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실록 - 능에서 만난 조선의 임금
이규원 지음 / 글로세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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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 왕조 시기에 조성된 42개의 왕릉과 주변 왕족들의 능, 원 9기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도 풍부하고, 왕조 시기에 있었던 주요 사실들도 잘 정리 되어 있다. 하나의 왕릉 소개가 끝날 때마다 '찾아가는 길' 코너를 마련해 위치, 교통편, 주요 특징 등을 간략히 정리해주는데, 이것만 모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왕릉이 조성된 배경과 과정, 택지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해 최고 권력자로서의 왕이 모습뿐만 아니라 아비로서의, 남편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고, 죽음 앞에 장사없다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됐다.

 

건원릉||

태조의 무덤인데 유일하게 '릉' 앞에 두 자가 붙는다. 건원릉에는 갈대가 무성한데 태조의 고향 함흥에서 직접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의 흙과 갈대를 이식하고 사초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후손들이 잘 지켜온 것이다. 건원릉 주변에 왕, 왕비, 추존 왕을 예장한 다른 능도 많다고 한다. 모두 17기가 있는데 이 중 능호를 사용하고 있는 건 아홉 개라서 '동구릉'이라고 부른다.

 

태조 원비 신의고황후(한씨)능인 제릉은 정종가 묻힌 후릉과 함께 북텩에 있어서 볼 수가 없다.

 

정릉||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강씨)의 능이다. 원래는 태조가 정했던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능을 훼손하고, 지금의 성북구로 이장했으며 석물들은 청계천 다리를 복구하는 데 사용토록해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고려대 보건대학 캠퍼스가 정릉에 있어서 셔틀이 다녔고, 고대부속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느라 한 달 동안 정릉으로 출퇴근을 했는데, 정작 '정릉'에 가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아쉽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5년이나 했지만, 난 서울을 너무 모른다ㅠ

 

헌릉 ||

태종의 능이다. 순조의 인릉과 인접해 있어서 '헌인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헌릉은 태종과 태종의 원비인 원경왕후의 동원이봉릉이라고 한다. 난간석으로 두 릉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이 살아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가 사후에라도 정답게 지내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이란다.

 

영릉 ||

세종의 능이다. 효종의 능도 영릉인데, 각각 英陵, 寧陵이다. 이를 합쳐 영녕릉이라고 부른다. 세종의 영릉은 원래 헌릉 서쪽에 소헌왕후와 합장되었으나 예종때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옯겨졌다.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현릉 ||

문종의 능으로 동구릉에 속해 있다. 현덕왕후의 무덤과 나란하게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세조때 한번 파헤쳐졌다.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고 악담을 한 뒤 세자가 죽자 세조는 현릉을 파헤쳐 형수의 유골만 꺼내 물가에 매장했다.

 

장릉 ||

단종의 능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세조의 명으로 아무도 거두지 못했던 단종의 시신을 영월 호장 엄흥도가 수습해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있떤 자리만 녹자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장릉은 건원릉, 영릉(세종)과 함께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사릉 ||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 64년을 더 살았다. 중종때까지 왕실과 권력의 부침을 목도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성 안에서 살라는 조정의 권유를 무시하고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지어 평생 소복만 입은 채 주민들이 보태주는 양식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광릉 ||

세조의 능이다. 근처 다른 언덕에 정희왕후의 능도 있어 동원이강릉이다. 세조는 죽으면서 능 관리를 철저히 당부했는데, 그래서 조선왕조 내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고, 현재까지도 풀 한 포기, 돌 하나의 채취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경릉 ||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보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덕종의 부인은 소혜왕후로서 예종, 성종, 연산군 3대 왕에 걸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인수대비다. 그래서 능의 구조는 동원이강릉인데 덕종 능보다 인수대비의 능이 훨씬 더 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경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데 경릉을 포함해 다섯 기의 능이 있어 '서오릉'이라고 부른다.

 

창릉 ||

예종의 능. 계비 안순왕후와의 동원이강릉이다.

