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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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만에 십자군이야기 완결판이 나왔다. 예약 주문 했던 책을 받자마자 읽어나갔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쉽게 읽히는지 신기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인가. 1, 2권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가물가물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덮어놓고 읽었다.ㅋ

 

가장 먼저 3차 십자군을 떠난 사람은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였다. 어느 한쪽이 귀국이 늦어질 경우 상대방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서약하고 두 사람이 함께 출발했다.

 

사실 이들보다 먼저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출발했는데 프리드리히 1세는 원정 중에 강을 건너다 익사하고 말았다. 독일 황제의 군대는 해체되었다.

 

"3차 십자군은 세속의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신도, 신의 도움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오직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75)

 

유럽의 십자군이 상대해야 했던 이슬람의 통치자는 술탄 살라딘이었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둘 다 신을 제쳐놓고 남자대 남자의 대결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유사했다. 십자군의 역사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3차 십자군 때부터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의 여동생과 약혼한 사이였는데, 어머니의 요구로 파혼을 하게 된다. 필리프와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십자군은 리처드의 활약으로 항구 도시 아코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프는 프랑스로 귀국했다.

 

육상에서 벌어진 아르수프 전투에서도 살라딘이 패배했는데 아르수프 전투는 절대 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던 살라딘이 결코 불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전투였다.

 

한편 남겨놓고 가는 영토를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원정을 떠나라는 의미로 맺어진 리처드와 필리프 사이의 '신 앞에서의 평화'는 필리프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깨져버렸다. 귀국한 이후 영국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의 막내 동생 존을 끌어들여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헨리 2세의 아들 중 하나인 리처드가 영국을 비운 사이 또 한 명의 아들 존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공격하는 구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정 중에 있던 리처드의 심기가 복잡했을 것이다.

 

리처드의 전술에 감동받은 살라딘은 말 두필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리고 리처드는 본국이 처한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해야했기 때문에 살라딘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에 속한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의 안전과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한다는 내용의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긴 뒤 영국에 도착했다. 프랑스에 필리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고 리처드는 사망하고 만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존이 왕이 되었다. 어쨌든 리처드와 살리딘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도 사이에는 얼마간의 평화가 지속되었다.

 

한편 새로 선출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이 계속 이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4차 십자군이 꾸려지는데, 4차 십자군의 주역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단돌로, 살라딘의 동생 알아딜이었다.

 

제후들은 배의 건조와 십자군의 수송을 베네치아에 요청했는데, 이때 베네치아는 이집트와 비밀 협정을 체결한 뒤였으면서 이 요청을승낙했다. 대신 제후들에게 십자군이 정복한 땅의 절반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후들이 이를 승낙해 베네치아는 원정 준비를 마쳤는데 이때 모인 십자군은 예상했던 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4차 십자군이 자라에 체류하고 있을때, 비잔티움의 황자 알렉시우스가 찾아온다.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가 동생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탈옥에 성공하여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숙부를 제거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 대가로 그리스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 아래 통합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찬성의 뜻을 분명히 했다. 십자군은 공격의 대상이 이슬람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자 당혹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뚯을 같이 했고, 일부만이 예루살렘 행을 강행했다고 한다.

 

최악의 십자군이라고 불리우게 된 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공격한 이유는 단지 베네치아 상인들이 경제적 이득을 추구했기 때문인 줄 알았다. 비잔티움의 이러한 내분이 근본 원인이었을 줄이야.  

 

결국 10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리처드와 살라딘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성지에 사는 그리스도교도들은 평화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십자군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청은 끈질기게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다. 

 

5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 이슬람의 통치자는 살라딘의 손자 알카밀이었다. 알카밀은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을 돌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두 차례나 했는데, 십자군은 이를 거절했다. 이슬람은 '불신앙의 무리'이기 때문에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타협이 아니라 피로써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화를 포기한 알카밀은 나일강 댐의 물을 방류하여 십자군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십자군은 어쩔 수 없이 이집트에서 완전 철수했다. 애초 알카밀의 제안을 수용했더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회복할 수 있었을텐데. 아집 덩어리 교황 펠라조 때문에 5차 십자군은 완전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6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했는데, 많은 시간을 지체했고, 교황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아 파문 당한 결과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원정이었다. 이때 프리드리히와 알카밀이 석달간 교섭하여 강화를 체결했는데,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 측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교섭의 결과로 얻게 된 성지 회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6차 십자군 이후 이슬람의 통치권은 살라딘 계통에서 노예왕조(맘루크왕조)로 넘어갔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로 침공해 온 프랑스 왕 루이가 이끄는 7차 십자군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한편 이슬람은 몽굴군에게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슬람 세계의 절반을 점령당했다. 프랑스 왕 루이는 이런 상황에서 8차 십자군을 결행했다가 아프리카 북부에 상륙하자 마자 사망하여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이제 유럽에서 십자군이 원정 올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누구나 확신하게 됐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원정은 그것을 바라고 선동한 신과 교황에게는 책임이 없고 어디까지나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실행방식에서 잘못을 저지른 인간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교황은 결코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황의 권위가 실추된 이유는 경쟁 상대였던 신성로마제국이 약화된 사이 프랑스의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는데, 이부분은 설명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재밌었다. 다 읽고나니 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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