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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ㅣ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제자백가의 귀환> 두번째 권, `관중과 공자`!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춘추시대의 첫 패권 국가로 만들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 중 한사람이지만, 제자백가, 심지어 중국철학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공자에 가려져 응당 받아야할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공자를 둘러싼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한제국이 집권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19) 한 것이지만, 여전히 공자를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 같다.
저자는 춘추전국시대를 관통하는 현실주의적 사유 경향과 보수주의적 사유 경향의 원류가 관중과 공자이기 때문에 두사람의 사상을 꼼꼼히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자가 관중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건 첫째 권에서도 언급이 되었던 것 같다.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기까지 포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관중의 면모를 알아보고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포숙이 없었다면 춘추시대의 제환공은 결코 패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관포지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춘추시대에는 존왕양이의 명분이 지켜졌고 전국시대는 그 명분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시대였다고 설명하는데 그 구체적 사례를 이 책에서 얻었다. 제나라가 만약 존왕양이의 명분을 무시했다면 패자가 되기는 커녕 멸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와 하사품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나라 왕의 제안을 곧이 곧대로 듣고 따랐더라면 말이다. 예의 형식에 의한 주와 제나라의 책봉관계가 규구의 회맹을 통해 성립되었다.
관중과 공자는 `민중`에 대한 인식을 달리 했다. 관중은 국가나 군주의 편에서 민중을 최대한 동원하려했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자,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복종을 유도하기위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충분히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다. 반면 공자는 민중을, `지배층의 도덕적 행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이는 존재`(90)라고 보았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민중은 따라오게 하면 되지 알게 해서는 안된다`라고도 했다.
"민중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가 주창했던 인이란 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념이었다는 점과 그것은 단지 지배 계층에만 국한된 귀족적 고상함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213)
국가 통치 원리에 있어서도 둘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공자는 서주시대의 `가족=국가` 정치철학을 그대로 복원하려고 했지만, 관중은 <관자>「목민」편에서
"가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고을을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고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국가를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고,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다스려질 수 없다."고 했다. 가족 논리가 함축하는 강한 공동체주의는 다른 공동체에 대한 차별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뭔가, 지금에도 시사하는 점이 큰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저자는 바로 뒤에서 `유교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언급하며, 유학사상의 보수성이 현재 어떤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까지 보여준다.
공자가 어떤 제후로부터도 재상으로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과 그의 제자들 역시 거의 출세하지 못했다는 것은 공자의 사상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었으며 적어도 부국강병에 있어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공자 사상의 가장 큰 한계는 저자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공자 사상의 실천 주체가 철저하게 기득권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윤리적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가 부재하다는 점인 것 같다.
4장 `국가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관중의 정치철학에 녹아있는 지배와 억압의 기구로서의 국가를 극복해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아나키즘이 잘 이해가 안된다.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거겠지. 노자와 장자 편을 빨리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