여기까지에서 정순왕후(단종), 정희왕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왕후(예종 계비)를 조선 왕실 4대 독거왕비(獨妃)로 꼽는다. 비슷한 시기에 독비가 됐고, 왕실에 과부가 넷이나 되다 보니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얼마전 케이블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배우 이미숙(정희왕후)과 채시라(인수대비)가 폭풍 카리스마 발휘하며 대결구도 형성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공릉 ||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단릉이며 세자빈 신분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석물들이 생략되어 있다고 한다. 순릉(공혜왕후), 영릉(진종, 효순왕후)과 함께 파주삼릉이라 불린다.

 

선릉 ||

성종의 능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3살의 어린 나이였고, 형 월산대군은 이미 장가를 간 뒤였기 때문에 당대의 세력가 한명회의 딸과 자을산군을 혼인시킨 뒤 예종이 승하하자 마자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했다.

선릉은 성종과 중종을 낳은 계비 정현왕후와의 동원이강릉이다. 근처에 중종릉인 정릉도 있다.

 

순릉 ||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장순왕후와는 자매간이다. 공혜왕후의 죽음으로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파평 윤씨 왕비시대'가 열린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정현왕후(중종 생모), 장경왕후(인종 생모), 문정왕후(명종 생모)가 조선 중기의 내명부를 휘젖게 된다.

 

연산군묘 ||

책에선 연산군을 '인간 망종'이라며 역사의 수치라 혹평하는데, 기록에 대한 맹신이 가져온 극단적 평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릉 ||

중종의 능이다. 이는 靖陵이고, 서울 성북구에 있는 貞陵은 태조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이름이 같으면서 한자 쓰임이 다른 경우가 많아 너무 헛갈린다. 중종은 왕비가 3명, 후궁이 7명, 자식이 9남 11녀였지만, 단릉에 쓸쓸히 혼자 묻혀 있다. 원래 장경왕후 옆에 묻혀 희릉이라 했는데 계비 문정왕후가 이를 불쾌히 여겨 이장시켰다고 한다. 대부분의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만을 골라 위치해 있는데 정릉은 장마로 물이 불었을때 홍살문까지 물이 차는 흉지 중의 흉지다.

 

온릉 ||

중종 원비 단경왕후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반정으로 책봉되어 7일만에 폐위된 최단명 왕비이다.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 세력에 등을 돌렸다 해서 대신들이 신수근이 제거한뒤 뒷날 위협이 될 수 있는 왕비마저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희릉 ||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출산하고 일주일 만에 난산으로 인해 앓다가 사망했다. 장경왕후의 오빠가 윤임인데, 장경왕후가 요절하면서 파평 윤씨 문중은 대윤, 소윤으로 갈라져 피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희릉이 있는 곳에 인종의 능인 효릉과 철종의 능이 예릉도 있어 함께 '서삼릉'이라 불린다.

 

태릉 ||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태릉에는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세조가 금지시킨 능침의 병풍석이 웅장하게 둘러쳐 있고 12지신상이 각 방위를 지키고 있다. 문정왕후의 권세를 반영하는 듯하다. 근처에 아들인 명종의 능, 강릉이 있어 '태강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효릉 ||

인종의 능이다. 능호가 '효릉'인 것은 문정왕후의 갖은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죽어주는 것이 효"라고 말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8개월로 재위기간이 가장 짧으며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으로 대통을 잇기 위해 일부러 후사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강릉 ||

명종의 능이다. 명종은 8년 동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20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시작했는데, 그 기간은 고작 2년밖에 안된다. 죽어서도 문정왕후를 곁을 헤어나지 못했다. 태릉과 함께 서울 노원구에 묻혔다.

 

목릉 ||

선조의 능이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13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후궁의 소생이었던 하성군이 왕위를 잇게 되니, 이가 바로 선조다. 서자 출신이라는 것이 선조 평생의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이런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다고 하는데, 결국엔 훈구와 척신세력을 제거하고 사림세력을 중앙으로 불러올리기에 이른다. 선조는 대통만큼은 정비 출생의 대군으로 잇고자 했다. 그리하여 33세 연하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 영창대군을 낳았다.

목릉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과 함께 있어 동원삼강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광해군묘 ||

연산군 묘와 같이 복위되지 못하여 왕릉이 아닌 군묘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잇다. 광해군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그의 유언이 어머니 무덤 발치로 옮겨달라는 것이어서 지금의 위치(경기도 남양주)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장릉章陵 ||

선조의 또 다른 서자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인조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 정난이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다른 임금들의 경우 대신들의 강권에 못 이겨 등극하는 절차를 밟았으나 인조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대궐로 입성해 군왕이 되었다.

