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1945~2008
임영태 지음 / 들녘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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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페이지;;; 너무 길어서 김영삼 정부까지만 읽었다. 김영삼의 재임 초기 지지율이 90%를 넘었었다는 얘기가 왜 이렇게 충격적이지. 아들 김현철이 연루된 한보사건으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 이었다는 IMF 경제 위기를 몰고 옴으로써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김영삼.

 

p121. 조봉암은 박헌영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처음 결성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미군정기에 박헌영의 독단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 전향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기용한 것은 당시 주요한 사회적 관심사였던 농지개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는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당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지주와 친일 세력이라고 비난받던 한민당을 배제하고, 전향했다고는 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인물을 농지개혁의 최고책임자로 기용한 이 절묘한 인사는 이승만의 뛰어난 통치술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토지개혁문제만큼은 민국당에 비해 이승만이 훨씬 개혁적이었다.)

 

p233. 4월혁명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있었던 일들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귀중한 경험과 자산이 되었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은 자신의 힘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경험했으며, 그 정신은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운동은 줄기차게 이어졌고, 드디어 876월항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4월혁명이라는 밀알은 땅에서 썩었지만 27년 후에 더욱 무성한 민주주의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p530. 하나회의 첫 출발은 육사 11기생이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생도시절 만든 5성회였다. 영남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는 생도시절 늘 어울려 다녔는데, 이들은 모두 별이 되기를 꿈꾸며 5성회란 친목회를 만들고 각각 성격에 따라 별 이름을 지어 불렀다. ..(후에 일심회로 바뀌었다가 한마음회로, ‘하나회로 바뀌었다.).. 이들은 당시 5.16의 주체였던 김종필을 비롯한 8기생들에게 적지 않게 불만이 있었다. .. 하나회 세력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8기생들을 제거하려 했다. .. 이후 10.26으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를 12.12를 감행하여 군부를 장악했다. 하나회는 군부 전체로 보면 소수였지만 이들은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상상황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다수 장교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쥘 수 있었다. .. 하나회는 말 그대로 5공의 실세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5공은 하나회의 축소판이었다. .. 재미있는 점은 5.16의 기획자였고,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은 박정희에게서 권력을 이양받지 못한 반면, 노태우는 특유의 처세로 전두환의 뒤를 이어 6공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나회는 대통령까지 주고받으면서 12년 동안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다. 이후 하나회는 노태우 정권이 끝난 다음에도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가고 있었지만, 김영삼 정권 시절 군대 내 사조직 척결이라는 철퇴를 맞아 뿌리가 뽑히고 말았다.

 

p536. 5.18 광주항쟁은 4610월 민중항쟁, 604.19혁명, 876월 항쟁과 함께 한국현대상서 가장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5.18 광주항쟁은 무력투쟁을 동반했다는 점에서는 10월 항쟁과 닮았고,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조직적인 봉기로 발전했다는 점에서는 4.19와 닮았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이념대립이란 요소가 강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과는 다르다. 6월 항쟁은 조직적으로 준비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과 다르지만, 이념적으로 보면 광주항쟁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 점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4.196월항쟁을 잇는 가교라고 할 수 있다. 4.19의 비조직성과 낭만성이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보다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고, 그 바탕 위에서 6월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p545.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에서는 레이건의 극우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소련과의 철저한 대결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신냉전시대를 불러왔다. 전두환은 레이건의 보수주의적 대결정책에 철저히 편승했다. ..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국산 무기개발과 같은 자주국방정책은 포기했다.

 

p547. 1980.5.17.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김대중은 다시 죽음과 맞대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대중이 남산에 연행된 지 48일 만인 74일 계엄사는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수사결과를 발표했다. ..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씌운 죄목은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이었다. 내란음모란 국민연합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조종하고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통해 광주학생을 배후조종하여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같은 날 특별사면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요었고, 8233일에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 내외의 여론과 미국, 일본 정부의 압력 덕분이었다. 82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대중은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 일체의 정치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국을 허락한 것이다. .. 852월 귀국했지만 곧바로 자택연금 신세가 되고 말았다.

