과자나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로 두루뭉실하여 괜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95년에, 술자리에서 "전두환, 노태우 만세"를 외쳤던 사람을 같이 있던 사람이 폭행하여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직접 겪었던 당사자로서 풀지 못한 한이 터져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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