장릉은 원종과 왕후의 쌍릉이며 계단식 참도가 특징이다.

 

장릉長陵 ||

인조의 능이다. 파주삼릉 근처에 있다. 원비 인렬왕후와 함께 묻혔다. 이런 경우 왕비의 능은 별도의 능호를 쓸 수 없다.

 

휘릉 ||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인조와는 29세 차이였으며 큰아들 소현제사보다도 13살이나 어렸다. 그래도 내명부에선 최고 어른이었으며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네 왕대에 걸쳐 65년 동안 재세했다. 장렬왕후는 왕실의 국상을 당할 때마다 대신들 간 이념 대결의 정점 인물로 부각됐다.

 

영릉 ||

효종의 능이다. 효종은 북벌이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 왕비나 후궁과의 잠자리까지 멀리했다고 한다. 대의를 이루기 전에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당시 어영청은 양반집 자제가 고위직을 독점했고, 그들은 주색잡기에 허송세월을 보내며 훈련이나 고된 부역은 종들이 대신하게했다.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며 세월을 보내는 걸 '어영부영'이라 하는데 여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효종의 능 위치를 택지할때 풍수논쟁이 발생했는데, 고산 윤선도가 경기도 화성 지역을 택하자 서인과 그곳에 세가를 이뤄 살던 권문대신들이 반대했다. 결국 송시열의 주장대로 건원릉 서쪽에 예장하고 영릉이라는 능호를 정했다. 그러다 병풍섭에 틈이 생겨 세종대왕 능이 있는 곳으로 이장하게 됐다.


숭릉 ||

현종의 능이다. 현종은 재위기간 동안 예송논쟁으로 인한 극심한 당쟁에 휘말렸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청의 볼모로 있을 때 태어났는데 소현세자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고 해도 왕에 오를 수 없는 서열이었다. 숭릉은 명성왕후와의 쌍릉이다.


명릉 ||

숙종의 능이다. 숙종은 여간해선 웃지 않는 신중하고 엄격한 군주였다고 한다. MBC 드라마 <동이>에서 지진희가 보여줬던 숙종 이미지는 완전 허구였던 거다;; 그래서 묘호도 숙종이다. 숙종은 환국정치로 유명한데 이때 벼슬하면서 파직이나 유배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경신, 기사, 갑술환국이 다인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10여 차례 정도 됐다고;; 숙종 스스로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서오릉에 있는데 인현왕후와는 쌍릉, 인원왕후와는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익릉 ||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세딸을 낳아 일찍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스무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인경왕후는 단릉에 묻히고, 계비인 인현왕후는 숙종과 함께 쌍릉에 묻혔다.

 

의릉 ||

경종의 능이다. 경종은 14살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경종은 후사가 없었는데 소론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들 없는 임금이지만 경종을 옹호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정하자고 경종에게 상소했다. 궁지에 몰린 소론이 노론에게 역모 혐의를 씌어 노론이 대거 몰락하게 되는데, 이를 신임사화라 한다.


혜릉 ||

경종 원비 단의왕후 능이다. 세자빈 신분이어서 원이라 했다가 경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능이 되었다.

원릉 ||

영조의 능이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임사화에 연루됐던 소론들이 제거되고 노론 정권이 수립되었다. 영조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풀지 못한 한이 두 가지 있었다. 어머니 숙빈 최씨를 추존하는 것과 정비 소생의 왕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2남 11녀를 모두 후궁에게서 얻었다. 정비 소생을 얻으려고 66세의 나이에 15세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았다. 소론이 사도세자를 내세우자 정순왕후를 포함한 노론측은 사도세자 비행을 확대시켜 고해 바쳤다. 영조는 윈비인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정조의 뜻에 의해 그리되지 못했다. 정조는 영조로 하여금 효종이 묻혔다가 석물에 금이 가자 기가쇠했다 하여 버린 땅에 묻히게 했다. 그래서 정성왕후의 오른쪽 자리는 빈터로 남아있다고 한다.


홍릉 ||

영조 원비 정성왕후 능이다. 생전에 임금이 능터를 택지했다가 공터로 남겨진 것은 홍릉이 유일하다고 한다. 정성왕후는 오른쪽 영조 자리를 지금도 빈터로 남겨둔 채 쓸쓸히 누워있다.



