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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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3권에서 맺음말에서도 언급되었던, '소용돌이 문화'. 이런 표현을 처음 사용하고, 정의를 내린 사람은 10년 동안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미국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이었다.

 

'소용돌이 문화'란 어느 한 곳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 소용돌이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문화적 경향성을 일컫는다.

 

소용돌이 문화가 초래한 결과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정치의 과잉, 지도자 숭배, 공직의 출세 도구화, 승자 독식 문화, 패권 쟁취를 위한 분열주의, 뜨거운 교육열,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문화, 여론의 휘발성, 피곤한 삶.

 

중앙 그리고 권력의 상층부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숨 건' 발버둥으로 점철되었던 시대. 지금이라고 해서 이 시대와 크게 다를까.

대부분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매진하도록 등 떠밀고, 떠밀리고 있지 않나.

 

이것도 전쟁이 남긴 후유증이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으로 기존의 사회구조, 질서 등이 붕괴되고 이후 권력이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와 방법(아무리 비도덕적, 비양심적인 것이라해도)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용인되었기 때문에.

 

이 편에서는 장면 정부 기간 4.19 혁명이 좌절되어 가는 모습, 5.16 군사쿠테타의 과정, 주체들 면면의 입장, 미국의 태도 등을 다루고 있다.

 

쿠테타가 발생한 16일 오전, 미국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이 3천 600명 밖에 안되니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윤보선은 동족끼리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이유로 진압을 거부했다. 쿠데타 발발 직후 이틀 넘게 잠적했던 장면 보다 더 비겁한 것 같다.

 

미국의 태도 역시 모호했다. 초기에 진압을 제안했다고 하지만, 곧 상원에서는 적극적 개입을 회피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쿠데타 후 공산주의작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자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친미적이긴 하나 권위가 없었던 장면 정부 보다는 강력한 반공정부가 미국의 기호에 맞았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미국은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하지는 않았어도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도록 하는데 영향을 준 것에 대한 책임은 있는 것 같다.

 

어째서 6.25 전쟁 중에 무고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과 그 유족들이 이후 명예회복이 되기는 커녕 5.16 군사정변으로 이중의 탄압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인증을 받기 위해 반공에 대한 그의 의지와 적극성을 보여줘야 했고 남로당에서 활동했던 자신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아직 60년대 2, 3권 70년대 1, 2, 3권 80년대 1, 2, 3권이 남아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무고한 죽음을 읽어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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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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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결과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수업에 참고할 만한 것 같다.

 

(74)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지가상환곡과 토지수득세로 지주와 정부에 내야 했다. 법적 상환 기간이 끝난 55년 3월 현재 상환곡은 전체의 56.8%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농지가의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 앉아 분배받은 농지를 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지주들이 이익을 본 것도 아니었다. 지주들이 농지 매수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은 5년 분할로 그 해 공정미가로 계산하여 현금 보상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공정미가는 시중미가의 30~40%에 지나지 앉아 지주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55년 5월까지 지가 보상이 끝났는데도 그 기간까지 보상받아야 할 액수의 28%만 지불받았다. 전쟁과 인플레로 생활유지를 위해 지가증권을 액면가치의 30~70% 수준으로 팔아버린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중소지주들은 몰락하였으며, 극소수 대지주들만 지가증권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내 공장을 불하받았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4.19 혁명의 배경으로는 부정선거, 이승만의 고령, 학생들의 정의감 등 여러가지를 꼽아 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이었다. 뒤통수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게 신문을 통해 확산되지 않았다면 4.19 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혁명은 공개투표, 서전투표를 자행하던 그 순간에 폭발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4.19혁명을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 위주로 기록, 기억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항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었으며, 대학생들의 참여도 서울 소재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최초의 목소리는 대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과의 사립대학 노교수들이었다고 한다. 주동 인물 중에 정치학, 경제학 교수는 없었다. 좀 이상한 일이다. 4.19에서의 요구가 얼마나 순수하고 정당했는지.. 느껴지는 것 같다.

 

1950년대 2권에 이어, 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 시기 기독교가 얼마나 큰 양적 성장을 해왔는지 잘 설명해준다. 한국엔 어째서 이토록 교회가 많은 걸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해방 당시 10만 명에 머물렀던 남한 개신교 신자 수가 50년 말엽에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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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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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원의 <남과북>이 자주 언급된다. 고등학교 1학때인가, 2학년 겨울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상, 하 두권이고 각각이 두꺼웠던 것 같은데, 너무 재밌어서 하루에 읽을 페이지 수를 정해두었을 만큼 아껴가며(?) 읽었었다.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 보니 책의 일부가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있었나"싶을 정도로 세세한 내용까지는 잘 생각이 안난다. 아이들한테는 '선생님이 너네 나이였을 때 정말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고 소개해줬다ㅋ 아, 최근에 읽었던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책도.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었다. '잃어버린'이란 '잊혀진'의 뜻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서 민간인 학살은 잊혀진 전쟁 중에서도 가장 깊숙히 묻혀버린 사건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때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주체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같은 방관자가 생겨난 게 아닐까.