 

p580. “재벌과 권력의 한판 잔치이는 5공화국과 6공화국의 정경유착을 설명해주는 가장 집약적인 표현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5공화국 동안 기업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비자금 총액은 9,500여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97417일 대법원은 이 가운데 2,2595,000만원을 뇌물로 규정하여 추징을 최종 결정했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는 5,000억원대의 비자금 가운데 2,8389,600만원이 뇌물로 규정되어 추징이 결정되었다.

 

p643. 3당합당으로 민자당은 국회의원 총수의 2/3가 훨씬 넘는 총의석 221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대신 야당은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김광일 등의 합당 불참파)으로 왜소화되었다. 3당합당을 두고 청와대는 헌정사 40년만의 명예혁명’, 김영삼과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총성 없는 쿠데타였다. ... 김영삼으로서는 합당을 통해 여당을 장악함으로써 손쉽게 다음 대권에서 승리하지만 생각만 있었을 뿐, 3당합당이 가져온 민주화의 후퇴는 안중에 없었다.

 

1990,10.13 ‘범죄와의 전쟁선포

1989. 문익환, 임수경, 황석영 방북 사건(90.7.20 8.15를 전후해 누구나 제한없이 판문점 통해 북한방문을 할 수 있게 허가. 그러나 판문점 통해 방문한 사람X. 모조리 전경차로 연행)

1990.1.2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1989.5.28. 전교조 결성

1991.4.26.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

 

p712. 한겨레 신문 창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신문.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로 광고. 50억원의 창간 기금을 금방 모았다. 한 사람의 주주가 1% 이상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함. 89.4.14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 취재 계획으로 구속되면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았다. 리영희 고문이 안기부에 의해 강제연행 되고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 당하는 사진이 신문에 나가자 국민 성금이 100억 원 이상이나 모였다.

 

p762. 문민정부의 추락은 1997년 한보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97년 재계 순위 14위인 한보그룹의 주력기업인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 정태수 회장이 대출과 사업의 인허가를 위해 정, 관계와 금융계 인사들에게 청탁하고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수사가 금융계와 정치권으로 확대되었다. .. 그런데 이런 와중에 김현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의사 김경식의 양심선언과 김현철의 비리를 입증할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었다. .. 김현철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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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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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을 압박하는 적막’ 이 한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고막을 압박하는 적막. 학교에선 아이들과 매일 전쟁을 치르고 퇴근해서는 보지 않는 TV를 잠들기 전까지 켜 놓는다. 내게 적막을 의식할 순간이 과연 존재할까. 그런데 ‘고막을 압박하는 적막’의 시간이라는 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알 것도 같다. 한 순간도 소리를 떠나서 살지 않지만 어떤 소리도 내게 의미가 되지 못할 때 난 적막한 순간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완성체처럼 여겨왔던 친구들과의 그룹으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추방당한 채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며, 그러면서 이미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사망한 상태로 살고 있는 다자키 쓰쿠루. 16년 동안이나 사형선고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봐 차마 용기도 내지 못하는 다자키 쓰쿠루. 그가 친구들로부터 배척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이기도 하지만, 작년부터 최근까지 우리 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이들 간의 불미스러운 일들과 오버랩이 되면서 소설의 도입부를 통과한 순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소설을 읽자니 내게 주인공은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그를 추방에 이르게 한 ‘시로’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째서 동무였던 다자키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아 그룹으로부터 추방되게 한 걸까. 나머지 세 명의 친구들은 다자키 쓰쿠루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그를 추방시키는 선택을 하게 됐을까. 그들에게 남겨질 것이 죄책감과 상실감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결국 16년 동안 지옥과 삶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했던 것은 다자키 쓰쿠루 뿐만이 아니라 그들 전부였다는 사실이 암흑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 온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위로이자 보상이 된다.

 

마음을 열고 만나기 시작한 사라의 조언으로 다자키 쓰쿠루는 정지된 채 머물러 있고 자신만이 훌쩍 떠나와 버린 과거의 시간 속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룹에 속해 있던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켜켜이 쌓인 과거의 시간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그래서 고난이 될 수도 환희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순례의 길을.

