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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국사 교과서에 윤휴가 언급되어 있는 부분은 딱 두 곳이다.
1)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103)
2)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301)
윤휴는 경신환국 시기에 사사되는데, 그의 죄목 중 하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했던 서인의 집권명분이기도 했던 '북벌 추친'이었다는 것, 그리고 역모를 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주자의 학설은 공자를 해석한 여러 학설 중 하나라고 여겼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윤휴가 배척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지패법, 호포법 등을 실시해 양반 사대부들로 하여금 평민과 같은 의무를 지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인에게 있어 받들어야 할 왕은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나라의 황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벌은 말로만 실천되어야 했던 것이고, 자신들은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특권을 대대손손 누려야 했던 것이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 더이상 국왕 압박용으로 북벌을 내세우는 게 불가능해졌다. 효종은 실제로 북벌을 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기해년에 송시열과 독대한 후 한 달만에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 이후 서인은 더이상 북벌을 주창하지 않았다.
효종이 죽으면서 남인과 서인을 갈라서게 한 결정적 사건,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윤휴는 이때까지 출사를 미루고 있었지만, 그를 학문적 스승이라 따르는 자들이 많아 예송논쟁에 말려들게 된다. 2차 예송논쟁 후 현종은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등 정권을 교체했는데 그 후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서른넷의 나이에 급서했다. 열네 살의 어린 숙종이 보위에 올랐다.
숙종은 기해예송때 물러났던 신하들을 다시 등용했다. 이때 숙종의 거듭된 출사 요청에 의해 윤휴도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때 윤휴의 나이는 만58세 였다. 윤휴가 관직에 나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북벌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마침 오삼계가 거병하여 청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윤휴는 북벌을 실행하려면 백성들의 힘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고, 양반과는 달리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성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일체감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윤휴는 지패법과 호포법 실시를 주장했다. 지패법은 기존의 호패 대신에 종이로 만든 신분증을 사용하는 것이고, 호포는 양반들도 군포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윤휴에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 중 지패법은 2년 정도 시행되었고, 호포법은 기약없이 연기되었다.
신분 차별을 완화하거나 신분제를 없애는 것이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윤휴의 생각은 집권 세력의 반발로 배척되었다. 남인 중 허적 같은 인물도 이러한 개혁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표면적으로는 '취지는 좋지만, 시기상조다..'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했지만 분명한 반대였다.
윤휴는 자신의 북벌 계획과 개혁안이 거듭 무시되자, 관직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윤휴에게 출사를 명했던 숙종 역시 삼번의 난이 진압되자 북벌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더이상 윤휴의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399) "윤휴는 자신이 이 모양이 된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조션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하겠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 것이었으며, 사대부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면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다른 사상도 용인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꾀하려 했던 것이 또한 시대의 우완이었다."
*시시콜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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