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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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 문제를 제기한 것만으로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처벌될 수 있었다. 정말 코미디다. 어떤 사람이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돈 있는 사라은 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라고 한 말이,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복돋우어서 모순된 사회구조의 타파를 위한 무산계급의 봉기를 선동한 내용"으로 왜곡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콩 심은데서 팥이 자라는 황당한 경우가 아닌가....ㅋ

 

1967년 7월에 박정희가 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직후의 총선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게 되는데, 이 선거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이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공화당 스스로 비공식적으로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일이 생기면서 부정선거 문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북한은 늘 박정희 정권의 든든한 우군'이라는 표현이 잘 와닿는다.

 

되돌리고 싶은, 무효로 하고 싶은 사건 중 하나는 한일협정의 체결이다. 군위안부 문제나 원폭피해 등에 대한 언급 없이 오로지 독립축하금 명목의 3억 달러와 차관 3억 달러를 제공받는데 합의하게 되는데, 이 3억 달러는 이승만이 요구만 20억 달러, 장면 정부가 요구한 28억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액수다. 장면 정부가 처음 일본에 100억 달러를 요구했을때 일본이 '그 절반 정도면 안 되겠느냐'라고 말했다는데... 고작 3억 달러를 받겠다고 했으니.. 일본은 그 순간 얼마나 기뻐했을까;;;; 군사정부의 태생적 취약성 때문에 이런 저자세의 외교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편 기업 세무감사 때 감사원들이 회사에 사정, 사정하여 없는 비리도 만들어서 벌금을 내게 했던 사례가 빈번했다고 한다. 기업은 더 귀찮아지는 것이 싫어서 서류를 조작해 비리가 있는 것으로 꾸며 벌금을 냈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 편에서 다루는 60년대의 마지막 사건은 바로 3선 개헌이다. 박정권은 유권자를 상대로 돈과 밀가루를 퍼부었다. 그 결과 투표율 77%에 찬성률은 65%을 기록했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경쟁적으로 표 모으기 불법이 자행됐을지.. 안봐도 비디오다.


박정희는 자기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를 이승만을 향해 한 적이 있다. 이런말이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소. 12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四選 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동정할 수가 없다.

이책의 맺음말 부분에서 작가가 인용한 어떤 사람의 말인데,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이라는 주제와 잘 맞는것 같다.

"5.16 자체가 윤리성을 배제한 변칙이었다. 이래서 모든 사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그때부터 판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대화가 총체적인 사회변혁이어야한다는 사실을 인식 못했고, '해서는 안 될 일'과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간 못했다. 이 모든 어두운 얼굴들이 따지고 보면 5.16 쿠데타의 변칙성, 그리고 무이념과 몰도덕성에서 연유된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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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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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읽히는데, 머리에 남는 건 별로 없다;

진도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내용에 대한 고민 없이 마구 훑는 느낌이다. 아님... 정권의 폭압에 무뎌져서 그런 걸까, 감동이나 감흥이 없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줄 알았던 장준하가 5.16 쿠데타 당시 쿠데타에 협조했었다는 사실은 좀 놀라웠다. 저자는 이런 장준하를 '김구의 판박이'이라고 했다.

 

5.16 쿠데타 직후 장준하를 <사상계>를 통해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나보다.

 

산업화와 수출 전쟁을 위해 권위주의적 사회 통제가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박광주의 의견는, 얼핏 들으면 그게 그 말인 것 같지만,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군사정권의 전 기간을 통한 권위주의의 강화는 본원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이 산업화의 성공적인 수행을 통해 통제의 물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났다."

 

(337) "개발 독재 체제하의 시장은 새로운 전장이었다. 공정하고 법이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었다. 폭력과 협박과 온갖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연고와 정실이 난무했다. 뺵과 줄이 총동원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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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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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3권에서 맺음말에서도 언급되었던, '소용돌이 문화'. 이런 표현을 처음 사용하고, 정의를 내린 사람은 10년 동안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미국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이었다.

 

'소용돌이 문화'란 어느 한 곳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 소용돌이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문화적 경향성을 일컫는다.

 

소용돌이 문화가 초래한 결과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정치의 과잉, 지도자 숭배, 공직의 출세 도구화, 승자 독식 문화, 패권 쟁취를 위한 분열주의, 뜨거운 교육열,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문화, 여론의 휘발성, 피곤한 삶.

 

중앙 그리고 권력의 상층부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숨 건' 발버둥으로 점철되었던 시대. 지금이라고 해서 이 시대와 크게 다를까.

대부분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매진하도록 등 떠밀고, 떠밀리고 있지 않나.

 

이것도 전쟁이 남긴 후유증이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으로 기존의 사회구조, 질서 등이 붕괴되고 이후 권력이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와 방법(아무리 비도덕적, 비양심적인 것이라해도)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용인되었기 때문에.

 

이 편에서는 장면 정부 기간 4.19 혁명이 좌절되어 가는 모습, 5.16 군사쿠테타의 과정, 주체들 면면의 입장, 미국의 태도 등을 다루고 있다.

 

쿠테타가 발생한 16일 오전, 미국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이 3천 600명 밖에 안되니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윤보선은 동족끼리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이유로 진압을 거부했다. 쿠데타 발발 직후 이틀 넘게 잠적했던 장면 보다 더 비겁한 것 같다.

 

미국의 태도 역시 모호했다. 초기에 진압을 제안했다고 하지만, 곧 상원에서는 적극적 개입을 회피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쿠데타 후 공산주의작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자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친미적이긴 하나 권위가 없었던 장면 정부 보다는 강력한 반공정부가 미국의 기호에 맞았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미국은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하지는 않았어도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도록 하는데 영향을 준 것에 대한 책임은 있는 것 같다.