영릉 ||

영조의 큰 아들이자 정조의 양부인 효장세자(추존진종)의 능이다. 파주삼릉 중 하나다.

융릉 ||

사도세자(추존장조)의 능이다. 융릉은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화려한 상설을 갖추고 있다. 세자 신분의 묘인데도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정조가, "뒤주 속 암흑에서 죽어간 아버지의 묘문까지 막아 답답케 해서야 되겠는가" 하여 융릉 정자각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능침 정면과 비켜서 있다.


건릉 ||

정조의 능이다.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예장했다.

 

인릉 ||

순조의 능이다. 순조의 원비 순원왕후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4년 만에 죽었고 딸들도 소생없이 죽었다. 순조는 안동김씨가 독주하는 세도정치보다 정쟁으로 용호상박하던 당쟁치도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뜻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기망으로 보위에 오른지 34년 만에 숨을 거뒀다.


수릉 ||

효명세자(추존문조)의 능이다. 세자빈은 풍양조씨 였는데 유명한 조대비다. 이때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권력 다툼이 심했다.


경릉 ||

효명세자 아들 헌종의 능이다. 헌종은 순원왕후의 대리청정과 신정왕후의 등살에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내우외환으로 이양선이 수시로 출몰해 통상을 요구해 왔다. 헌종이 23살의 나이에 죽자 순원왕후는 친정 안동김씨 세력들과 강화도에서 농사 짓던 철종을 데려다 보위에 앉혔다. 경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세 개의 능이 조영된 특이한 구조라고 한다.


이광 묘||

철종의 생부이자,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묘이다.


예릉 ||

철종의 능이다. 다른 왕족은 이미 역모로 다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차례가 철종에게까지 온 것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19세에 왕이 됐지만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혀야 했기 때문에 순원왕후가 대리청정을 했다. 철종이 삼년 만에 치세에 눈을 뜨게 됐지만 세도가문들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후궁을 두게해 정치에 소홀하도록 술수를 썼다. 철종은 1왕후 9후궁을 통해 5남 7녀를 얻었는데 영혜공주만이 생존해 박영효와 결혼했다. 예릉은 조선왕릉의 상절제도에 따라 조영된 마지막 왕릉이다.

 

이구 묘 ||

남연군의 묘이다. 숙종 이후부터 왕실의 혈통이 심하게 꼬인다.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대원군인데,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이다. 흥선대원군은 왕생지지의 길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묘를 써야 할 곳에 가야사가 있자 절에 불러 질렀고, 승려들에게 불탄 터를 내주면 나중에 새 절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절이 지금의 보덕사라고 한다. 1868년에 독일 상인과 천주교인들이 이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적발되는 일이 발행해 1만 명에 가까운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순종 이후 또 다른 황제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맥을 끊어놓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하응 묘 ||

흥선대원군의 묘이다. 이하응은 항상 공밥에 공술로 취한 상태로 다녔기 때문에 '궁도령'이란 별명을 얻었다. 철종의 돌연 승하로 대원군의 어린 아들이 보위에 오르자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갖고 있던 조대비와 대원군은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홍릉 ||

고종의 능이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합장되었고,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정자각 대신 침전이 세워진 최초의 능이다. 침전이 있는 능은 홍릉과 순종의 유릉뿐이다.

 

유릉 ||

순종의 능이다. 순종의 여생은 치욕의 대한제국 망국사와 함께했다.

 

영원 ||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능이다. 일본에 간 영친왕은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주입받았고 일본 왕녀와의 정략결혼 희생양이 되었다. 해방 후 곧바로 귀국을 원했지만 이승만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때 태어났는데, 후사가 없는 순종의 양자로 됐다가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태자가 됐다. 순종을 낳은 엄비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고, 나중에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설립에 거액의 황실 기금을 쾌척한 인물이다. 1963년 박정희의 주선으로 귀국했으나 실어증에 걸리 상태였다고 한다. 병상에 누웠다가 7년만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떴다. 부왕의 곁인 홍릉에 가까운 곳에 묻혔다.