 

길을 떠나기 전 다자키 쓰쿠루는 결코 기쁨과 환희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 순례자의 마음이 그러하듯 고난과 고통을 짊어질 각오로, 다만 그 고난과 고통의 무게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이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순례자의 마음이라면 응당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다자키 쓰쿠루는 온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에 추방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결정되어진 고육지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이 선명한 색채를 지닌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두려웠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과거로부터 놓여나고 자의식까지 회복하지만 그리웠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친구들과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도 없다는 체념 또한 그의 몫이었다.

역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곳이지 결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되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전환했다면 내가 지나온 길이 나의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역은 목적지를 향해 열려있다.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

책이 내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느 역에 서 있는 걸까? 역을 만들어 나를 놓여야 할 곳을 지나쳐온 것은 아닐까.

 

 

p130.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해."

 

p291. "나는 내용 없는 텅 빈 인간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이 없기에 설령 일시저기라 해도, 거기서 쉴 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밤에 활동하는 고독한 새가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집 지붕 뒤편에서 한낮의 안전한 휴식처를 구하듯이. 새들은 아마도 그 텅 비고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공간을 마음에 들어한 것이다. 그렇다면, 쓰쿠루는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p308.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p363.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82.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p404. "인생한 복잡한 악보 같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16분 음표와 32분 음표, 기묘한 수많은 기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올바로 해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설령 올바르게 해독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올바른 음으로 바꿔 냈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리란 보장도 없다. 사람의 행위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엉켜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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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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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미국의 역할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 해당하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표현했던 바, 오히려 이 용어가 전쟁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p38~39. 우리가 주의할 점은 일본을 패망시킴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였지만 미국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태평양전쟁의 핵심지역은.. 태평양 해상이 아니라 만주와 북중국, 그 중에서도 동만주지역이었다. .. 그러기에 일본은 미국조차 가장 막강한 부대로 평가하였던 관동군을 만주지역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관동군이 지닌 위력은, 미국이 독자적으로 이와 대결할 때 1년 이상의 전쟁과 100만 명 이상의 미군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그 부담을 소련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 막강한 관동군을 포함하여 일본 육군의 대부분과 대항한 것은 아시아 민족과 소련이었다.

 

p58.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종종 모스크가 협정의 실현을 둘러산 민주진영과 비민주진영의 공방전을 찬탁이냐 반특이냐의 대결로 표현한다. 그러나 당시 민주진영은 신탁통치를 옹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탁통치 음모를 폭로, 공격하고 있었다. 민주진영이 옹호한 것은 신탁이 아니라 그 당시 표현대로 모스크바 협정의 총체적 실현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19477.27 인민대회에서 확연히 나타났던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촉구였다.

 

p75. 1019.24 총파업을 지지하는 대구의 400여 개 공장의 노동자들은 집회를 가진 뒤 학생 및 일반 시민 약 1만여 명과 함께 미군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인해 시민 1명이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

 

p123. 유엔 총회 석상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이 만에 하나 단독선거의 실상을 폭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미국은 유엔 사무국으로 하여금 유엔 총회가 열리는 파리행 여행비용을 위원단에 지급하지 못하도록 종용함으로써 총회에 위원단이 참석하는 것을 저지시켰다. (주권을 도둑질한 강도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p130. 북조선 인민회의는 북한 지역에서의 대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를 825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그 세부지침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남한에서는 공개적인 투표가 곤란한 사정을 고려하여 비밀리에 이중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360명의 남한 지역 대표를 최종적으로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시군구 선거위원회 산하에 전권 위원회가 결성되고 위원회의 성원들은 민주주의민족선전이 내정한 대표들에 대한 서명투표를 각 부락과 직장 단위로 비밀리에 수행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대략 7월 중순부터 남한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와 관련되어 724일부터 810일까지 수도경찰청에 검거된 수만도 모두 1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 북한 당국의 집계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총 유권자 중 99.97%가 투표하였고, 반면에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1,754만 명 중 77.52%가 비밀 선거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에서의 투표자 수는 5.10단독선거의 그것보다 65만 명이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본부를 평양에 두되 수도는 서울로 하며 남북에 걸친 전 인민의 선거로써 성립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자처하였다.

