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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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을 압박하는 적막’ 이 한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고막을 압박하는 적막. 학교에선 아이들과 매일 전쟁을 치르고 퇴근해서는 보지 않는 TV를 잠들기 전까지 켜 놓는다. 내게 적막을 의식할 순간이 과연 존재할까. 그런데 ‘고막을 압박하는 적막’의 시간이라는 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알 것도 같다. 한 순간도 소리를 떠나서 살지 않지만 어떤 소리도 내게 의미가 되지 못할 때 난 적막한 순간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완성체처럼 여겨왔던 친구들과의 그룹으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추방당한 채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며, 그러면서 이미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사망한 상태로 살고 있는 다자키 쓰쿠루. 16년 동안이나 사형선고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까봐 차마 용기도 내지 못하는 다자키 쓰쿠루. 그가 친구들로부터 배척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이기도 하지만, 작년부터 최근까지 우리 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이들 간의 불미스러운 일들과 오버랩이 되면서 소설의 도입부를 통과한 순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며 소설을 읽자니 내게 주인공은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그를 추방에 이르게 한 ‘시로’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째서 동무였던 다자키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아 그룹으로부터 추방되게 한 걸까. 나머지 세 명의 친구들은 다자키 쓰쿠루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그를 추방시키는 선택을 하게 됐을까. 그들에게 남겨질 것이 죄책감과 상실감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결국 16년 동안 지옥과 삶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했던 것은 다자키 쓰쿠루 뿐만이 아니라 그들 전부였다는 사실이 암흑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 온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위로이자 보상이 된다.

 

마음을 열고 만나기 시작한 사라의 조언으로 다자키 쓰쿠루는 정지된 채 머물러 있고 자신만이 훌쩍 떠나와 버린 과거의 시간 속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룹에 속해 있던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켜켜이 쌓인 과거의 시간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그래서 고난이 될 수도 환희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순례의 길을.

 

길을 떠나기 전 다자키 쓰쿠루는 결코 기쁨과 환희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 순례자의 마음이 그러하듯 고난과 고통을 짊어질 각오로, 다만 그 고난과 고통의 무게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이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순례자의 마음이라면 응당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다자키 쓰쿠루는 온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에 추방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결정되어진 고육지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이 선명한 색채를 지닌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두려웠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과거로부터 놓여나고 자의식까지 회복하지만 그리웠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친구들과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도 없다는 체념 또한 그의 몫이었다.

역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곳이지 결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되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전환했다면 내가 지나온 길이 나의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역은 목적지를 향해 열려있다.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

책이 내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느 역에 서 있는 걸까? 역을 만들어 나를 놓여야 할 곳을 지나쳐온 것은 아닐까.

 

 

p130.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해."

 

p291. "나는 내용 없는 텅 빈 인간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이 없기에 설령 일시저기라 해도, 거기서 쉴 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밤에 활동하는 고독한 새가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집 지붕 뒤편에서 한낮의 안전한 휴식처를 구하듯이. 새들은 아마도 그 텅 비고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공간을 마음에 들어한 것이다. 그렇다면, 쓰쿠루는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p308.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p363.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82.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p404. "인생한 복잡한 악보 같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16분 음표와 32분 음표, 기묘한 수많은 기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올바로 해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설령 올바르게 해독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올바른 음으로 바꿔 냈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리란 보장도 없다. 사람의 행위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엉켜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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