 

이구 묘 ||

영친왕의 아들이다. 이구는 자신의 망국의 황세손임을 모르고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은 패망 후 영친왕 가족을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1963년 이구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다. 미국인과 결혼했고 대학 강의 및 사업, 종교제례 주관 등 여러 일을 하다가 2005년 일본에서 숨을 거뒀다. 영친왕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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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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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잘 몰랐다. 김수영을 잘 몰랐으니 강신주도 잘 몰랐던 거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 이 책은 강신주가 김수영을 위해, 김수영을 떠나보내기 위해 쓴 책이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돌아야하는’ 강신주 저 자신을 위해 쓴 책인 것 같기도 하다.

 

책을 통해 김수영을 알게 된 건 정말 값진 큰 수확이다. 50~60년대를 살았던 ‘나쁜 놈’들은 많이 알았고, 정의를 실천하고자 싸웠던 정치인, 재야인, 종교인, 학생도 조금 알았지만,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은 시인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대강의 생애와 김수영을 ‘김수영’으로 살게 한 50~60년대의 특수했던 상황들을 통해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속된 말로, 김수영의 인생은 6.25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말렸’지만,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 경험이나 아내의 외도가 시인 김수영을 있게 했다. 김수영처럼 불행한 시인이 또 있을까..?

 

김수영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을 살아 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바랐다. 이런 마음은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에 잘 담겨있고, 그래서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시가 김수영을 대표한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을 관통한다.. 뭐 이런 걸 떠나서 나는 이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가 가장 좋다.

...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려고 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293)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희망한다.

 

“시가 난해한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 일반 사람들이 시를 회피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거나 자신만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말은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다가왔다.

 

나는 보통 ‘시’의 형식과 내용이 추상적이고 막연하고 어떤 경우엔 지극히 개인적이라 난해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몰랐던 진심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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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철원 창비청소년문학 44
이현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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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청소년 문학을 주로 써왔다는 이현의 장편소설이다. 제목에 끌려서 샀다. 청소년문학인 것을 알았으면 안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꽤 재밌었다.

 

작가는 철원에 갔다가 '원래 철원 사람' 을 찾던 중 한 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이 해방 직후의 철원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민통선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일제 식민통치기에 태어나 조선인민공화국을 거쳐 전쟁의 와중에는 미군정의 통치하에 있었고, 지금은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노인의 이야기는 다른 어딘가에서도 접한 적이 있는데 잘 기억이 안난다. 기억은 어쩌다 완전하고, 대부분 불완전하다;;;

 

중학교 2학년때 처음 철원에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조선노동당 철원군 당사도 봤다. 총탄 자국이 흉터처럼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흉물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가이드 해주신 선생님이 알려주셨나, 아님 안내판에 적혀있었나, 건물 내부 한 켠엔가, 아님 건물 근처엔가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묻어두었는데, 나중에 발견된 유골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런 설명을 들었던가, 아님 보았던 것 같다. 기억은 역시....ㅠ

 

암튼 그러면서 이승복 기념관에서 받았던 공산당에 대한 어떤.. 공포스런 이미지가 더 강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들이 다 반공교육의 일부였다는 건 대학생이 되고난 뒤에야 알게됐다.

 

안전모를 쓰고 땅굴 속에도 들어갔었는데, 철망을 사이에 두고 북한쪽으로 연결된 굴을 보면서 당장에라도 북한군이 내려올 것 같은 공포를 느꼈었다. 그리고,, '재두루미'도 생각이 난다. 철원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과 "재두루미?? 쟤.. 두루미"하면서 노닥노닥했던 것들. 그때 친해진 친구 한 명과는 일년 정도 펜팔을 했었다.ㅋㅋ

 

암튼 철원은 남다른다. 전쟁 당시의 각종 접전지가 모여 있고, 총포 소리에 적막할 겨를이 없는, 군 초소의 검문을 거쳐야 출입할 수 있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분단의 상흔을 너무나 많이 간직하고 있는 애잔한 곳이다. 빨리 통일이 되어서 철원이 '한반도 배꼽'으로써의 영광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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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서구에서 보통선거권의 역사는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여성참정권의 경우 이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을 18세기 말에 처음 시작한 프랑스의 메리쿠르는 '미친년' 소리를 듣다가 정말로 미쳐버렸고, 구즈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고 말하다가 의정단상에 오르기 전에 단두대에 올라야 했다. 여성 참정권이 프랑스에서 1946년에야 보장된 것을 본다면 우리의 남녀평등 보통선거가 1948년에 실시된 것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알 수 있다.

