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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홍성원의 <남과북>이 자주 언급된다. 고등학교 1학때인가, 2학년 겨울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상, 하 두권이고 각각이 두꺼웠던 것 같은데, 너무 재밌어서 하루에 읽을 페이지 수를 정해두었을 만큼 아껴가며(?) 읽었었다.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 보니 책의 일부가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있었나"싶을 정도로 세세한 내용까지는 잘 생각이 안난다. 아이들한테는 '선생님이 너네 나이였을 때 정말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고 소개해줬다ㅋ 아, 최근에 읽었던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책도.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었다. '잃어버린'이란 '잊혀진'의 뜻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서 민간인 학살은 잊혀진 전쟁 중에서도 가장 깊숙히 묻혀버린 사건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때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주체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같은 방관자가 생겨난 게 아닐까.
국군 및 경찰, 우익 무장대에 의한 학살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피해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골이 발견되어도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참.. ;;
정전 협정 체결 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대 미 국무정관이 이승만에게 낚싯대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낚싯대를 선물받은 이승만이 "이 친구들이 이제 낚싯대를 주면서 고기는 우리더러 잡으라는 말이로군"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후 북한이.. 지금까지도 미국만 상대하며 남한을 소외시키려는 데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책에서 이문구와 이문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문구의 책은 '우리동네'를 읽고, 이문열의 책은 '삼국지' 정도만 읽었는데, 앞으로 이들의 책을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설명인 것 같아 옮겨적어 놓아야 겠다.
"(144) 이문구는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둘째형이 좌익 혐의로 살해당하고, 셋째형도 아버지와 연루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50년 초여름 대천해수욕장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의 할아버지도 곧 세상을 버렸고 56년에는 어머니마저 이승의 끈을 놓음으로써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문구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문학을 업으로 삼았다. ... 그가 자전적인 글에서 밝혔듯이 ‘사사로운 일로 남과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하고, 가장 꺼리는 일은 내 이론을 내세워 남과 토론하는 것, 그래서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하는’ 거의 기질 탓이기도 하고, 어릴 때 경험한 집안의 몰락을 통해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것은 그만큼 험하고 비극적인 삶을 예감하는 일임을 일찍부터 운명적으로 감지한 탓일는지도 모른다.“
“(145) 이문구의 반대편에는 이문열이 있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문열과 그의 가족 곁에는 항상 전담 대공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그들의 동향을 감시했으며... 이문열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을 갖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강한 이데올로기 혐오증은 훗날 역으로 그를 또다른 이데올로기의 굴레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훗날 이문열이 보여준 행태는 ‘차별과 박해 논리의 내면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그건 자신을 위협하는 가공할 정도로 거대한 폭력의 벽 앞에서 되지도 않을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거나 자포자기하기보다는 그 폭력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실천함으로써 그 벽을 타고 오르는 ‘삶의 지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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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패상과 비인간성이 셀 수 없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한글 간소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이 한글 전용화를 시행한 것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트집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도만큼은 문화계와 언론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밖에.. 제3세계 국가들의 평화공존 정책이 당시 한국에서는 엄청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었다는 것도 세계사 시간에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