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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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70년대 시리즈에 비해 서문이 굉장히 길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다는 게 느껴진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광주학살에 대한 기억과 양심은 '중산층신화'와 국가주의 담론에 파묻혀 버리고 한국인은 '경제동물'로 다시 태어났다. 국가주의 담론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통해 표출되었다. 그리고 3저 호황은 각종 스포츠, 놀이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동시에 계층간의 분열도 심화되었다.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언론을 통제, 활용하였다.

"신군부는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시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94명을 1단계 회유 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이 가운데 회유정도가 양호한 이들을 2단계, 3단계로 넘겨 이들을 활용할 세부 계획까지 마련해 실천에 옮겼다."(p59)

대학 교수, 문인, 종교인 등 지식인들까지도 포섭대상이었다.

 

신군부의 등장 당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부마사태와 10.26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 다음의 정치적 기회는 자신에게 올 것이라 낙관했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안이함을 비판했지만 연금이 해제된 직후라 활동의 제약이 컸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3김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음모는 일찍부터 가동 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3김이 한 뜻을 모았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80년에 발생한 주요 사건 몇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80년 4월에 일어난 사북탄광사건 또는 사북항쟁. 석탄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면서 수많은 탄광이 문을 닫는 가운데 탄광노동자들의 열악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신군부에 의해 주모자로 몰려 불법으로 체포돼 고문과 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110여 명, 이 중 10여 명이 고문과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 사북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이미 그때에 언론 기능이 죽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

2) 자유언론실천운동

3) 서울역 회군 : 1980년 봄, 학원민주화 열풍 속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5.12 군부쿠데타설 사건'을 계기로 교내시위에서 거리투쟁으로 변모, 대학생과 신군부가 전면 충돌하게 됨.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감.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신군부 성토대회가 열렸는데,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해산하고 교내로 돌아가기로 결정. 이 '서울역 회군'은 학생운동 진영에 뜨거운 이론논쟁을 불러일으킴. 이른바 '무학논쟁'.(무림:서울대 총학생회, 학림:국민대, 전남대 출신)

4)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 여기에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리 음모가 작용.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은 구속 대상에 제외되었다.

5) 언론통폐합 : 1980년 서울지역 13개 언론사의 발행인과 경영주 17명에 대해 포기 각서를 받음. 지방언론사를 포함해 모두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언론통폐합의 주요 내용은 방송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금지, 신문통폐합,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 철수, 지방지의 1도 1사제, 통신사 통폐합으로 대형 단일 통신사 설립 등이었다. 기자들에게 보도증을 발급하는 프레스카드제도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언론통폐합은 언론매체시장의 독과점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박정희 정권 시기부터 이미 진행되어온 언론의 거대기업화를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언론사들은 권위주의 통치에 순응하였고, 1980년 대에 들어와 국내ㅐ 최고 수준으로 뛰어오른 언론사 급료체계는 언론의 비판적 기능 저하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267)

 

대부분의 언론사가 통제 속에 위축되어갔던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세를 키워나갔던 조선일보. 그러기까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신군부를 옹호, 지지했을지..

 

5.18 당시 진압군에 의해 자행된 악행들.

1)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2)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3)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4) 사람이 가득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5)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6) 며칠 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7)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8)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9)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10)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사람을 죽인 건 순간 정신이 나갔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붙잡혀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국인은 본래 이렇게 잔인한가..??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상황에서 가장 공포스런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오직 말 없이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폴고자 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한은, 모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죽은 걸까? 그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154)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겠지.

 

신군부가 저지른 잘못 중 하나는 서로를 적대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마저 모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언론인의 말이다. "그래, 너희들은 3등 국가의 군인들이요, 나는 저항의 몸짓 한번 제대로 지어 보이지 못하는 3등 국가의 쟁이. 유유상종이라고 했지. 지금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우리 수준에 딱 어울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뭐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모멸가 현실 부정의 의지가 잘 느껴진다.

 

신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전체 기자의 30%가 해직되었고, 나머지 기자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숨죽여야 했다.

 

7월 30일 국보위는 대학입시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대학입시제도 개혁안'과 과외를 금지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 교육학자들은 7.30교육조치를 '교육쿠데타', '교육테러'라고 혹평했음. 졸업정원을 전제로 한 대학의 팽창은 교육의 질적 저하와 졸업생 취업난을 유발시켰으며, 취업의 불이익은 주로 비명문대와 지방대, 그리고 여성들의 받았다. 또한 대학 졸업자들의 공급과잉은 고졸 이하 노동자들을 저임금 상태에 묶어놓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다.

 

8차 개헌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게 했는데, 여기서 기존의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통합하여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삼청교육대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 역시 한국인은 원래 잔인한가..라는 의구심을 생기게 했다. 삼청교육은 불량배를 검거하여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목적하에 시행된 것인데, 담당 위원회가 삼청동에 위치해 '삼청교육대'라 부르게 되었다. 저자는 국보위가 내세웠던 '사회악 일소'보다는 정권장악을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정치적 보복의 목적이 더 컸다고 얘기한다. 삼청교육의 대상이 전과자나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로 두루뭉실하여 괜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95년에, 술자리에서 "전두환, 노태우 만세"를 외쳤던 사람을 같이 있던 사람이 폭행하여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직접 겪었던 당사자로서 풀지 못한 한이 터져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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