 

어째서 6.25 전쟁 중에 무고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과 그 유족들이 이후 명예회복이 되기는 커녕 5.16 군사정변으로 이중의 탄압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인증을 받기 위해 반공에 대한 그의 의지와 적극성을 보여줘야 했고 남로당에서 활동했던 자신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아직 60년대 2, 3권 70년대 1, 2, 3권 80년대 1, 2, 3권이 남아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무고한 죽음을 읽어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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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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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결과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수업에 참고할 만한 것 같다.

 

(74)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지가상환곡과 토지수득세로 지주와 정부에 내야 했다. 법적 상환 기간이 끝난 55년 3월 현재 상환곡은 전체의 56.8%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농지가의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 앉아 분배받은 농지를 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지주들이 이익을 본 것도 아니었다. 지주들이 농지 매수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은 5년 분할로 그 해 공정미가로 계산하여 현금 보상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공정미가는 시중미가의 30~40%에 지나지 앉아 지주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55년 5월까지 지가 보상이 끝났는데도 그 기간까지 보상받아야 할 액수의 28%만 지불받았다. 전쟁과 인플레로 생활유지를 위해 지가증권을 액면가치의 30~70% 수준으로 팔아버린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중소지주들은 몰락하였으며, 극소수 대지주들만 지가증권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내 공장을 불하받았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4.19 혁명의 배경으로는 부정선거, 이승만의 고령, 학생들의 정의감 등 여러가지를 꼽아 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이었다. 뒤통수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게 신문을 통해 확산되지 않았다면 4.19 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혁명은 공개투표, 서전투표를 자행하던 그 순간에 폭발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4.19혁명을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 위주로 기록, 기억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항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었으며, 대학생들의 참여도 서울 소재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최초의 목소리는 대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과의 사립대학 노교수들이었다고 한다. 주동 인물 중에 정치학, 경제학 교수는 없었다. 좀 이상한 일이다. 4.19에서의 요구가 얼마나 순수하고 정당했는지.. 느껴지는 것 같다.

 

1950년대 2권에 이어, 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 시기 기독교가 얼마나 큰 양적 성장을 해왔는지 잘 설명해준다. 한국엔 어째서 이토록 교회가 많은 걸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해방 당시 10만 명에 머물렀던 남한 개신교 신자 수가 50년 말엽에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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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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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원의 <남과북>이 자주 언급된다. 고등학교 1학때인가, 2학년 겨울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상, 하 두권이고 각각이 두꺼웠던 것 같은데, 너무 재밌어서 하루에 읽을 페이지 수를 정해두었을 만큼 아껴가며(?) 읽었었다.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 보니 책의 일부가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있었나"싶을 정도로 세세한 내용까지는 잘 생각이 안난다. 아이들한테는 '선생님이 너네 나이였을 때 정말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고 소개해줬다ㅋ 아, 최근에 읽었던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책도.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었다. '잃어버린'이란 '잊혀진'의 뜻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서 민간인 학살은 잊혀진 전쟁 중에서도 가장 깊숙히 묻혀버린 사건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때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주체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같은 방관자가 생겨난 게 아닐까.

 

국군 및 경찰, 우익 무장대에 의한 학살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피해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골이 발견되어도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참.. ;;

 

정전 협정 체결 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대 미 국무정관이 이승만에게 낚싯대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낚싯대를 선물받은 이승만이 "이 친구들이 이제 낚싯대를 주면서 고기는 우리더러 잡으라는 말이로군"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후 북한이.. 지금까지도 미국만 상대하며 남한을 소외시키려는 데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책에서 이문구와 이문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문구의 책은 '우리동네'를 읽고, 이문열의 책은 '삼국지' 정도만 읽었는데, 앞으로 이들의 책을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설명인 것 같아 옮겨적어 놓아야 겠다.

 

"(144) 이문구는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둘째형이 좌익 혐의로 살해당하고, 셋째형도 아버지와 연루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50년 초여름 대천해수욕장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의 할아버지도 곧 세상을 버렸고 56년에는 어머니마저 이승의 끈을 놓음으로써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문구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문학을 업으로 삼았다. ... 그가 자전적인 글에서 밝혔듯이 ‘사사로운 일로 남과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하고, 가장 꺼리는 일은 내 이론을 내세워 남과 토론하는 것, 그래서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하는’ 거의 기질 탓이기도 하고, 어릴 때 경험한 집안의 몰락을 통해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것은 그만큼 험하고 비극적인 삶을 예감하는 일임을 일찍부터 운명적으로 감지한 탓일는지도 모른다.“

 

“(145) 이문구의 반대편에는 이문열이 있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문열과 그의 가족 곁에는 항상 전담 대공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그들의 동향을 감시했으며... 이문열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을 갖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은 훗날 역으로 그를 또다른 이데올로기의 굴레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훗날 이문열이 보여준 행태는 ‘차별과 박해 논리의 내면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그건 자신을 위협하는 가공할 정도로 거대한 폭력의 벽 앞에서 되지도 않을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거나 자포자기하기보다는 그 폭력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실천함으로써 그 벽을 타고 오르는 ‘삶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패상과 비인간성이 셀 수 없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한글 간소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이 한글 전용화를 시행한 것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트집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도만큼은 문화계와 언론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밖에.. 제3세계 국가들의 평화공존 정책이 당시 한국에서는 엄청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었다는 것도 세계사 시간에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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