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 궁궐의 꽃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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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팔길에 구매. 궁녀, 내시 등에 얽힌 이야기들은 대부분 왕실의 은밀한 부분과 관계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대상이다. 아이들도 종종 어떻게 내시가 되는 거냐, 내시와 궁녀는 정말 결혼을 안 했나 같은 질문을 하고는 한다.

에필로그에 적힌 말처럼 조선왕실에는 정치와 사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도 있었다. 왕실이라고 해서 보통의 사람이 겪는(?) 먹고, 싸고, 입는 일상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왕실이 언제나 경외의 대상처럼만 느껴져서 그러한지 그들이 실제로 먹고, 싸고, 입고.. 했던 일들은 뜻밖이고 신기하고 놀랍다.오죽하면 영화 <광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똥 싸는 장면이었을까.

흥미로웠던 내용은 명성황후가 의친왕의 생모인 장상궁을 심하게 질투해 그녀를 잡아다 포박시킨 뒤 음부 양쪽 살을 도려내고 내쫓아버렸다는 사실. 반면 세종대왕의 정비와 나인 출신으로 빈의 자리에까지 오른 신빈 김씨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세 명의 아들을, 신빈 김씨는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소헌왕후가 늦둥이 막내아들을 또 낳았을때 이 아들의 양육을 신빈 김씨에게 맡길 정도였다고. 세종대왕이 양다리 외교(?)를 무지 잘했던 모양이다.

궁녀의 충원은 왕, 왕비, 후궁, 대비, 세자궁 등 각 처소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이때 내수사에 속한 여종이나 공노비만 궁녀로 삼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들을 입궁시킬 때 처녀인지 아닌지 감별했는데 그 방식이 엄청 황당했다. 의녀가 앵무새의 생혈을 여자 아이의 팔목에 묻혀서 이것이 묻으면 처녀고,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고 한다. 앵무새는 남녀간의 화목을 상징하는데, 피가 묻지 않으면 불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나.. 그래도 그렇지 이런 방법으로 감별했다니;;
궁녀와 무수리가 다른 존재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왕조 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침실 구조가 어떠한지, 궁녀들이 침실의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누가 언제 침실에서 숙직하는지, 몇 명이나 숙직을 서는지 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표명했다가는 곧바로 대역죄로 몰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것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바가 거의 없다. 저자가 이책을 쓰는데 가장 참고가 많이 된 책이 실록이나 일기 등이 아니라 범죄인을 수사한 내용을 기록한 <추안급국안> 이라는데서 잘 알 수 있다.

재밌거나 흥미진진했던 것은 아니나 읽어서 후회되는 책은 아닌듯. 결국 재미없었다는 뜻인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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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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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나는 고발한다>를 읽었다. 1894년부터 1906년까지 12년에 걸쳐 진행된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 에밀 졸라가 쓴 글들을 엮은 책이다.

드레퓌스 사건만을 상세하게 다룬 책은 본적이 없어서 그저 단순히 반유대주의에 의해 무고한 개인이 법정 희생물이 된 사건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책 표지에 적힌 말 그대로 "보수와 진보의 대결,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국가폭력,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에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현대적 사건"이라 할만 한 것 같다. 프랑스의 썩어가는 부분을 드러나게 해준 사건이 드레퓌스 사건이었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제거해야한다고 끊임없이 외친 사람이 에밀 졸라였다.

드레퓌스 사건을 만들어낸 것은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인데 역설적이게도 에밀 졸라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의 조국(이 단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졸라가 한국인이었다면 분명 이 단어를 그의 책에서 여러번 사용했을 것 같다), 프랑스를 사랑했다.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왔던 프랑스가 드레퓌스 사건에 의해 주변 나라의 웃음거리,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진 1894년은 보불전쟁 이후 반독일 감정이 팽배해져 있는데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이다. 또 프랑스혁명 직후에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유대인이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그들이 종사하는 대금업, 금융, 증권투기 분야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반유대감정이 커졌을 때였다.