 

국군 및 경찰, 우익 무장대에 의한 학살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피해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골이 발견되어도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참.. ;;

 

정전 협정 체결 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대 미 국무정관이 이승만에게 낚싯대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낚싯대를 선물받은 이승만이 "이 친구들이 이제 낚싯대를 주면서 고기는 우리더러 잡으라는 말이로군"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후 북한이.. 지금까지도 미국만 상대하며 남한을 소외시키려는 데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책에서 이문구와 이문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문구의 책은 '우리동네'를 읽고, 이문열의 책은 '삼국지' 정도만 읽었는데, 앞으로 이들의 책을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설명인 것 같아 옮겨적어 놓아야 겠다.

 

"(144) 이문구는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둘째형이 좌익 혐의로 살해당하고, 셋째형도 아버지와 연루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50년 초여름 대천해수욕장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의 할아버지도 곧 세상을 버렸고 56년에는 어머니마저 이승의 끈을 놓음으로써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문구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문학을 업으로 삼았다. ... 그가 자전적인 글에서 밝혔듯이 ‘사사로운 일로 남과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하고, 가장 꺼리는 일은 내 이론을 내세워 남과 토론하는 것, 그래서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하는’ 거의 기질 탓이기도 하고, 어릴 때 경험한 집안의 몰락을 통해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것은 그만큼 험하고 비극적인 삶을 예감하는 일임을 일찍부터 운명적으로 감지한 탓일는지도 모른다.“

 

“(145) 이문구의 반대편에는 이문열이 있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문열과 그의 가족 곁에는 항상 전담 대공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그들의 동향을 감시했으며... 이문열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을 갖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은 훗날 역으로 그를 또다른 이데올로기의 굴레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훗날 이문열이 보여준 행태는 ‘차별과 박해 논리의 내면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그건 자신을 위협하는 가공할 정도로 거대한 폭력의 벽 앞에서 되지도 않을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거나 자포자기하기보다는 그 폭력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실천함으로써 그 벽을 타고 오르는 ‘삶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패상과 비인간성이 셀 수 없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한글 간소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이 한글 전용화를 시행한 것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트집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도만큼은 문화계와 언론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밖에.. 제3세계 국가들의 평화공존 정책이 당시 한국에서는 엄청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었다는 것도 세계사 시간에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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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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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3.15 부정선거였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3.15 부정선거는 전국민적 항거를 이끌어낸 직접적 계기, 시발점, 도화선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 중, 그러니까 무수히 많이 열거되는 쉼표, 쉼표, 쉼표, 쉼표,,,,에 종지부을 찍은 마침표에 불과했던 거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에 대한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의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사건, 북진통일론, 한강 다리 폭파, 거짓 녹음 방송,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헤아릴 수가 없다.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나서 자란 이승만에게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있었기를 기대하는 게 무리인건가. 정말이지 이승만은 왕조의 부활을 꿈꿨던 게 아닐까. 친일매국노에게 보여준 관대함을 중도 세력, 좌익 세력에게도 조금만 나눠줬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1940년대를 읽는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다.

6.25전쟁을 지나고 있어서 그런가.. 이 시대를 활자로 접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물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백선엽은 이렇게 말했다.

'지옥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이 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자들의 유족들까지도 탄압을 받았다는 것 역시 놀라운 사실이었다.

 

2004년에 거창사건 관련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100만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와 부수단체의 반발 때문에 정부가 보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어느 외국 기자가 남긴, "전쟁의 최초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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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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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Anti-Trusteeship'과 '신탁통치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 ...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씨 집권과 그의 타락,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39)

 

 

"역사적 조건화로 인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극단으로 몰고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극단주의는 너무도 뚜렷이 대비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중간은 없다. 흥망 양자택일이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가는 속도도 빠르다. 분열하고 증오하는 일도 목숨 걸고 하지만, 공부하고 일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치닫는 한국은 참으로 묘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사회다. 아니 공존하는 정도를 넘어 '뫼비우스의 띠' 처럼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활력이 넘친다. 이기적인 생존경쟁도 치열하지만 이타적인 사회참여도 왕성하다. ....

 전투적 극단주의의 유산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펄펄 살아 있다. 좌우 그 어느 쪽이건 늘 에너지 과잉이다. '오버'는 기본이요, 필수다. 그래서 재미있고 무한한 가능성도 열려 있긴 하지만... "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있는 내용인데.. 해방정국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내 얘기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후에서 저자는, '이제는 중간으로 가야할 때'임을 피력하고 있다.


1947년,김원봉이 좌익 중심의3.1 기념 시민대회에 참여했다가 검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노덕술에 의해 고문까지 받았다. 김원봉이,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수가 있소"라고 말했다.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게 만들었다.

친일파와 한민당은 민족주의 이념을 독점한 김구가 자기들 보다도 강경한 반탁, 반모스크바 협정 태도를 취한 결과 어부지리 효과를 극적으로 얻었다. 이것은 하나의 반전이었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 반공주의는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했었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 세력에게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김구는 반탁 주도로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던 친일파에게 큰 힘을 준 셈이었다.

<5.10 총선거 거부는 옳았는가?> 에서.. 저자는, "만일 남북 협상파 정치 지도자들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그들은 선거에서 이승만을 패배 시키는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김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좀 더 심화시켰다.;;;;


인상적이었던 부분.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중간파 정치인들이 명분을 중시하여 5.10 선거를 전면적으로 보이코트한 것은 이승만을 선두로 하는 보수세력에게 큰 정치적 이득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무릇 정치란 것은 결코 관념의 유희가 아니고 구체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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