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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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결과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수업에 참고할 만한 것 같다.

 

(74)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연간 수확량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지가상환곡과 토지수득세로 지주와 정부에 내야 했다. 법적 상환 기간이 끝난 55년 3월 현재 상환곡은 전체의 56.8%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농지가의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 앉아 분배받은 농지를 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지주들이 이익을 본 것도 아니었다. 지주들이 농지 매수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은 5년 분할로 그 해 공정미가로 계산하여 현금 보상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공정미가는 시중미가의 30~40%에 지나지 앉아 지주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55년 5월까지 지가 보상이 끝났는데도 그 기간까지 보상받아야 할 액수의 28%만 지불받았다. 전쟁과 인플레로 생활유지를 위해 지가증권을 액면가치의 30~70% 수준으로 팔아버린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중소지주들은 몰락하였으며, 극소수 대지주들만 지가증권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내 공장을 불하받았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4.19 혁명의 배경으로는 부정선거, 이승만의 고령, 학생들의 정의감 등 여러가지를 꼽아 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이었다. 뒤통수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게 신문을 통해 확산되지 않았다면 4.19 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혁명은 공개투표, 서전투표를 자행하던 그 순간에 폭발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4.19혁명을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 위주로 기록, 기억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항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었으며, 대학생들의 참여도 서울 소재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최초의 목소리는 대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과의 사립대학 노교수들이었다고 한다. 주동 인물 중에 정치학, 경제학 교수는 없었다. 좀 이상한 일이다. 4.19에서의 요구가 얼마나 순수하고 정당했는지.. 느껴지는 것 같다.

 

1950년대 2권에 이어, 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 시기 기독교가 얼마나 큰 양적 성장을 해왔는지 잘 설명해준다. 한국엔 어째서 이토록 교회가 많은 걸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해방 당시 10만 명에 머물렀던 남한 개신교 신자 수가 50년 말엽에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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