유일한 증거였던 드레퓌스 필적의 명세서가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 실제 첩보짓을 한 사람은 에스테라지라는 군부내 소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군대의 위신이 하락될 것을 염려해 에스테라지를 석방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에밀 졸라는 이 판결을 계기로 사건에 본격 뛰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고발한다>가 쓰여진 것도 이 시기였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에스테라지가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심에서 다시 한번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외, 국내의 비판을 우려해 드레퓌스를 사면시킨다. 드레퓌스가 이 사면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그의 지지자들이 실망하여 많이 떠났다고 한다. 에밀 졸라는 사면 조치에 불만을 갖고 "공화국 대통령 에밀 루베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프랑스가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렸음을 한탄했다.

드레퓌스의 완벽한 복권은 1906년에 가서야 이뤄지게 된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밝히고자 용기있게 발언한 사람들이야말로 프랑스의 후손들에게 존경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더 가차없이, 냉철하게 비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오늘 동아일보 최영해란 작자가 쓴 쓰레기 같은 칼럼을 읽고 그런 글을 쓴 사람이나, 그 글을 위해 신문 한켠을 내어준 언론사나 참 저질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을 읽으니 순수한 지식인, 진정한 애국자, 합리적인 보수주의자가 왜 없을까, 개탄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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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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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박완서 읽기' 세번째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지금까지 읽은 박완서의 책 중(<오래된 농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밖에 안 읽었지만) 최고인 것 같다.

<오래된 농담>보단 <그 산이->, 그리고  <그 산이->보단 이 책이 훨씬 좋았다. 박완서 작품의 특징이 이렇다할 정도로 선생의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문장이 지닌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이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저자가 말했듯 자화상을 그리듯 쓴 글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이 섬세, 솔직 그 자체이다. 저자가 기억에 의존해 풀어해쳐 놓은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보고 느끼며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50년에 이르는 긴 시간적 격차가 존재하지만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에 순간 순간 놀라고,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럴땐 시간 보다는 공간으로 공유될 수 있는 경험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 한 명이 똥 마렵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 같이 엉덩이를 까고 쪼그려 앉아 똥이 나오길 힘주며 기다렸던 일, 하교길에 똥이 마려워 풀숲에 들어가 해결하고 넓접한 풀잎으로 뒷처리를 했던 일, 더운 여름날 하교길에 냇가에 가 가방이며 옷이며 훌훌 벗어 던지고 신나게 물놀이 했던 일, 정숙이 언니 미현이 진실이 동준이가 마당에서 "재인아, 놀~자"하고 부르면 잽싸게 튀어 나가 깡통 차기, 땅 따먹기, 비석치기 하며 해질때 까지 놀았던 일. "재인아, 놀~자~"할때의 박자와 음률을 떠올려 마음속으로 반복해 불러봤는데 까마득한 옛날 추억에 가슴이 젖어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골에 나고 자란 게 이렇게 큰 행운 처럼 느껴지긴 처음이다.

 

박완서의 '엄마'는 확실히 케릭터가 강하다. 강하고 억척스럽다. 시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도 모자라 딸까지 서울에서 교육받게 했다. "시어머니한테 같은 잔소리를 듣고도 숙모들은 부뚜막에서 눈물을 짰지만 엄마는 웃기는 소리로 단박에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67)고 할 정도로 기가 셌다. 겉으로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속으로는 오직 아들딸 자식 걱정뿐이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웠던 건 일찍 돌아간 남편의 몫까지 해내기위해서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서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마지막 장면이 이해가 됐다. 박완서가 자신이 결혼하던 날 엄마가 집에 돌아와 대성통곡했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 없는 빈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는 얘기로 끝이 나는데, 그때 박완서의 눈물이 어떤 의미였을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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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소설전집 17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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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혼자 박완서 읽기' 두번째 책,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모르고 읽었다. 책을 2/3쯤 읽었을때, <나목>에 대한 언급이 나왔는데 그제서야 이책이 박완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와의 갈등, 가족 내에서의 역할 갈등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축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내면에서 자아와 싸우고 아파하며 느끼는 감정들이 정말 솔직하게 나타나 있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특별한 존재이지만, 박완서에게 '엄마'는 좀 더 색달랐던 것 같다. 엄마를 이야기하는 다른 책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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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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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얼간이(김보영, 김재숙) 포함, 미라언니와 만난 자리에서 작가 박완서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나는 박완서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지라 낄 수 없었던 게 좀 부끄러워서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박완서의 책 중 아무거나 꺼내들었는데 그게 바로 이 책,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역사 교사인데도 공부가 짧아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거의 의무적으로 역사 전문서, 역사 교양서, 심지어 역사 소설만 읽었더니 이런류의 책이 조금 낯설다.

