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2 (무선) - 제1부 한의 모닥불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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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동이 최익승의 농락으로 토벌대 후위원장직을 떠맡게 되는 장면이다.

(125) "감투라면 무엇이나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감투는 진정 싫었다. 큰 아들은 빨갱이 이기 전에 아들이었다. 무엇 쓸 감투가 없어 아들을 적으로 삼는 후위원장 감투를 쓸 것인가. 정사장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핏줄의 끌림을 큰아들 하섭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분열책의 일환으로나 행해졌을 일이 이렇게 되풀이 되었다니.. 하긴 최익승이라는 자는 일본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대성 통곡하며 자취를 감췄다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다시 기어나와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니, 그때나 이때나 다를 바 없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건 생명을 앗아가는 것 만큼이나 치졸하고 못된 짓인 것 같다.

 

(128) "여수입민들이고 순천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의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심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을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나만 모르고 다 아는 사실인가? 책에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라는 자가 등장하는데 사람들을 일본식 칼을 휘둘러 공개처형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실존인물인가, 해서 찾아봤더니 정말 검색이 됐다.

 

이런 사람이다.

 

김종원(金宗元, 일본어: 金山宗元, 1922년 ~ 1964년 1월 30일)은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출생한 일본군 군인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이다.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년 10월 27일 마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여순사건 당시 반란을 진압하였다.[1]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들을 시민들이 두려움 속에 지켜보는 가운데서 권총으로 쏴 죽이고, 일본도로 목을 잘랐다.

1956년 5ㆍ15 대통령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 4월혁명 뒤 임흥순과 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196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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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 (무선) - 제1부 한의 모닥불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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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은 고등학교때 읽었고, <한강>도 비슷한 시기에 읽다가 말았다. <태백산맥>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여태껏 읽기를 미뤄왔었는데, 얼마전 학교에서 급식 먹으면서 선생님들과 책 이야기를 하던 중, <태백산맥>을 박경리의 <토지>와 혼동한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ㅠ 다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창피;;;

 

보영이가, 읽다보면 운동권들의 생리(?!)랄까, 여튼 그런것들이 떠오를거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염상진과 이범우, 안창민 등의 주인공과 내가 알았던 사람들을 자꾸 비교하면서 느끼게 되는 묘한 재미와. 그리움과. 부끄러움.

 

(147) "염상진이 그들 책을 통해서 받은 충격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었고, 새로운 빛의 출현이었고, 새로운 길의 열림이었다. 가난으로 기죽어 식어 있는 피를 뜨겁게 끓게 했고, 비천으로 주눅 들어 움츠러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가난도 비천도 함께 면해 보자고 사범학교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어줍짢고 가소로운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마르크스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볼셰비키 혁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그까짓 소학교 선생 자리는 짚신짝 버리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부분은, 대학교 1학년 때 학회에 처음 들어 마르크스 철학 세미나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염상진의 미래가 궁금하다.

 

(156)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 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 목포가 나주평양의 쌀을 실어내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벌교는 보성관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161) "사람들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허기 무식헌 것들이 믿고 의지헐 디 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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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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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만에 십자군이야기 완결판이 나왔다. 예약 주문 했던 책을 받자마자 읽어나갔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쉽게 읽히는지 신기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인가. 1, 2권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가물가물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덮어놓고 읽었다.ㅋ

 

가장 먼저 3차 십자군을 떠난 사람은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였다. 어느 한쪽이 귀국이 늦어질 경우 상대방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서약하고 두 사람이 함께 출발했다.

 

사실 이들보다 먼저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출발했는데 프리드리히 1세는 원정 중에 강을 건너다 익사하고 말았다. 독일 황제의 군대는 해체되었다.

 

"3차 십자군은 세속의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신도, 신의 도움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오직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75)

 

유럽의 십자군이 상대해야 했던 이슬람의 통치자는 술탄 살라딘이었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둘 다 신을 제쳐놓고 남자대 남자의 대결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유사했다. 십자군의 역사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3차 십자군 때부터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의 여동생과 약혼한 사이였는데, 어머니의 요구로 파혼을 하게 된다. 필리프와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십자군은 리처드의 활약으로 항구 도시 아코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프는 프랑스로 귀국했다.

 

육상에서 벌어진 아르수프 전투에서도 살라딘이 패배했는데 아르수프 전투는 절대 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던 살라딘이 결코 불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전투였다.

 

한편 남겨놓고 가는 영토를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원정을 떠나라는 의미로 맺어진 리처드와 필리프 사이의 '신 앞에서의 평화'는 필리프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깨져버렸다. 귀국한 이후 영국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의 막내 동생 존을 끌어들여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헨리 2세의 아들 중 하나인 리처드가 영국을 비운 사이 또 한 명의 아들 존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공격하는 구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정 중에 있던 리처드의 심기가 복잡했을 것이다.

 

리처드의 전술에 감동받은 살라딘은 말 두필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리고 리처드는 본국이 처한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해야했기 때문에 살라딘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에 속한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의 안전과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한다는 내용의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긴 뒤 영국에 도착했다. 프랑스에 필리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고 리처드는 사망하고 만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존이 왕이 되었다. 어쨌든 리처드와 살리딘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도 사이에는 얼마간의 평화가 지속되었다.