 

p141.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 민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외세와 봉건적 착취세력에 항거해 왔던 불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그에 항복한 봉건왕조에 대한 최후의 저항기지가 되었고 가까이 조선 말기에는 6차례에 걸친 민중봉기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귀환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강인한 투쟁력과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p149. 저항자에 대한 밀고가 장려되었고 그 밀고는 진위를 묻지 않았으며 밀고된 자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간단히 처형되었다. 모든 토벌대에게는 매일 한 명씩의 저항자를 색출해야만 한다는 의무가 주어졌다. 또한 유격대를 생포한다거나 살해했다는 물적 증거로서 머리를 상관에 제시만 하면 직책 여하에 따라 상금 및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민중학살 장려금제도가 마련되었다.

 

p162. 여순 봉기라는 폭탄을 안겨받은 이승만 정부는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하여 군대 내부의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급속히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 남한의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이나 되는 곳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게 되었다. .. 이러한 탄압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1948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1949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압제에 저항하는 118.621명의 인사가 이 법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미군이 철수해 버린 상황 하에서 이승만 정부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군대는 비록 저항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동요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더라면 이승만 정부는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도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즉시 미국에 의한 대규모 군사적 개입이 단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p179. 미국이 애초에 기대를 걸었던 중국이라는 보루가 허물어지자 일본은 아시아의 병참 기지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1949년과 1950년 상반기 사이에 미국은 한국을 우선적 목표로 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대비체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것은 맥아더가 1949년 일본인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이 자기방어의 권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일깨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 1949416, 일본인의 조세를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하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 본래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그 전부가 미국에 의해 몰수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군수산업의 시설 몰수분이 미처 30%를 채우기도 전에 배상 몰수조치가 중단되었다. .. 미국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 및 기타 아시아의 옛 식민지 민족들에 대한 전통적인 경멸감ㅇㄹ 되찾도록 부추겼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모종의 대규모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효과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였고, 이를 보장하기 이한 방편으로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하였던 것이다.

 

p190. 어떻게 보면 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 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순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625일 본격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p205. 딘 소장이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혔듯이 당시 남한지역에서의 이승만 타도와 조선인민군에 대한지지 열기는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승만 정권이 서울에서 퇴각한 이후 남북 협상파,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 그동안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왔던 인사들을 대부분 북한군에 대해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다.

 

p215. 미국은 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의 대의명분으로서 38선의 원상회복을 내세워 왔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개입원칙은 최초의 순간부터 지켜지지 않았었다. .. 38선을 돌파함에 있어 미국은 참전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일을 저질러 놓은 다음 의회와 유엔의 승인을 얻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기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을 폭파해버렸다. ... 본래 중국군은 4일분의 식량과 80발의 소총탄만을 지급받은 뒤 트럭 한 대 없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 뒤로 필요한 식량과 장비는 모두 북한 유격대와 주민들의 협력을 통해 현지 조달받았다.

 

p239. 1950113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의 패배를 시인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중이고 그 권한이 맥아더에게 주어졌다고 말했다.

 

p249. “본 조사단(국제과학조사단)은 결론으로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 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p257. 본래 전쟁포로는 1949년에 수정 조인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실질적인 적대행우가 끝나면 지체 없이 석방, 송환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미국도 이 협정에 조인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측이 제네바 협정에 제시된 원칙에서 벗어나 이른바 포로의 자유교환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 미국이 포로의 자유교환을 들고 나온 것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포로들 중 일부가 송환되지 않음으로써 상대편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p264. 국민방위군 사건... 부통령 이시영이 항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p268. 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국회에 수용하고 나서, 경찰과 군이 국회를 포위하고 깡패 출신 국회의원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가운데 195274, 발췌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되었다. 숨막히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립투표를 강요한 결과 출석 166, 찬성 163, 기권 3명으로 문제의 발췌개헌안은 전격 통과되고 말았다.

 

p279. 이승만 정부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관한 최고 결정권자인 미국에 의해 휴전회담은 재개되었다. 국내외적인 압력에 쫓긴 미국은 보다 유리한 조건 하에서 휴전협정을 타결짓기 위하여 재차 중국에 대한 원폭 투하를 협박하였다. .. 북한측은 결국 미국의 포로교환에 관한 최종안을 수락하였다.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북한과 미국이 합의한 포로교환 방식은 중립국 감시 하의 자유교환이었는데 이승만은 이것을 거부하고 제네바협정에도 어긋나는 완전한 자유교환을 실시.