 

예전에 울 학교 논술쌤이 '민간이 학살'과 '양민 학살'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고, '양민 학살'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 좋다, 라고 하셨는데 그땐 이해를 잘 못했었고, 대체 왜일까,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 볼 사람이 없었는데, 그 답이 이 책에 있었다!!

 

* 원래 양민이란 용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항일유격대원들을 '공비'라고 폄하하여 부르면서 이들이 친일주구배들을 청산한 것을 '공비들의 만행'인 '양민학살'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그런 용어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지게 된 것은 유가족들이 학살의 희생자들이 빨갱이나 '통비분자'가 아닌 무고한 양민임에도 불구하고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의해 잘못 희생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좀더 강력히 호소하기 위해 이 말을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민학살이란 용어는 분명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양민학살이란 말은 빨갱이, 통비분자, 불순분자, 좌익가족들은 죽여도 된다는 가해자들의 논리가 갖는 부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양민인데도 희생되었다는 특정 희생자 집단의 억울함을 부각시키는 데는 유리할지 몰라도, 당시 일반적으로 양민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보도연맹원이나 좌익수감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칫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 .. 양민이랑 말은 기본적으로 편을 가르는 말이다. 양민과 양민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학살의 첫 단계인 편가르기의 첫발을 뗀 것을 의미한다. ... 양민학살이 학살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살(誤殺), 즉 죽여야 할 대상을 고르는 데에서 잘못을 범한 것만을 비판하는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민간인 학살은 국가권력이나 그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 일방적인 학살을 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민간인 학살이란 개념은 또한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대부분의 학살 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치사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한 황현. "죽는 것도 쉽지 않아.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어. 내가 그처럼 어리석다네." 황현이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 분명했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황현. 이런 게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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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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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들이 꼽은(누군지는 정확이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최고의 책'이라길래 읽어봤다. 책이 손바닥보다 작아서 눈이 좀 피로했지만 페이지가 한 눈에 들어와서 가독성은 훨씬 높았던 것 같다.

 

누군가 저자 니코스 카잔차스키를 '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쓴, 시대를 대표하며 여러 해 동안 명작, 고전으로 선정된 소설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스케일이 크거나, 역사적 격랑 속에서 고뇌하고 실천하는 투사 같은 주인공이 등장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벗어났다.

 

주인공 카잔차스키의 가치관이 조르바를 만나면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주면서 소설을 다 읽어갈때쯤 조르바가 내 곁에 머물다 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에는 조르바의 여성폄하적인 태도가 일관되게 나타나있는데, 이걸 제외한 그의 자족적 삶의 태도는 배울 만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116)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에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227)

 

이 부분은, 어떤 것의 변화, 성장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서둘지 말고 안달하지 말 것을.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혀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 천천히 가면 거기 안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274)

 

조르바로 인해 주인공이 변해가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532)

 

마음에 와닿는 조르바의 마지막 명언은 이거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547)

 

유명인들이 꼽은(누군지는 정확이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최고의 책'이라길래 읽어봤다. 책이 손바닥보다 작아서 눈이 좀 피로했지만 페이지가 한 눈에 들어와서 가독성은 훨씬 높았던 것 같다.

 

누군가 저자 니코스 카잔차스키를 '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쓴, 시대를 대표하며 여러 해 동안 명작, 고전으로 선정된 소설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스케일이 크거나, 역사적 격랑 속에서 고뇌하고 실천하는 투사 같은 주인공이 등장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벗어났다.

 

주인공 카잔차스키의 가치관이 조르바를 만나면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주면서 소설을 다 읽어갈때쯤 조르바가 내 곁에 머물다 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에는 조르바의 여성폄하적인 태도가 일관되게 나타나있는데, 이걸 제외한 그의 자족적 삶의 태도는 배울 만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116)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에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227)

 

이 부분은, 어떤 것의 변화, 성장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서둘지 말고 안달하지 말 것을.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혀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 천천히 가면 거기 안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274)

 

조르바로 인해 주인공이 변해가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532)

 

마음에 와닿는 조르바의 마지막 명언은 이거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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