 

한편 새로 선출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이 계속 이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4차 십자군이 꾸려지는데, 4차 십자군의 주역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단돌로, 살라딘의 동생 알아딜이었다.

 

제후들은 배의 건조와 십자군의 수송을 베네치아에 요청했는데, 이때 베네치아는 이집트와 비밀 협정을 체결한 뒤였으면서 이 요청을승낙했다. 대신 제후들에게 십자군이 정복한 땅의 절반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후들이 이를 승낙해 베네치아는 원정 준비를 마쳤는데 이때 모인 십자군은 예상했던 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4차 십자군이 자라에 체류하고 있을때, 비잔티움의 황자 알렉시우스가 찾아온다.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가 동생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탈옥에 성공하여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숙부를 제거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 대가로 그리스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 아래 통합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찬성의 뜻을 분명히 했다. 십자군은 공격의 대상이 이슬람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자 당혹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뚯을 같이 했고, 일부만이 예루살렘 행을 강행했다고 한다.

 

최악의 십자군이라고 불리우게 된 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공격한 이유는 단지 베네치아 상인들이 경제적 이득을 추구했기 때문인 줄 알았다. 비잔티움의 이러한 내분이 근본 원인이었을 줄이야.  

 

결국 10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리처드와 살라딘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성지에 사는 그리스도교도들은 평화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십자군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청은 끈질기게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다. 

 

5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 이슬람의 통치자는 살라딘의 손자 알카밀이었다. 알카밀은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을 돌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두 차례나 했는데, 십자군은 이를 거절했다. 이슬람은 '불신앙의 무리'이기 때문에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타협이 아니라 피로써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화를 포기한 알카밀은 나일강 댐의 물을 방류하여 십자군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십자군은 어쩔 수 없이 이집트에서 완전 철수했다. 애초 알카밀의 제안을 수용했더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회복할 수 있었을텐데. 아집 덩어리 교황 펠라조 때문에 5차 십자군은 완전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6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했는데, 많은 시간을 지체했고, 교황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아 파문 당한 결과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원정이었다. 이때 프리드리히와 알카밀이 석달간 교섭하여 강화를 체결했는데,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 측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교섭의 결과로 얻게 된 성지 회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6차 십자군 이후 이슬람의 통치권은 살라딘 계통에서 노예왕조(맘루크왕조)로 넘어갔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로 침공해 온 프랑스 왕 루이가 이끄는 7차 십자군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한편 이슬람은 몽굴군에게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슬람 세계의 절반을 점령당했다. 프랑스 왕 루이는 이런 상황에서 8차 십자군을 결행했다가 아프리카 북부에 상륙하자 마자 사망하여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이제 유럽에서 십자군이 원정 올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누구나 확신하게 됐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원정은 그것을 바라고 선동한 신과 교황에게는 책임이 없고 어디까지나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실행방식에서 잘못을 저지른 인간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교황은 결코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황의 권위가 실추된 이유는 경쟁 상대였던 신성로마제국이 약화된 사이 프랑스의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는데, 이부분은 설명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재밌었다. 다 읽고나니 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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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시간에 잠기다 - 한 인문주의자의 피렌체 역사.문화 기행 깊은 여행 시리즈 2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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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아. 피렌체..

3박 4일 동안 공기만 마셔도 배고픔을 모르고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터키라고 답했었는데, 이제는 무조건 이탈리아 피렌체라고 답할거다.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하늘은 사람들에게 가끔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데, 어떤 때에는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재능을 단 한 사람에게만 엄청나게 내리실 때가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무치 신처럼 행하여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보인다. 인간의 기술로 이룬 것이 아니라 마치 신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64)

 

눈길이 닿는 곳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여러 천재들의 작품들이 줄을 지어 있겠지.

오래전 언젠가 그들이 걸었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벅차고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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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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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인지 모르고 샀다. 옮긴이 ‘함규진’도 이름이 왠지 익숙해서 그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 지금 찾아보니 <역사법정>이 있다. 그리고 얼마전 한겨레 신문, 신간 소개하는 코너에선가..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책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받아보니 만화책이고, 사이즈도 다른 책보다 컸다.

 

조 사코라는 미국인 기자가 이스라엘 점령지인 팔레스타인을 2년 동안 취재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기록한 만화책이다. 보고 들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줄 뿐, 어떤 판단을 하거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는 평화를 원하는 이스라엘인들조차 대부분 시온주의자이고, 그들이 아랍인들보다 강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이 은폐되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제시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 이 지역의 문제가 ‘유대인과 아랍인’ 두 민족 간의 대립 속에서 비롯된 것이고 하지만, 2차 대전 직후에는 영국, 그 후에는 미국의 지배 논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식민지 시절 일제가 우리에게 가한 것 이상인 것 같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대부분이 짧게 혹은 길게 투옥의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당하는 장면들은 계속 서대문 형무소를 떠올리게 했다.

 

중동 유일의 민주국가라는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공공연히 인권이 무자비하게 유린되고 있는데도 그것이 문제시 되지 않는 상황.. 아들 여럿과 남편을 잃은 한 여자가 조 사코에게 자신과 가족이 당한 폭력을 털어놓으면서, ‘인터뷰에 응한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라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내가 마치 부인 앞에 서있는 조 사코가 된 것처럼 낯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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