 

p290. 미국은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정치협상회의를 무난하게 결렬시킴으로써 관련된 휴전협정조항의 효력도 아울러 제거시키고자 하였다. 즉 미국은 휴전협정의 최종적인 실현 과정에서 자신은 슬쩍 비켜남으로써 그것의 원칙까지 위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었던 베트남 문제의 처리를 위한 제네바회담에서 보여 주었던 행동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이승만 정부는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 대해 보다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회의는 아무 성과 없이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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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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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이 실존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고 한다.

 

리진(Lee Jin, 李眞, 리심 李心)은 조선의 궁중 무희이자 관기로서 조선 최초의 근대화 여성이다.[1] 리진은 외국 공사들 앞에서 춤을 선보였다가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플랑시가 고종에게 청하여 리진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와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2] 플랑시를 따라 파리에 가게 된 리진은 조선 사회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서구의 근대 문화와 앞선 지식을 배우게 된다.[3] 그녀는 플랑시가 고용한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워 프랑스의 책과 문물을 접하게 되고, 자유평등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러나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또 서양인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1896년 4월 27일, 플랑시와 리진은 플랑시가 조선의 3대 프랑스 공사로 취임하게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리진은 신분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관기의 신분이 되고, 프랑스에서 알게 된 자유와 평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리진은 견디지 못하고 금조각을 삼키고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현재 리진의 기록이 남아 있는 책은 프랑댕의 <En Coree(한국에서)>가 전부이며, 그녀를 다룬 소설로는 신경숙의 <리진>, 김탁환의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이 있다.[4]

 

 

이렇게 위키백과에서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니, 왠지 허탈하다. 소설 2권 마지막에선 리진이 불한 사전에 독을 바른 뒤 한장 한장 씹어 삼키며 죽어가는 것으로 묘사됐는데 위키백과에선 금조각을 삼켜 자살했다고 얘기한다. 헤어진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최초의 근대적 여성으로서 리진의 삶이라든가 시대배경이라든가 하는 것들보다는 리진에 대한 콜랭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가 주로 읽혔다. 두달 넘게 생과 사의 경계를 넘으며 조선과 프랑스를 오가게 했던 사랑의 힘도 결국 언젠가 소진된다는 것. 콜랭이 조선의 공사로 재부임해보면서 리진에게 쓴 편지에,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인듯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선택이었다, 라고 고백하는데 그 부분을 읽는 동안 마음 속에 찬바람이 휘휘 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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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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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부모님이 학교 도서관에 200여 권의 도서를 기증하셨다. 예전에 보영이가 재밌게 읽은 책이라고 얘기해준 적이 있어서 읽어보려고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있었는데, 200여 권의 책 중 이 책이 있었다. 소설의 흡입력이 대단. 공강 시간 야자 감독 시간 틈틈이 이틀 만에 읽었다. 요즘 학교 안에서는 재미를 찾기 어려워서 틈 나는대로 눈치껏 책을 읽었다. 욕 먹을 각오로.

 

에필로그에서인가 저자는 역사, 정치, 전기 등의 특정 장르 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난 이 소설이 앞에 언급한 장르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박정희 시대까지를 배경으로 삼으며 주인공의 삶이 때로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 부분이 그려지고,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등장인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부분이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발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늙은 노파, 금복이, 춘희의 일대기 혹은 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 천명관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식의 흐름을 여과없이 보여주듯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거나 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시켜 놓고, 또 저자 자신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얘기하는 상황들 자체가 결국은 자기가 만들어놓은 설정이면서 말미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라고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소설의 구조 역시 낯설었다.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310)

 

부조리한 인생을 폭로하기 위해 저자는 이 장편.거대.서사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자본주의의 법칙, 헌금의 법칙, 사랑의 법칙, 만용의 법칙, 경영의 법칙 등 '법칙'이라는 표현을 써서 현실 문제에 순응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지만..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저자 자신은 세상을 바꾸려거나 비판하고자 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게하려고 한 것 같은데 오히려 세상의 부조리를 비틀고 꼬집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 소설이 가볍게 읽히면서도 손에 쉬이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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