 

제목의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주인공 영빈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같은 반 친구 현금이가 "난 훌륭하고 돈도 많이 버는 의사하고 결혼한 건데" 라며 장난처럼 던진 말이다. 영빈은 어쩌다보니 의사가 되어 있었고, 현금의 소식은 모른채 영빈은 영빈대로, 현금은 현금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갔다. 시간을 쪼개고 이어붙여 어떤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도록 주어진 시간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살아내는, '사니까 살아지는 삶'을 살았다. 영빈은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생길때마다 현금을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그런 자신을 어처구니 없어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현금을 만나게 된다. 잔잔하고 생기없던 영빈의 삶에 큰 물결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영빈은 몇십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금이 살던 2층집에 피어있던 붉은 능소화, 현금이 농담으로 던진 '말 한마디'를 잊지 못했다. 기억해야지, 다짐에서 기억하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없었는데 생겨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까만 점처럼, 그렇게 영빈의 몸과 정신에 새겨진 존재였다. 어떤 찰나의 이미지, 인상 혹은 한마디의 말이 사람에게 그토록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그런 낡았지만, 강한 이미지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봤다...

베이지색 면바지.. 그리고 크림슨색 니트..?  

 

현금은 등장 인물들 중 유일하게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가장이라는 귀속지위, 의사라는 성취지위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지위에 주어진 의무만을 꾸역꾸역 해나가며 낙없이 살던 영빈에게, 현금은 일탈의 공간을 제공한다. 영빈은 그 일탈의 공간을 찾아갈때마다, '그 곳에 아직 현금이 있을까'라며 손에 닿지 않는 신기루를 쫓듯 불안해한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내 것으로 하려 할때 느끼는 불안이라고 해야할까.

 

소설은 제도가 허락한 삶과 허락하지 않은 삶을 영빈과 그의 아내, 그리고 영빈과 현금의 관계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결국 제도가 허락한 범위내에서의 삶만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소설에 다른 또 하나의 대비되는 구조가 등장하는데,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의 삶과 그렇지 못하는 자의 삶이다. 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치킨 박'이라는 자, 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영묘의 남편 송경호이다. 영묘의 시댁은 재산이 수 조에 달하는 10대 재벌이다. 폐암에 걸린 아들에게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가문의 명성에 버금가는 장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찬찬히 준비해간다. 결국 송경호는 자신이 낫고 있다고 믿다가 죽음을 준비하지도 못하고, 아내, 자식들과 마지막 이별조차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맞이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당한 린치 한방에 돌연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P186) 라는 말처럼 송경호는 살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죽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반면 치킨박은 폐암 초기 선고를 받고, 병원 지하 기관실에서 자살했다.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음에도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코앞에 닥친 자신의 죽음 조차 인지하기 못하고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삶,

평생 치킨집을 운영해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이제 막 삶의 여유를 갖게 된 자가 암 초기 진단을 받고 가족의 남은 인생을 걱정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삶.

 

인간은 타의에 의해 세상에 나지만 세상과 작별할 시점은 선택할 수 있다. 이걸 누릴 수 있는 삶이 행복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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